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무림정령사 1권(16화)
5 장 남궁세가(3)
“공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식사를 마치고 약 반 시진이 지나자 문밖에서 남궁성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쁘게 맞이하는 화영. 그러나 숙맥 기질이 금방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니 얼굴을 맞이하면 또 굳어 버릴 터였다.
드르르륵.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온 남궁성아의 손엔 방석과 비슷한 푹신한 무언가가 들려 있었고 그 위에 몇 권이나 되는 책이 쌓여 있었다.
“응? 한 권이 아니었나요?”
“남궁세가의 비급으로 분류되는 기관진식서는 두꺼운 한 권의 책이지만 그에 앞서 기본적인 지식을 쌓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제 독단으로 책을 몇 권 더 챙겨와 봤습니다. 혹시 기분 상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아,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아, 앉으세요.”
화영이 쭈뼛거리며 의자에 앉자 남궁성아도 살포시 미소 지으며 그 옆에 앉았다.
같이 책을 읽고, 설명해 주기 위해 바짝 붙어 앉은 그녀.
그녀의 체취가 느껴지자 화영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기관진식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저, 전혀…….”
“음, 그럼 이 책이 좋겠네요. 보통 기관진식 입문서로 쓰이는 책인데…….”
비록 오성은 뛰어날 테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자를 기관진식의 절정이라는 남궁세가의 기관진식에 통달하게 만들려면 막막함이 앞설 법도 하건만, 남궁성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차근차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또 한 번 반하는 화영.
그렇게 하루하루가 설레는 화영의 남궁세가 생활은 기분 좋게 시작됐다.
화영의 노력과, 재지 뛰어난 남궁성아의 가르침, 우수한 비급, 직접 실습해 볼 수 있는 다양한 기관진식들. 이 모든 것이 모이자 화영의 기관진식에 관한 이해는 일취월장해 갔다.
단 칠 일 만에 중급으로 분류되는 기관의 파훼법까지 익힌 화영.
무림인들의, 무엇보다 남궁성아의 칭찬에 한껏 들떠 있던 화영은 7일째 되는 날 저녁, 그녀의 날벼락 같은 소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
“저는 삼 일 후에 학관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전까진 최선을 다해 공부를 도와드리겠어요.”
“어, 어딜 간다고요?”
“아, 저는 지금 세가를 떠나서 천수학관(天樹學館)에서 생활한답니다. 이번엔 특별히 한 달간 집에 오는 걸 허락 받은 거라 삼 일 뒤에는 다시 학관으로 출발해야 해요.”
“그런…….”
화영의 머릿속에 벼락이 떨어지고 천지번복이 일어났다. 한 달은 함께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제 고작 삼 일이라니!
형언할 수 없는 놀라움과 슬픔, 아쉬움이 화영의 가슴을 가득 메우며 숨 막히는 답답함을 만들어 냈다.
“어째서 집을 놔두고 그런 곳엘…….”
천수학관의 설립 목적도, 하는 일도 모르는 화영으로선 집 떠나서 왜 사서 고생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 모습에 되려 의아해 하는 남궁성아.
“어째서라뇨? 천수학관의 입학은 정파 후기지수라면 누구나 원하는 거잖아요?”
“그런? 천수학관이란 게 뭐길래…….”
그제야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 남궁성아. 사전에 화영이 무림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을 듣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알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이유를 알았으니 이제 설명만 남았다.
“죄송해요. 무림의 일에 대해 관심이 없으셨다는 걸 제가 깜박했네요. 천수학관은 정사대전과 ‘그 사건’ 이후에 각 문파들이 무공 회복에 주력하면서 비교적 후기지수들에게 신경을 덜 쓰게 되자 그들을 한데 모아 훈련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에요. 무공뿐 아니라 강호에서 꼭 필요한 추종술이나 응급처치 같은 것도 배우고, 서로의 무공을 비교해 보면서 모자란 부분을 채울 수도 있죠. 이래저래 본가에 있는 것보단 무공을 훨씬 향상시킬 수 있어서 좋아요. 그 때문에 경쟁률이 무척이나 높지만, 전 오대세가의 이름 덕분에 쉽게 들어갔어요.”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학당처럼 뭔가 가르쳐 주는 곳이라는 것은 알아차렸다. 알아도 별로 달라질 건 없었지만 열심히 듣던 화영은 그녀의 말에서 이상한 부분을 찾아냈다.
“그 사건?”
“아…….”
화영의 물음에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던 남궁성아는 갑자기 주위를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 무림맹의 깃발 아래 뭉친 정파 무인들과 마교를 필두로 한 사파 무인들이 한바탕 전쟁을 벌였습니다. 지금도 정사대전이라고 하면 무림인들은 물론 일반인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죠. 문파 대 문파의 중소규모 싸움이 아닌 그야말로 전쟁이었으니까요. 일반인들도 큰 영향을 받은 겁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수많은 문파가 몰락한 것이 바로 그 정사대전입니다.”
“정사대전과 ‘그 사건’이라고 했으니 별개의 일을 말하는 거 아닌가요?”
남궁성아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침묵하자 화영이 슬쩍 끼어들었다.
“아, 그렇지 않아도 말하려고 했습니다. 보통 무림에서 큰 사건이 발생하면 그 사건은 특정한 이름으로 불립니다. 예전 오행마라는 전대 거마들이 사천에서 모두 132명의 사람을 죽였던 일을 사천혈겁으로 부르듯이 말이죠. 하지만 그 사건만은 특별한 명칭이 붙지 않았어요. 왜일까요? 그건 생각하기 싫어서입니다. 모두가 자세한 내용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건은…… 정파와 사파, 모두의 치부이며 치욕적인 일이었으니까요.”
목이 탔던지 남궁성아는 거기까지 말하고 다 식은 차를 조금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남은 말을 이어 나갔다.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사건’은 정사대전 막바지에 선우현이란 절대고수가 마교의 천마무궁을 시작으로 대형 사파와 구파일방 오대세가로 대표되는 정파의 대표 문파들의 비급 보관소를 습격해서 모두 불태워 버린 것이에요. 그로 인해 정사대전은 급히 막을 내렸고요.”
“사실은 다르단 말씀이세요?”
사실은 뭔가 다르다거나 소수만 아는 뒷이야기가 있다는 소리다. 아이다운 호기심으로 남궁성아의 아찔한 체취보다 이야기에 더 관심이 생긴 화영은 귀를 쫑긋 세우고 재촉했다.
“그 일로 인해 정사대전이 흐지부지 끝난 건 사실입니다. 그때의 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 많은 비급을 한데 모아둔 마교와 소림사였고요. 오랜 전통과 긍지를 지닌 집단답게 다른 중소문파처럼 다른 곳으로 비급을 빼돌리지 않았거든요. 덕분에 천마무궁과 장경각이 불타면서 큰 피해를 입었지요.”
남궁성아가 화술에 재능이 있어서일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관계없는 얘기만 늘어놓으며 화영의 애를 태웠다.
“아무튼 그 일로 인해 무림인들은 선우현, 그를 무척이나 증오하게 됐어요. 물론 전쟁을 일찍 종식시킨 그를 좋아하는 일반인들도 있었지만요. 하지만…….”
다시 굳게 닫힌 그녀의 입술에 화영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먹을 두 번 세게 쥐었다 펼 시간이 지나고 다시 열리는 그녀의 입.
“하지만 우리는 그를 미워해선 안 돼요. 정파와 사파 모두 그에게 큰 죄를 저질렀으니까. 거짓과 위선, 계산적인 생각으로만 그를 이용했고 배신한 우리 모두의 죄이니까. 그는 불쌍한 사람이에요. 그는…… 모든 것을 잃었어요.”
모두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지만 선우현이란 자를 대변하듯,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는 남궁성아였다.
남궁성아가 감성적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세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대충의 이야기는 짐작하게 된 화영은 착하고 순수한 그녀의 마음씨에 다시 한 번 빠져 들었다.
‘그러니까 선우현이란 사람이 정파와 사파 모두에게 배신당하고 그 복수로 비급을 불태운 건가?’
“아, 알았어요.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안 거예요? 무림인들의 치부라면 쉽게 알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남궁성아가 조금 울먹이기까지 하자 당황한 화영이 급히 말을 돌렸다. 사실, 그 눈물은 불쌍한 선우현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언젠가 가문을 위해 결혼이란 방법으로 희생될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단 한 번 이용하기 위해 애지중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며 키우는 소모품. 그것이 그녀가 바라본 자신의 상황이었으니까.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그것이 자기가 가장 믿던 상대라는 것에서 그녀는 선우현과 동질감을 느끼는 건지도 몰랐다. 그녀에겐 아직 미래형의 이야기였지만.
“어릴 적에 아버지 방에 몰래 들어갔다가 그 일의 전말이 적힌 종이를 봤어요. 저희 남궁세가도…… 그에게 빚을 졌거든요.”
그 빚이란 게 어떤 것인지 알 만했다. 아마도 선우현을 속이고, 배신한 무리 중의 하나인 거겠지. 남궁세가는.
남궁성아가 침울해 하자 화영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옛날 얘기 들춰 봐야 자신에게 득 될 것도 없고, 무엇보다 남궁성아의 찌푸린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 이 무슨 추태람! 죄송해요. 추한 꼴을 보여 드렸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이미 밤도 제법 깊었기에 남궁성아는 화영에게 간단히 인사하고 자신의 방으로 물러갔다.
그녀가 돌아가고 나서도 침상에 누워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는 화영. 그녀의 모습이 눈에 박혔고, 그녀의 말들이 귓가에 맴돌았다.
“천수학관이라……. 나도 갈 수 있을까?”
가고는 싶지만 아는 바가 없으니 당장에 생각할 수 있는 것도 극히 적었다. 아니,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였다.
‘강해져야 한다!’
경쟁률이 높다고 했다. 입학 기준은 아마도 무공에 있을 터. 그녀를 만나는 것도, 그녀와 인연을 만드는 것도 모두 강함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무림인들이 배우기 위해 다니는 곳이라면……. 무공을 가르치는 곳이겠지? 역시, 무공을 익혀야 하는 건가?’
지금껏 무공을 보조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마나 수련에만 치중했던 화영이었지만 한 여자를 만나기 위해, 마음을 고쳐먹었다.
물론 그렇다고 8써클을 이루는 것을, 정령술의 극을 보는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조금 돌아서 가려는 것뿐이다.
목표가 하나에서 둘로 늘었지만, 어느 것도 포기할 생각은 없는 화영이다.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게 흐르고, 삼 일이란 짧고도 긴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날랜 말을 타고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는 남궁성아의 모습을 보며 화영은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남궁세가의 검은 이미 보았다. 그들이 자랑하는 천뢰제왕신공(天雷帝王神功)과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은 이름과 달리 모두 쇠의 기운, 즉 금(金)기를 바탕으로 한 심법이었고 남궁벽 또한 팽가주, 황보가주와 달리 자신의 내공심법이 가진 속성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그래도 첫날 보폭에 대한 작은 깨달음과 자신의 딸과 화영이 제법 친분을 쌓게 만들었기 때문에 남궁벽은 충분히 만족했다.
그렇게 남궁세가에서의 십 일도 소년의 마음에 연정과 목표를 남기고 마차의 먼지 속으로 사라져 갔다.
6 장 소림사(1)
덜컹덜컹.
마차가 향하는 곳은 하남성 등봉현, 숭산에 있는 소림사. 지금은 위세가 많이 줄었으나 아직도 무림의 태산북두로 불리고 있는 천년소림이었다.
사실, 거리상으로 따져 보면 황보세가 다음은 남궁세가가 아니라 소림사가 되어야 맞았다. 하지만 네 번째 목적지인 무당파와의 거리를 생각하여 남궁세가를 먼저 들른 것이다. 다른 문파였다면 목에 핏줄을 세우며 반대했겠지만 소림이었기에 가능한 양보였다.
“휘유우.”
소림사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화영은 쉬지 않고 속성삼재심법을 운기했다.
작지만 꾸준히 커져 가는 단전.
어지간해선 불어나는지도 모르는 게 삼재심법으로 얻는 기였지만 속성삼재심법은 일반의 그것에 비해 좀 더 축기가 빨랐고, 마나의 움직임을 화영만큼 잘 파악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며 기쁘게 수련할 수 있었다. 그래 봐야 여타 명문 문파의 심법에 비하면 나비와 대붕(大鵬)의 차이였지만.
덜커덩!
“이크!”
한참을 잘 가던 마차가 크게 요동치며 멈췄다. 덕분에 마차 안을 신나게 날아다닌 화영. 부딪힌 머리를 부여잡고 아픔을 달래고 있을 때 급히 마차 문이 열렸다.
“화영님, 괜찮으십니까?”
“에고, 괜찮아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갑작스레 길이 안 좋아져서 마차 바퀴가 부서졌습니다. 태화현에서 손을 본다고 봤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무림인들은 죽을죄를 졌다는 듯 바닥에 머리를 쾅쾅 찧었다.
“끄응. 할 수 없죠. 그럼 이제 어떻게 해요? 수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아니면 걸어서?”
“그렇지 않아도 등봉현에 거의 다 도착했으니 조금 걸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실 소림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10리 밖에서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오는 게 관례이긴 합니다만……. 물론 원하신다면 마차에 타셔도 상관없습니다.”
청성파 고수 장부현이 슬쩍 화영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소림으로 향할 때 10리 밖에서 말에서 내리는 것은 무당산에 오를 때 해검지에 검을 매어 놓는 것만큼이나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냥 걸어가죠, 뭐.”
다행히 화영은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마차에 있으면 내공 수련을 계속할 수 있긴 하지만 울렁거림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분 좋게 바깥 공기를 들이마신 화영은 무림인들을 따라 신나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걷기를 반 시진.
드디어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하남성, 등봉현에 들어섰다. 좀 더 빨리 도착했어야 정상이지만 보폭도 짧고 신법도 모르는 화영 때문에 훨씬 지체된 것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화영은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투정만 부렸다.
“으아, 힘들다! 빨리 객잔 가서 쉬어요.”
“화영님. 좀 더 걸으셔서 오늘은 소림사에서 묵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소림사가 어디 있는데요?”
“저기, 소실봉 중턱입니다.”
“에엑?!”
그의 손가락 끝은 저 높은 산을 가리키고 있었다. 거기까지 올라갈 생각에 기겁을 하는 화영.
결국 어린애 특유의 떼쓰기가 나왔다.
“안 가요. 못 가요! 다리 아파 죽겠는데 저길 어떻게 올라가!”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는 화영이었다.
화영의 격한 반응에 괜히 겁먹은 무림인들.
화영을 달래기 위해 분주해졌다.
“원하지 않으시면 마을에서 객잔을 잡죠.”
“안 그래도 저희 역시 다리가 아프던 참이었습니다.”
“그럼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입산하도록 하겠습니다.”
도리어 오늘은 마을에서 쉬고 가자고 무림인들이 빌고 나서야 화영을 움직일 수 있었다.
소림사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객잔에서는 육류를 절대 팔지 않았다. 때문에 조촐하고 간소한 식사가 되었고 목욕으로 피로를 푼 뒤 일행 모두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