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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15화)
5 장 남궁세가(2)
“휴우, 사람이 어떻게 저리도 예쁘담!”
허둥지둥 방문을 세게 닫고 침상에 몸을 누인 화영은 남궁성아를 떠올리며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휘젓고 따뜻한 물이 받아져 있을 욕조로 향했다.
“헤에…….”
‘그 아이에게 반한 건가?’
‘그런 것 같은데? 저 실없이 웃는 것 좀 봐.’
욕조에 들어와서 장난도 치지 않고 풀린 눈으로 실실거리자 실프와 운디네가 나와서 한마디씩 했다. 딱히 화영이 소환한 것은 아니지만 극도의 친화력으로 인해 마음대로 화영의 마나를 이용할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남궁성아라고 했지? 성아…… 이름도 예쁘네.”
‘완전히 갔군.’
‘그 아이가 그렇게 좋아?’
“응! 그렇게 예쁜 여자는 처음인걸. 그애를 보니까 가슴이 두근거렸어. 이게 아빠가 말한 사랑이란 건가?”
‘예쁘긴 하지만 이루어지긴 힘들 텐데.’
언제고 상황을 지켜보다가 화영을 돕기 위해서 역소환 상태에서도 정령계로 가지 않고 주위를 맴도는 실프였다. 다른 정령들은 몰라도 실프만큼은 화영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고, 때문에 화영도 실프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 실프가 하는 말.
화영에겐 심장이 벌렁이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왜? 어째서?”
‘인간들은 배경이라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솔직히 말해서 너희 둘은 배경 차이가 너무 나.’
“하지만 사람들이…….”
‘그래. 사람들이 지금 널 떠받들고 있긴 하지. 하지만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나는 최소 5써클 마스터 급이야. 너를 떠받들 이유는 결단코 없지. 이 세계에는 정령술이란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으니 정령술을 노리는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얘긴데 진실을 알게 되면 그들은 널 지금처럼 대하지 않을 거다.’
오랜 세월을 보내온 만큼 실프의 판단은 정확했고, 대답은 냉정했다. 화영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모두 맞는 소리인지라 표정이 급격히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럼 방법이 없는 거야?”
‘혹시 모르지. 네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강해진다면. 아니, 그들만큼만 강해져도 충분하겠지…….’
금방이라도 울 듯한 화영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실프는 조그만 희망을 남겨 줬다. 하지만 그것이 실수라면 실수. 강해지면 된다는 얘기에 화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거라면 문제없어! 난 아빠의 뒤를 이어서 정령술의 극을 이룰 거니까. 그리고 아빠가 상급 정령 하나만 부릴 수 있으면 누구에게도 절대 지지 않는댔어!”
‘상급 정령은 7써클에 올라야 부릴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어?’
“정령술의 극을 이룰 거라니까! 난 아빠 소원대로 8써클에 오르고 말 거야!”
실프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지만 들려온 대답은 더 어이가 없었다. 7써클 마스터가 인간의 한계라는 것은 이미 대륙 전체에 알려진 바. 그 점은 화영도, 그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전 주인인 쥬논도 숙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8써클이라니?
‘하여간 부자가 똑같군. 인간인 주제에 드래곤의 영역인 8써클에 도전하다니.’
“그래도 난 할 거다, 뭐!”
입을 삐죽 내밀며 고집 부리는 화영을 보며 실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아직 어리니 희망을 갖는 것도 좋겠지. 그리고 한번쯤 좌절을 맛보는 것도…….’
일반 하급 정령이라면 이 정도로 친화도가 높을 시 제어하지 못하고 생각하는 게 저절로 화영에게 전달되었겠지만 이 실프는 그들과 달랐다. 극도로 높은 친화력을 보이면서도 생각을 갈무리할 줄 알았고 세상을 넓게 볼 줄도 알았다.
하지만 화영은 다 알면서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 실프는 아빠가 자신에게 남겨 준 마지막 선물이었으므로.
“좋아. 그럼 오늘부터 내공 수련은 접고 마나 수련을 하루 종일 해야지!”
‘그럼 이 아일 조금밖에 못 볼 텐데?’
“그, 그럼 이 다음 문파부터!”
말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이젠 놀려 먹기로 작정한 실프였다.
운디네의 도움으로 몸을 깨끗이 하고 역시나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은 화영은 벽면에 걸린 커다란 동경으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며 남궁성아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백의 평상복. 황보세가처럼 불순한 의도가 없고 화영에게 어울리는 깔끔한 백의는 화영의 기분을 절로 좋아지게 했다. 물론 불순한 의도가 깔린 옷을 줬다 해도 의미를 알지 못하는 화영은 멋있는 이상 가리지 않고 입었을 테지만.
‘역시 쥬논을 닮았어. 백의가 잘 어울리는군.’
“정말? 다행이다. 그런데 실프.”
‘왜?’
“넌 우리 엄마를 본 적 있지? 어떤 분이야? 어떻게 생기셨는데? 아마 예쁘시겠지? 그리고 왜 나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없어?”
‘…….’
화영의 쉴 새 없는 질문에 실프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공자님, 준비되셨으면 식당으로 드시지요.”
화영이 뭔가 더 말하려 할 때, 때마침 남궁성아가 식사 시간에 맞춰 화영을 데리러 왔다.
‘그 아가씨군. 나가 봐.’
“예, 나가요!”
남궁성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화영은 다시 한 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밖으로 나갔다. 그사이 스스로 역소환되는 실프. 그러나 여전히 한 점 바람으로 남아 화영 곁을 맴돌았다.
“어머, 옷이 잘 어울리시네요.”
남궁성아는 진심으로 화영의 모습에 감탄했다.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마차 안에서 뒹군 데다 주변에 여자도 한 명 없으니 치장은커녕 머리조차 정돈하지 못했던 터라 말끔히 씻고 난 후의 지금 모습은 좀 전과 딴판인 것이다.
게다가 당장에 여자 옷만 입혀 놓아도 미녀 소리 들을 화영이니 깔끔한 백의와 어울려 그녀가 반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고, 고맙습니다.”
“풋.”
화선지에 먹이 번지듯 하얗던 피부가 연한 홍조를 띠자 그 귀여움에 남궁성아가 참지 못하고 작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화영에게 용서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공자. 제가 결례를…….”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너그러이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리로.”
금세 정신을 차린 남궁성아는 가볍게 읍을 하고 앞장서서 걸었다. 일정한 보폭으로 서둘러 걷는 남궁성아와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는 화영.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연방 싱글벙글이었다.
“오셨습니까.”
“아, 예.”
식당이 따로 있긴 했지만 식사는 야외에 차려져 있었다. 연회라 해도 좋을 정도로 음식의 수와 양 또한 대단했다. 아무리 검소한 남궁세가라지만 중요한 손님을 앞에 두고 돈을 아끼는 짓은 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화영과 남궁성아가 다가오는 모습을 멀리서부터 지켜보며 의아해 하던 중이라 화영이 자리에 앉고, 식사가 시작됐어도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왜들 그러지?’
분위기가 다소 어색하자 화영도 무림인들의 눈치를 살폈다. 직접 말은 안 하고 서로에게 입만 뻥끗거리는 무림인들. 전음을 사용하는 것이었지만 전음이 뭔지 모르는 화영은 소리가 작아서 안 들리는 건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실프, 저 소리를 내게 전달해 줘.’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화영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겠는지 실프를 부렸다.
‘자네가 이 장원의 주인 아닌가? 어서 물어보게.’
‘주인인 것과 그걸 묻는 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래도 주인인 자네가 먼저 말을 건네는 쪽이 자연스럽고 좋지 않은가? 어서 화영님께 묻게!’
기실, 아무리 실프라도 전음을 엿듣는 것은 한 번에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일류 이상의 고수가 소리를 기로 만든 길에 실어 상대에게 보내는 것이 전음인지라 자칫하면 실프가 그 기의 길에 부딪혀 큰 타격을 입거나 약하다면 소멸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화영의 실프는 일반의 그것들과 격을 달리했고 기의 길이 끝나는 지점을 정확히 포착하여 누구도 의심하지 못하게 슬쩍 소리를 나눠서 가져왔다. 아주 능숙하게.
“뭘 물어보시려고요?”
“헛! 화영님이 그걸 어떻게?”
자신에게 물어볼 게 있다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들은 내용을 말해 버린 화영은 잠시 당황해 하다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죄송해요.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 너무 궁금해서 엿들었어요.”
“저, 전음을 엿들으셨다고요?!”
누군가의 전음을 엿듣는다는 말은 고금을 통틀어 전해 내려오는 말이 한마디도 없었기에 무림인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호, 혹시 독순술을 익히셨습니까?”
“독순술? 그게 뭔데요?”
“사람의 입술 모양을 보고 무슨 말을 하는지 맞추는…….”
“아니요. 그런데 그런 것도 있어요? 신기하네.”
“그, 그럼 어떻게?!”
“그냥, 바람에게 부탁해서……. 죄송해요.”
“허허허허!”
바람에게 부탁했다. 또 한 번 자연동화경의 위력을 실감하는 무림인들이었다. 또한 꼭 화영을 자파로 끌어들여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저희가 궁금한 것을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화영님께서는 어째서 보폭이 일정하지 않으신 거죠?”
일반적으로 무공을 익히면 보폭이 일정해진다. 그만큼 호흡이 고르고 일정하다는 증거요, 매 순간 걸음마다 공격과 방어가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무림의 상식으로써 이류만 되어도 각자에 맞는 보폭을 찾아 몸에 익혀 놓을 정도였다.
한데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도 강한, 아니 여기 있는 사람 전체를 합쳐 놓은 것보다 강한 화영의 보폭이 매우 불규칙하고 엉망인 게 아닌가? 물론 무림인들만의 착각이지만.
아무튼 상황이 그러하니 궁금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네? 보폭을 꼭 일정하게 해야 하나요? 전 이게 편한데.”
“호오, 어째서입니까?”
보폭을 꼭 일정하게 해야 하느냐는 화영의 반문을 꼬집는 말로 해석한 무림인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이유를 물었다.
“그냥, 그렇게 하려면 힘들잖아요.”
아주 솔직하고 단순한 어린아이의 대답이었지만 해석하는 쪽은 전혀 달랐다.
‘오호, 보폭을 유지하는 것이 진기를 더 아낄 수 있다고 생각했거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걷는 것에 불필요한 힘을 쓰고 있었던가?’
‘발이 가는 대로 놔두면 될 것을. 몸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조절하려 하다니 내가 과욕을 부리고 있었구나. 아미타불!’
이번엔 부공삼매까지 가는 사람은 없었지만 연회는 순식간에 작은 깨달음의 향연으로 변해 있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건가?’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지자 무안해진 화영은 조용히 눈치만 보며 음식을 집어먹었다. 그러다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생각해 두었던 말을 꺼냈다.
“저기, 여기서 제가 볼 책 말인데요.”
“예, 지금 고르시겠습니까? 저희는 부끄럽게도 제왕검형과 창궁무애검법이라는 이름을 쓰는 검법을 비전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봐 주시겠습니까?”
남궁벽은 이제 대놓고 화영에게 무공을 진보시켜 달라 요구해 왔다. 다른 자들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세가를 위해서라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아니, 전 그것보다 기관진식에 관한 책을 보고 싶은데요. 남궁세가는 기관진식이 뛰어나다고 들어서…….”
“그, 그러십니까. 그럼 식사 후 방으로 보내 드리도록 하죠. 한데 기관진식이란 게 독학으론 힘든 것이라……. 물론 알아서 보실 수 있겠지만 괜찮으시다면 우리 성아를 조언자로 붙여 드리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조, 좋아요.”
뜻밖의 행운에 화영은 속으로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다.
남몰래 슬쩍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남궁벽.
중원 전체에서 손꼽히는 미녀인 자신의 딸을 이용해서 세가의 힘을 불려 보려는 의도였다.
남궁벽의 속 보이는 행동에 이를 바득바득 가는 무림인들이었지만 자신의 주변에 저런 미녀가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할 뿐, 별다른 소리는 하지 않았다.
자신이었어도 저런 선택을 했을 테니까.
“자, 그럼 드십시다.”
‘남궁세가의 기관진식을 꿰뚫는 자가 있다면 그자가 통과하지 못할 기관은 없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높은 대우를 받은 남궁세가의 기관진식의 정수인 비급이 외인에게 공개된다는 것은 사실 남궁세가의 전력을 반은 깎아 먹는 짓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딸과 화영을 친해지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기관진식 말고도 그들에겐 제왕검형과 창궁무애검법. 그리고 용병술이라는 강력한 패가 있었으므로.
기관진식을 배운다는 것보다 남궁성아와 함께 있는다는 사실에 설렌 화영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대충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돌아가 비급을 가지고 올 남궁성아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