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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18화)
6 장 소림사(3)


“하, 할아버지가 그걸 어떻게?”
“흘흘! 예전에 그와 같은 힘을 가진 남자와 겨루어 본 적이 있지. 샐 뭐라고 하는 존재도 있었는데 정확한 이름은 잊어버렸구나.”
“샐라임!”
화영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불의 상급 정령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되는 상급 정령의 이름을 알고 있다니, 그리고 그들을 다루는 남자와 겨루어 봤다니 유추할 수 있는 상황은 하나였다.
‘아빠!’
세상에 나와서 처음으로 아빠에 대해 아는 사람을 만났다. 심장이 숨 가쁘게 뛰고 앞뒤 전후사정을 따질 정신은 이미 우화등선한 지 오래였다.
그 놀람은, 그 기쁨은 눈앞의 상대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따위의 것을 머릿속에서 송두리째 뽑아냈다.
“어떻게 됐어요?”
“뭐가 말이냐?”
“아빠와 겨루어 봤다면서요. 누가 이긴 거예요?”
눈앞의 노인이 얼마나 강한 힘을 지녔는지, 무림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따위는 몰랐지만 화영은 확인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강함을, 아버지가 남겨 준 정령술의 강함을!
“적어도, 내가 살아 있지 않느냐? 흘흘흘.”
“아……?”
무오선사가 이겼다는 의미로 해석하려던 화영의 머릿속에 물음표 하나가 떠올랐다. 죽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 또한 살지 않았는가? 적어도 이 노인과의 싸움에서는.
혼자 생각하느라 인상을 찡그렸다 폈다 하는 화영의 모습에 무오선사가 한번 씨익 웃고는 답을 내려 줬다.
“무승부였다. 나도 그를 해하지 못했고 그 역시 나를 해하지 못했지. 승부를 내고자 했으면 결판이 났겠지만 어디까지나 비무였고 주변의 피해를 생각해서 끝을 보지는 않았다. 물론 비무가 끝났을 때 주변에 성한 곳이 없긴 했다만. 흘흘흘!”
묘한 웃음과 함께 들려온 승부의 결과는 화영을 조금은 안심시켰다. 적어도 지지는 않았으니까. 상급 정령을 다루게 되면 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게 됐으니까.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화영은 이번엔 노인과 아버지의 강함의 정도가 알고 싶어졌다.
“그럼 아빠는 강했던 건가요?”
“강했다. 분명히! 그의 능력이 가진 특이성이란 게 확실히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긴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무림에서 맞상대로 그를 해할 수 있는 자는 없다고 봐도 좋다. 아니, 설령 집단이라 해도 그가 피하려고 마음먹으면 잡을 수 없을 테지. 그가 무림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기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무림에 나섰다면 큰 파란이 일었을 게다.”
무오선사의 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것은 쥬논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했다.
“역시…….”
무오선사의 말을 증명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정령의 이름을 안다는 것 하나만으로 화영은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다.
뿌듯한, 그리고 자랑스런 얼굴을 하는 화영을 지켜보던 무오선사가 갑자기 뭔가 이상함을 느낀 듯, 화영에게 물었다.
“한데 정말 실라이론이 맞는 게냐? 내포한 힘이나 존재감은 그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은데.”
‘흥, 여전히 시끄러운 영감이군.’
어느새 화영의 어깨 위로 날아온 실프가 무오선사를 아는 듯 으르렁댔다.
그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화영.
그러나 이내 생각을 접고 무오선사에게 실프를 설명했다.
“얘는 실라이론이 아니라 실프예요. 아직 제 능력이 한참 모자라서 실라이론을 불러내지 못하거든요.”
“그렇지. 그 나이에 벌써 그런 존재를 불러낸다면 너무 불공평하겠지. 아니, 그 정도의 기운을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공평한 건가? 하하하!”
잠시 기운을 퍼트려 화영의 마나를 가늠해 본 무오선사는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화영이 가진 마나는 거의 포화 상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수준. 아직 포화 상태에 이르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 정도면 갓 일류고수에 올랐다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물론 마나와 기가 다르고 정령술과 무공이 다르기 때문에 화영이 일류고수를 상대하기엔 큰 무리가 있었지만.
“호오, 단계가 있었던가? 그런데 자연동화경이란 건 무슨 소리더냐? 약아빠진 백연이란 놈이 내건 조건엔 자연동화경의 고수라고 적혀 있었거늘. 혹시 무림을 상대로 사기라도 치고 있는 게냐?”
“사기라뇨, 그럴 리가요. 전 그냥…….”
아주 짤막한, 그간의 일들의 설명이 있었다.
설명하면서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화영과 달리, 단박에 사건의 핵심을 찾아낸 무오선사. 산이 떠나가도록 힘차게 웃은 뒤에 아픈 배를 부여잡고 입을 열었다.
“눈먼 정파인들이 제멋대로 해석한 게로구나. 재미있군, 아주 재밌어. 끌끌끌!”
“제가 뭘 잘못한 건가요?”
“아니다. 잘못한 것 따위가 있을 리 없지. 끌끌!”
멀뚱멀뚱 쳐다보는 화영을 앞에 두고 무오는 한참 동안이나 배를 잡고 웃었다.
“내 비록 오늘 자연동화경의 고수는 만나지 못했지만 더 재미있는 경험을 했구나. 큭큭! 그가 아버지라고 했던가? 그래, 그는 어찌 지내는고?”
무오선사의 물음에 화영은 갑자기 풀이 죽었다. 급변하는 분위기, 떨리는 눈동자. 무오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아, 어린아이가 아비 없이 홀로 있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무오야, 무오야. 넌 아직도 공부가 부족하구나!’
“아빠는…… 자연으로 돌아가셨어요.”
“괜한 말을 해서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아빠가 정령술사는 죽어서 정령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아빠도 분명히 정령으로 변해서, 이 세상 어딘가에서 절 지켜보고 계실 거예요. 그래서 전 더 열심히 정령술을 익혀야 해요. 아빠와 약속한 정령술의 극을 이루기 위해서.”
“그래. 너라면 할 수 있을 게다.”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었다.
그가 보고 느낀 화영은 강했다.
그게 심적이든 물리적이든. 화영은 순수하고 강한 아이였다. 때문에 위선으로 얼룩진 정파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을까 걱정되긴 했지만 무오는 화영과 함께하는 존재들이 그를 지켜 주리라 믿었다.
“그리고 혹시나 누가 너에게 해코지하려고 하면 이걸 보여 주거라. 그럼 널 함부로 대하지 못할 테니.”
그래도 걱정됐는지 무오선사는 화영에게 작은 목패 하나를 화영에게 쥐어 줬다. 그것은 소림 신승의 신물로, 이것이 있는 한 누군가 소림과 척을 지려 하지 않는 이상 화영에게 감히 해코지하려 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것을 알 턱이 없는 화영은 아무렇게나 목패를 품 안에 찔러 넣었다.
‘저 망할 영감탱이도 도움은 되는군.’
목패의 의미를 알고 그러는 것인지 대충 짐작만 한 것인지 혼자 툴툴대는 실프였지만 화영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화영은 아직 실프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으니까.
무오가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사태가 일단락되자 둘은 친할아버지와 손자처럼 다정한 모습으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방장실로 향했다.
방장실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충분히 말할 기회는 있었으나 무오선사는 화영에게 무림인들의 오해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다.
화영이 걱정되기는 했으나 그도 궁금한 것이다. 과연 그들이 어디까지 오해를 하고 언제까지 눈이 멀어 있을지가.
들어 보니 황 객주와 한 약속 중에 화영을 다치게 하지 않겠다는 조항이 있었고 자신이 준 목패도 있으니 안전은 확보되었다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아, 화영님이다!”
미처 방장실에 가기도 전, 지객당 앞을 지날 때 초조하게 기다리던 무림인들이 화영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그 옆에 웬 노인이……. 무오선사?”
“무오선사라면 소림 신승?”
본디 대대로 소림 신승의 정체는 베일에 가려져 있었지만 무오선사는 30년 전의 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었기에 알아보는 자가 많았다. 순식간에 웅성거림이 일대를 뒤덮었지만 무오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화영과 함께 걸어왔다.
“옜다. 약속한 비급이다. 중이라는 놈이 이따위 상술이나 부리다니, 에라이 땡중아!”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겠는가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죄를 제가 짊어질 수밖에요. 아무튼 잘 쓰겠습니다, 사숙조님.”
백연대사는 무오의 핀잔에도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어차피 크게 악의 없는 말이고 자신이 무오에게 상술을 발휘한 건 맞는 말이었으니까. 자연동화경의 고수와 만나게 해 주는 대신 새로운 무공 비급을 건네받는 걸로.
아무렇게나 던져 준 비급이었지만 건넨 자가 신승이라 불리는 무오선사임을 감안할 때 상승의, 혹은 초상승의 무공이 담긴 것일 게 분명했다. 때문에 얻을 수는 없겠지만 한번 훑어보기라도 할 수 있을까, 막연한 기대감이 담긴 무림인들의 시선이 그리로 집중됐다.
“그래. 난 극락에 갈 테니 네놈은 그 좋아하는 지옥에 가서 불구덩이 목욕이나 실컷 해라!”
웃어넘기는 모습이 못마땅한지 무오는 다시 한 번 핀잔을 주고 화영과 함께 지객당의 전각 하나로 들어가 버렸다.
말리고 싶지만 화영과 비급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무림인들. 그러나 상대가 신승이라 불리는 무오선사임을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가능성 있는 비급 쪽으로 눈을 돌렸다.
물론, 가능성이 조금은 더 크다는 뜻일 뿐 비급을 볼 수 있다는 확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비급은 어디까지나 소림의 것이니까. 그저 비급을 토대로 연공하는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보면 족했다.

“한데 너는 어째서 무공을 익히지 않는 게냐? 네 아버지도 약간의 무공은 익혔거늘. 무공에는 때가 있어서 한번 놓치면 상승의 경지에 들기 어려우니 익히겠다고만 하면 내가 도와주마.”
“저기, 익히긴 익혔는데요.”
“뭣이? 어디!”
무공을 익혔다면 불룩 튀어나왔어야 할 태양혈도 밋밋하고 자신이 감지한 바로도 특별한 내공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무공을 배웠다 하니 무오가 놀라서 화영의 손목을 잡아챘다.
화영을 오해하고 있는 정파인들을 바보 같다 여기던 자신마저 ‘설마 노화순청의 경지인가?’ 하는 착각을 하면서.
그러나,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허어, 전신을 감싸고 있는 기운에 가려 단전의 기가 느껴지지 않았구나. 두 기가 다르면서도 흡사하여 더욱 단전의 기운을 가려내기 힘들군!”
단전의 기가 워낙 미약했고, 그 위를 마나가 감싸듯이 흐르고 있어서 공간을 장악하는 정도로는 구분해 내기 어려웠던 것이다. 어쨌든 화영의 상태를 알아냈지만 너무도 미약한 마나에 무오는 인상을 찌푸렸다.
“상단전도 아니고, 중단전도 아닌데 단전보다 훨씬 많은 양의 기가 모였다라? 재미있군! 하지만 이걸로 무공을 펼치긴 무리겠어.”
무공을 펼칠 때 내공은 혈도를 따라 움직이고, 갈무리된다. 그런데 화영의 마나가 응집된 곳은 심장. 기운을 끌어다 쓰려 해도 도저히 쓸 수 없는 위치인 것이다. 때문에 무공을 펼치기 위해선 이 쥐 눈물만큼 작은 하단전을 키우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건 어찌할 수 있어도 내공만큼은 별다른 도리가 없는지라 무오선사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음? 그런데 이 내공은 소림의 여타 심법보다도 정순하군?”
잠시 화영의 몸속에 내공을 흘려보내던 무오선사가 무언갈 느끼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 삼재심법인가? 이 정도면 축기를 시작한 지 한 6개월 정도 됐겠어.”
무오선사는 화영에게 자신이 새로 창안한 심법을 익히게 할 생각을 했다. 다른 심법을 잘못 익혔다간 꼼짝없이 소림의 제자가 되어야 할 테니 아무도 알지 못해서 뒤탈도 없을 새로운 심법을 전수할 생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은 화영의 다음 말에 멈춰야 했다.
“아니요. 이제 한 달 반 정도 됐는걸요? 심법의 이름은 그냥 삼재심법이 아니라 속성삼재심법이구요. 아빠가 알려 주신 건데 다른 심법은 익히지 말고 이것만 익히랬어요.”
“흠! 그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을 터, 함부로 나설 수가 없겠군. 삼재심법이라면 진기 유도도 필요 없을 테니 내가 도울 일이 없겠어.”
한 번 겨루어 봤던 만큼 무오선사는 쥬논을 인정하고 있었다. 때문에 화영에게 그런 말을 한 것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강요치 않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수련 속도가 빨라지도록 진기 유도라도 해 줄까 했는데 삼재심법이라니, 이런 낭패가 또 없었다.
일반 심법과 달리 삼재심법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 그것은 고수의 진기 유도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명문이라 하는 문파에서 심법을 수련시킬 때, 일정한 수준에 오르면 고수가 붙어서 정해진 길을 따라 진기 유도를 해 준다. 하지만 삼재심법은 익힌 사람에 맞는 길을 진기가 스스로 찾아가기 때문에 고수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이다.
주화입마의 걱정도, 고수의 도움도 필요 없는 이 신묘한 능력은 가히 신공이라 불러 마땅하나 지독히도 느린 축기 속도가 삼재심법을 삼류 이하의 쓰레기 심법으로 떨어뜨렸다.
“속성삼재심법이라니깐요!”
“그래, 속성삼재심법.”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화영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린 무오는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그러나 도울 수 없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영약이 있다면 뭔가 달라지련만.”
“영약이 뭔지는 몰라도 힘세지는 약은 있는데.”
“힘세지는 약?”
“네. 떠나기 전에 할아버지가 속 안 좋을 때 먹는 약이랑 같이 주셨어요. 속 안 좋을 때 먹는 약은 세 개 중에 벌써 두 개나 먹었지만 멀미도 사라지고 마나, 아니 기도 더 많이 모이는 것 같은 게 효과 좋던데요?”
“됐다. 그런 약은……. 뭐? 기가 더 많이 모인다고?”
화영이 말하는 것을 작은 약방에서 파는 보약 정도로 생각하고 손을 내젓던 무오선사는 기가 많이 모인다는 부분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관심을 보였다.
“네. 여기가 아니라 여기에 모으는 거였지만요.”
화영은 설명을 위해 손을 들어 단전과 심장을 손가락으로 한 번씩 콕콕 찍었다. 그제야 뭔가 낌새를 알아차린 무오선사. 급히 화영에게 그 약을 가져와 볼 것을 부탁했다. 목함은 화영이 항상 가지고 다니는 보따리 안에 있었지만 무림인들이 고이 보관하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찾아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