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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17화)
6 장 소림사(2)
다음날 오후,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일행은 숭산에 오를 수 있었다. 산에 오르기 싫은 화영이 배가 아프다느니 하며 이리저리 꾀를 부린 탓이다.
“시주들께선 어디서 오신 분들이신지요.”
용사비등한 필체로 소림사라 적힌 현판이 걸린 산문 앞에 도착하자 문지기로 있는 스님 한 명이 다가왔다.
“방장을 만나러 왔네. 안휘성에서 왔다 하면 알 것이야.”
“그럼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반장을 하며 양해를 구한 뒤 신형을 날리는 문지기 스님. 명불허전이라, 문지기에 불구한 자임에도 그 속도가 대단했다.
“허어, 명불허전이라!”
그들이 파악한 문지기의 무공 수위는 남궁세가에서 봤던 제자들과 비슷하거나 더 위였다.
문지기의 무위가 그럴진대 무력을 전담하는 무승들의 실력은 어떠할 것인가?
화영을 제외한 일행은 장경각이 불타면서 쇠락해졌다고 생각하던 자신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고 식은땀을 흘렸다.
“화영 시주와 여러분 모두 잘 오셨습니다.”
반 각도 되지 않아 소림사 방장을 비롯한 사대금강이 벗은 발로 뛰어나왔다. 그리고 당분간 향화객을 받지 말라는 방장령이 내려졌다. 과거라면 소림사가 이렇게까지 숙이고 나올 일은 없었을 테지만 장경각이 반 이상 불타 버린 사건은 소림을 변하게 만들었다.
“방장실로 드시지요.”
소림의 방장이라 하면 다른 문파로선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기에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일면식이 있었다. 때문에 특별한 인사는 필요 없었고 가벼운 목례 후, 방장인 백연대사와 사대금강을 따라 방장실로 향했다.
“앉으시지요.”
“아, 예.”
방장실에 들어서자 백연대사는 화영에게 상석을 권했다. 이렇다 할 배분도 없고 가진 거라곤 자연동화경에 이를 것이라 추정되는 힘 하나뿐인 화영이었지만 소림을 위해 백연대사는 세인들의 비난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이들도 그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딱히 제지하진 못했다. 소림에서 이렇게 나온 이상 자신들은 더한 일도 해야 할지 몰랐으므로.
그 자리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모르는 화영일지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번에 받고, 또 그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인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는지라 자리가 한없이 불편하기만 했다. 해서, 다른 자리에 앉고 싶었지만 이미 각자 자리 잡고 앉아 버린 무림인들의 행동이나 눈빛을 보니 가시 방석일지라도 앉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불편한 상황에서 백연대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화영 시주께서는 소림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있으신지요.”
구파일방, 오대세가 중 가장 널리, 많은 것이 알려졌지만 그와 동시에 가장 많은 것을 숨긴 곳이 소림사였다.
좀 전에도 봤듯이 소림 무공 비급의 집합소인 장경각이 불타고도 문지기가 오대세가의 무사 이상의 무력을 지닌 곳. 넘을 수 없는 천년거산으로 불리는 백팔나한진과 수많은 은거기인, 그리고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신승이 버티고 있는 곳이 무림의 태산북두, 천년소림인 것이다.
그런 소림에서 물으면 무엇이든 답해 주겠다는 태도로 숙이고 나왔다.
물론 앞의 설명만 들으면 아쉬울 게 뭐 있어서 그러느냐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철저한 불가인 만큼 은거기인들과 신승이 진정한 위기에 처했을 때만 도울 뿐, 세속의 일엔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을 생각하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모두가 비난은 하되, 속으론 인정하고 있었다.
“저기, 여기에 술법이란 걸 사용하는 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 승원 사숙을 말씀하시는군요. 아미의 정은사태, 곤륜의 청운진인과 함께 술법에 큰 조예를 가지셨지요. 화영 시주께서도 몇 번 보셨을 텐데요.”
“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승원 사숙께서 소소객잔에 머무셨습니다만.”
“아……!”
그러고 보니 점소이를 하면서 언뜻 본 기억도 났다. 하지만 우물 사건이 있은 후 얼마쯤 뒤에 갑자기 다른 스님이 대신 객잔에 머물렀다.
대충 윤곽을 잡은 화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백연대사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분을 만나 보고 싶어요.”
“음, 술법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그냥 조금요.”
“물이나 불 같은 걸 조금 다룬다 뿐이지, 화영 시주의 능력에 비하면 별것 아닐 텐데요…….”
백연대사로선 화영이 술법보다 무공에 관심을 가져서 소림의 무공 회복에 도움을 줬으면 했기 때문에 술법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못 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거절할 수는 없는 일. 결국 백연대사는 마지못해 승원대사와의 만남을 주선하기로 했다.
“법정은 화영 시주를 승원 사숙께 모셔다 드리고 법영, 법현은 이분들을 지객당으로 안내해 드리거라. 법무는 잠시 남도록.”
“예, 방장.”
사대금강을 시켜 무림인들을 지객당으로, 화영을 승원대사에게 보낸 백연대사는 급히 휘갈겨 쓴 서찰을 법무에게 맡겼다.
“너는 신법을 최대한 발휘해서 무오 사숙조께 이 서찰을 전하거라. 답은 가져올 필요 없다.”
“예.”
“어서 서둘러라!”
백연대사의 재촉에 급히 몸을 돌린 법무는 금강부동신법을 최대한 발휘해서 한 점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신법을 구사하진 않았지만 승원대사의 거처에 도달하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은거에 든 여타 고수들과 같이 높고 깊은 산 어딘가가 아니라 그저 폭포가 있는 한적한 계곡에 자그마한 초옥을 짓고 살 뿐이었으니까.
법정과 화영이 도착했을 때는 마침, 승원대사가 폭포를 마주하고 술법을 시험하는 중이었다.
“하앗!”
촤악!
축축하게 젖은 승원대사의 장삼이 펄럭이며 그의 우수가 수면을 때렸다.
세차게 튀어 오르는 물방울.
제각기 떠오른 물방울들은 널리 퍼지지도, 땅에 떨어지지도 않고 한데 뭉쳤다.
“수룡타(水龍打)!”
짝!
박수치듯 합장을 한 승원대사의 두 손이 뭉쳐진 물을 때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형태가 없던 한 덩어리의 물이 용의 형상을 이루며 폭포로 날아간 것이다.
“허엇!”
“으음?”
그 광경을 본 법정과 화영의 반응은 서로 달랐다.
무공 수련에 전념하느라 승원대사를 볼 기회가 자주 없었던 법정은 그의 기묘한 술법에 넋을 놓았고, 방법 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지만 그의 기술을 파악한 화영은 되려 수룡타란 술법을 분석하고 있었다.
“사숙조님!”
“응? 넌 법정이 아니냐. 여긴 어쩐……. 화영님?”
땀인지 물인지 모를 액체들을 소매로 훔치던 승원대사가 법정과 그 옆에 있는 화영을 알아보고 냉큼 물에서 나왔다.
화영이 그의 술법에 관심이 있는 만큼 그 역시 화영의 능력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화영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화영님께서 사숙조님의 술법에 관심이 있으시다 하여 제가 모시고 왔습니다.”
“오오, 그러십니까?”
승원대사는 술법에 관심이 있다는 말에 반색하며 화영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럼 저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얘기들 나누십시오.”
“아니다. 이분은 내가 모셔갈 테니 넌 그만 가 보거라.”
“음, 그럼 제자는 이만.”
한걸음 물러났던 법정은 승원대사의 말에 몸을 돌려 다시 방장실로 향했다. 법정이 사라지자 둘은 폭포 쪽으로 가서 담소를 나눴다. 아니, 담소라기보단 승원대사가 술법을 펼치고 화영이 그걸 지켜보는, 스승이 제자의 연무를 지켜보는 듯한 구도였지만.
“수환술(水幻術)!”
츠츠츠츠.
승원대사의 두 손이 수면에 닿자 시야를 흐리는 짙은 안개가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인위적인 안개를 만들어 적으로부터 나를 숨기는 술법을 펼친 것이다.
“와아, 정말 한 치 앞도 안 보이네. 그런데 범위가 너무 좁은 거 아닌가요?”
“안개의 짙음과 범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소모하는 내공에 비해 효율이 제법 좋습니다. 정파인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기습을 할 때나 적이 진법 앞에 있을 때 사용하면 좋지요.”
그가 참여한 정사대전은 벌써 30년 전 일이지만 그때 행했던 기습 등의 일이 부끄럽기는 아직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안개가 모습을 가려 주고 있지만 그의 얼굴은 부끄러움에 붉어져 있었다.
“음, 이렇게 하는 건가?”
잠시 수환술을 구경하던 화영은 그가 술법을 펼칠 때 사용하던 기운을 느끼며 대충의 방법을 터득하고 자신이 직접 시도해 보기에 이르렀다.
왼손에는 불의 정령 살라만다의 힘을, 오른손에는 물의 정령 운디네의 힘을 소환한 화영은 천천히 두 힘을 부딪치면서 수증기의 양을 늘려 갔다.
“앗차!”
화르르륵!
잘되는가 싶더니 힘의 제어에 실패했다. 왼손에서 강하게 뿜어진 불꽃은 순식간에 오른손을 집어삼켰고, 감싸고 있던 물의 기운 덕에 손이 타는 것은 막았지만 아찔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후유! 그냥 둘을 소환할 걸 그랬나?’
살라만다와 운디네를 직접 소환해서 둘에게 각각 명령을 내렸다면 무리 없이 성공시킬 수 있었을 테지만 그 힘만을 끌어왔기에 이런 위험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마음을 둘로 나누지 못하는 이상, 두 가지 힘을 동시에 끌어다 쓰면서 힘의 균형까지 정밀하게 조절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어찌 보면 예고된 사고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화영과는 달리, 그 광경에 놀란 사람이 있었다.
“헉!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불과 물을 동시에 만들어 내서 조종하다니……. 게다가 염화장처럼 구의 형태로 쏘아 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뻗어 나가? 과연, 대단해!”
술법이란 게 본디 수룡타처럼 직접 물리력을 지닌 것보다 일시적으로 기감을 높이고, 상대의 눈과 정신을 현혹시키는 종류가 많은 만큼 승원대사의 놀라움은 크기만 했다.
“더구나 저렇게나 미미한 내공의 소모라니……!”
술법을 펼치는 동안은 기감이 극도로 높아지는 터라 승원대사는 술법의 범위 안에 들어 있는 화영의 상태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정확히는 화영의 손에서 뿜어진 기, 아니 마나를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가 느낀 마나의 양은 그나 다른 고수들에게 있어서 아주 극미한 량. 더불어 다시 찾기 어려울 정도로 정순한 힘이기도 했지만 그런 건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헤헤, 쉽지 않네요.”
손이 타 버릴 뻔한 게 무안했던지 뒷머리를 긁적이는 화영이었지만 승원대사의 눈에는 무한한 존경의 빛이 담겨 돌아왔다.
“아닙니다. 충분히 훌륭합니다!”
“헤에, 다른 술법은 뭐가 있나요?”
“기감을 높여 주는 술법과 반대로 기척을 지워 주는 술법, 그리고…….”
화영의 능력에 반해 버린 승원대사의 설명은 시범과 함께 한참 동안이나 이어졌다. 얘기를 모두 듣고 술법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화영. 그것은 아빠를 통해 일부 전해 들은 몇 가지 보조 마법 및 기타 생활 마법과 흡사했다.
‘일루젼과 비슷한 환술이란 게 마법으로 따지면 제일 높은 써클의 기술인가? 술법이란 거, 방식이 너무 달라서 사용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응용은 가능하겠다.’
아는 마법이라곤 극히 적은 화영이었지만 몇 가지 기술은 정령들만을 이용해도 충분히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로운 정령술을 익힐 생각에 잔뜩 신이 난 화영은 승원대사와 얘기하는 내내 히죽거리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덕분에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저도요.”
둘의 만남은 화영에겐 새로운 정령술에 대한 생각을, 승원대사에겐 쟁취할 목표를 남기고 끝이 났다.
그런데 승원대사가 앞장서서 방장실로 돌아가려는 순간, 숲의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와하하하하하! 이 아이는 내가 잠시 빌려 가마, 승원!’
“육합전성? 그리고 이 목소린……. 무오 사숙?!”
사방에서 소리가 울리게 만들어 시전자의 위치를 숨겨 주는 육합전성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소림 신승이라 불리는 무오선사. 세속에 관여하지 않고 산속 깊은 곳에서 무공만 닦던 그이기에 승원대사의 놀라움은 매우 컸다.
“허허, 그새 더 대단해지셨구나.”
고개를 돌리는 그 짧은 사이에 화영을 낚아채 사라지는 무오선사의 모습에 승원대사는 진정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화영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세인들에게 천하제일을 논하라면 언제나 빠지지 않는 무오선사였지만 자연동화경에 이른 화영에게는 해를 끼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물론, 사실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무오선사가 화영을 해칠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긴 했지만.
“이 정도면 적당하겠군.”
“할아버진 누구세요?”
“나? 난 무오라고 하는 땡중이란다.”
한적한 공터에 도착한 무오는 화영을 의자로 쓸 수 있을 만한 나무 밑동에 내려놓았다.
여타의 무림인들과 전혀 다르게 자신을 진짜 아이 취급하는 무오에게 화영은 되려 신기함과 편안함을 함께 느꼈다. 어린아이를 아이 취급해 주지 않는 것도 아이의 입장에선 꽤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것이었으리라.
“저는 화영이에요. 그런데 저를 왜 여기로 데려오신 거예요?”
“호오, 갑자기 데리고 왔는데 내가 무섭지 않느냐?”
“좀 전에 승원이라는 할아버지랑 잘 아는 듯이 말하셨잖아요.”
“뭣이? 그래, 그랬군. 역시 재미있는 재주를 가졌어. 하하하!”
놀라는 것도 잠시, 무오는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화영의 능력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무오선사가 승원대사에게 사용한 것은 전음. 그것도 육합전성이라는 고도의 수법이었다. 그런데도 엿들었다는 것은 충분히 놀라다 못해 기겁을 할 만한 일이었지만 무오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화영은 그런 무오가 무척 신기했다.
“할아버지는 놀라지 않네요?”
“소리란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것. 바람을 다루는 자가 늙은이들의 얘기를 조금 엿들었다는데 놀랄 게 무에 있겠느냐? 하하하하!”
무오는 화영에 대해, 정령에 대해 아는 듯이 말했다. 이렇게 되니 놀라는 건 오히려 화영. 정령에 대해 아는 사람은 이제 자기 혼자뿐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놀라움은 더욱 컸다.
“할아버지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떠보려고 한 말일 수도 있었다.
때문에 아마 조금이라도 강호 경험이 있거나 영악한 자라면 일단 부정하며 눈치를 살폈겠지만 화영은 순진하게도 그냥 인정해 버렸다. 그 모습에 무오선사는 한 번 더 껄껄껄 웃었다.
“참으로 순진한 아이구나. 내가 떠보려고 한 말일 수도 있는데 의심해 보지 않는 게냐?”
“에? 그럼 거짓말이었어요?”
“하하하하! 아니다, 아니야! 내가 죽을 때가 다된 땡중이라지만 말을 허투루 하진 않는단다. 그래, 그건 실라이론이라는 존재더냐?”
“실라이론? 바람의…… 상급 정령?”
무오선사의 입에서 나온 어색하지만 익숙한 단어에 화영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이 세상에서 정령의 이름을 아는 건 둘뿐, 아니 이젠 자기 혼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웬 노인의 입에서 정령의, 그것도 상급 정령의 이름이 나왔으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