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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19화)
6 장 소림사(4)
딸깍.
목함이 열리고, 크고 작은 환단 두 개가 얼굴을 디밀었다.
“으음, 역시!”
코끝을 자극하는 청량한 기운이 그의 생각을 확신으로 바꾸어 줬다. 태을신단과 소환단. 이 정도면 생각보다 거물이었다.
“태을신단과 소환단이라, 이거라면 삼재심법이라 해도 이십 년 내공은 거뜬하지!”
“속성삼재심법이라니깐요!”
끝까지 이름에 집착하는 화영이었다.
태을신단이 30년, 소환단이 10년 내공이니 도합 40년 내공을 얻을 수 있는 대단한 기연이었지만 아쉽게도 심법이 삼재심법이라 그 기운들을 모두 용해하기엔 무리였다. 기껏해야 반 정도나 흡수할까? 하지만 자신이 도우면 25년, 어쩌면 반 갑자의 내공까지도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아무튼 어느 쪽이든 화영에겐 엄청난 도움이 될 터였다. 적어도 간단한 무공과 보법, 신법은 무리 없이 펼칠 수 있게 될 테니까.
“내 비록 뛰어난 심법이나 무공은 가르쳐 주지 못하지만 이 영약들을 이용해서 네 내공은 최대한 끌어올려 주마!”
무공을 가르칠 수 없는 이유는 소림의 심법을 가르치지 못하는 이유와 같기도 했지만 소림 무공이 정순하고도 깊은 내공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공이 부족한 화영으로선 이 영약들을 복용한다 해도 몇 번 펼치지 못하고 기진맥진해질 정도로. 그래서인지 무오선사는 알 수 없는 사명감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안 돼요!”
“으잉? 왜 안 된다는 것이냐?”
“아직 가야 할 곳이 많이 남아서 멀미약은 남겨 둬야 한다고요!”
한창 혼자서 열을 올리던 무오선사는 기가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속 안 좋을 때 먹는 약이라고 말하는 것은 들었지만 세상에, 천하의 소환단을 멀미약으로 쓰겠다고 할 줄이야! 아니, 이미 두 개는 먹었다 하지 않았나?
자신이었기에 망정이지 백연대사가 들었다면 혈압 올라 쓰러졌을 것이라 생각하며 무오선사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건 걱정 말거라. 이 영약들을 모두 흡수하고 나면 멀미 따위와는 거리가 멀어질 테니.”
“그럼 좋아요.”
간신히 허락을 받아 낸 무오선사는 그 자리에 화영을 앉히고 자신 역시 화영의 등 뒤로 돌아가 앉았다.
“자, 이걸 먼저 삼키거라.”
“엑? 이렇게 큰 걸 한 번에요?”
두 번이나 먹어 본 소환단과 달리 자두만 한 크기의 태을신단인지라 화영은 입에 넣길 주저했다. 소환단이 입에 닿는 순간 녹았던 것을 떠올리면 무시할 수 있는 크기였으나 생각 없이 먹었던 탓에 미처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괜찮으니 일단 입에 넣어 보거라.”
“음, 알았어요.”
스르르.
역시나, 천하에 이름난 영약답게 태을신단은 침에 닿는 순간 녹아서 간단히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입 안 가득, 그리고 목을 타고 이어지는 청량함.
작은 기운들을 남기며 태을신단이 뱃속을 타고 움직이자 무오선사의 손도 덩달아 바빠졌다.
꾹. 꾹. 꾹.
단전으로 온전히 이끌어서 한 번에 전신으로 퍼트리거나 용해시켜 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으나 화영이 가진 내공이 아주 미약했기에 무오선사는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때가 되어 어느 혈도로 진기가 움직일지 모르긴 하지만 그 반경이란 게 그렇게 크지 않은 것이었고 어느 정도는 예측 가능했다. 그래서 진기의 이동통로로 이용될 거라 추정되는 혈도에 태을신단의 기운을 조금씩 나눠 놓는 것이다.
물론 예상이 빗나간 혈도에 남는 영약의 기운이 아깝긴 하지만 나중에 타혈법을 사용하면 어느 정도는 다시 내공으로 되돌릴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무오선사는 조금씩, 조금씩 기운을 분산시키며 태을신단을 단전으로 이끌었다.
“합!”
아직도 반 이상이나 남은 태을신단이 단전 부근에 이르자 앉은 채로 귀신같이 자리를 이동한 무오선사가 기합성을 토하며 손가락으로 화영의 단전을 찔렀다.
손가락 끝에 희미하게 일렁거리는 아지랑이.
죽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면 살검으로, 살리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면 활검으로 바뀌는 까마득한 경지의 의형검이었지만 신승이란 이름에 걸맞게, 무오선사는 큰 어려움 없이 펼쳐 냈다.
“크읍.”
고통에 의한 신음이 아니었다. 전신에 퍼지는, 넘쳐 나는 힘을 제어하기 위한 순간적인 움찔거림일 뿐이었다.
화영의 어깨가 들썩이자 무오선사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멈추지 말고 운기하거라. 느끼고 있겠지만 결코 너에게 해로운 기운이 아니다. 기꺼이 받아들이고 천천히 기를 돌리며 하단전의 기운과 일치시켜야……!”
말을 하던 무오선사는 자신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화영이 익힌 심법이 삼재심법이라는 것.
보통의 경우라면 심법에 정해진 혈도를 따라 진기를 돌리고, 그 진기에 영약의 기운을 실어 가며 천천히 융합시켜야 했겠지만 삼재심법에 진기를 움직이는 법 따윈 애초에 없었다. 그저 호흡법만 꾸준히 하다 보면 내공이 쌓이고, 진기가 저절로 움직일 뿐이다. 그러니 영약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 할 수 있었다.
“이런 낭패가…….”
삼재심법을 주로 익힌 사람은 처음이라 무오선사도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인 것이다.
하나 이미 손을 떠난 화살이라, 지켜보는 일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호?”
그러나 우려와는 다르게 화영의 내공은 영약의 기운들을 잘만 흡수해 갔다. 축기 속도만 빼면 절세 신공이라 불리는 삼재심법답게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빠른 속도로 태을신단의 기운을 포용하고 있다?”
혈도를 따라 끌고 가면서 서서히 융합해 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내공의 색으로 물들여 가는 것이 아닌 포용이었다. 자연의 기운과 흡사한, 거의 마나와 일치하는 삼재심법의 내공이 그에는 조금 못 미치지만 마찬가지로 자연의 기운과 닮은 태을신단의 기운을 포용해 나가는 것이다.
워낙 작은 기운이었기에 처음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거스르지 않고, 전혀 밀어내는 것 없이 그대로 포용해 나가는 것이다. 동화라고 보아도 좋았다.
1년 내공, 2년 내공…… 5년 내공에 해당하는 기운까지 내공이 커졌을 때 단전이 미약한 꿈틀거림을 보였다. 그리고 10년 내공에 이르렀을 때, 단전에 모여 있던 내공이 스스로 외유를 시작했다.
단전에서는 계속 태을신단의 기운을 포용해 나갔고, 움직인 기운은 도착한 혈도에서 기다리던 기운을 포용해 나가며 점차 기운을 불려 나갔다.
“하아.”
한참이나 세상을 잊고 호흡에 열중하던 화영이 탁기를 가득 머금은 숨을 토해 내며 눈을 떴다.
“어떠냐?”
“좋아요. 기분도 좋고, 몸에 힘도 생긴 것 같아요. 힘세지는 약이라더니 정말인데요?”
“힘세지는 약이라. 그래, 맞는 말이지. 얼마나 세졌는지 어디 한 번 보자.”
무오선사가 손목을 잡고, 기를 흘리자 화영의 몸이 움찔 떨렸다. 혈도를 따라 몸 안 곳곳을 돌아다니는 기. 아직 도달하지 못한 건지 피해 간 것인지 녹아들지 않은 기운도 더러 느껴졌다.
간질간질한 느낌에 화영이 몸을 배배 꼬자 무오선사는 기를 거두어들였다.
“이 정도면 이십 년 내공이 조금 안 되는구나. 하지만 아직 도달하지 않은 혈도가 있으니 삼십 년 내공까지도 충분히 바라볼 수 있겠다. 기운이 몸 전체를 한 바퀴 돌고 제자리로 돌아온 게 아니지?”
“네. 숨 쉬다가 힘들어서 그만뒀거든요. 그래서 뭔가 움직이던 것이 왔던 길로 되돌아왔어요.”
아직 운기가 익숙하지 않은 화영이었기에 한 번에 끝을 보지 못한 것이다. 아마 그러면서 세맥으로 흩어져 버린 기운도 적지는 않을 터였다. 다른 자들이라면 힘들어도 절대 멈추지 않았을 테고, 멈췄다면 땅을 치고 후회했을 테지만 내공에 큰 욕심이 없는 화영은 담담하기만 했다.
“이제 삼재심법이 익숙해지고, 또 자주 수련하다 보면 도달하지 못한 나머지 혈도에 쌓인 기운도 흡수할 수 있을 게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거라.”
“속성삼재심법이라니깐요!”
“그래, 알았다. 속성삼재심법. 끄응!”
이름과 원수라도 졌는지 끝까지 이름에 집착하는 화영을 보며 식은땀을 흘리는 무오선사였다.
화영으로선 아빠가 남긴 것 하나하나가 소중해서 그러는 것이었지만 본인이 말도 안 해 주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란 아주 요원한 일이다.
화영의 소림사 방문은 내내 지객당의 어느 방에서 무오선사와 함께 이루어졌다. 무오에게 비급을 건네받은 소림은 딱히 화영을 귀찮게 하지 않았고, 다른 무림인들도 신승이라 불리는 무오선사가 곁에 있으니 쉽게 접근하지 못한 채 눈치만 살폈다.
그렇게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나고, 화영이 다음 장소로 떠나야 할 시간이 돌아왔다.
“비급은…….”
“이걸로 정했어요.”
마차에 오르기 전, 화영이 들어 보인 비급은 무공서가 아니었다. 금강반야경,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도 불리는 금강경 한 권이었다. 굳이 소림사에서가 아니라도 마을의 서점에 가면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책인지라 무림인들은 눈이 화등잔만 해져서 화영을 쳐다봤다.
“그걸…… 말입니까?”
“네. 왜요?”
“그건 비급이 아니지 않습…….”
“절에서 불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더냐? 쯧쯧!”
갑자기 끼어들어 핀잔을 주는 무오선사에게 백연대사는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괜찮죠? 그리고 대신에 이건 가지고 가고 싶은데…….”
“그러시지요.”
결국 화영은 보따리에 금강경을 챙겨 넣었다.
사실 이것은 정순하고 깊은 내공을 필요로 하는 소림 무공의 특징 때문에 쓰지도 못할 무공보다는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무오선사의 조언이 있어서 일어난 일이나, 백연대사로선 무공의 종주라는 소림이 무시당하는 것 같아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자, 그럼 이만 출발합시다!”
일단은 절인지라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던 무림인들은 신속하게 짐을 꾸렸다. 그리고 떠나기 전, 비웃음을 연상케 하는 묘한 웃음을 백연대사에게 지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후에 들려온 소문에 의하면 이들이 다녀간 다음, 백연대사가 큰 내상으로 한동안 앓아누웠다고 한다.
7 장 무당파(1)
소림사 다음의, 총 네 번째가 되는 목적지는 호북성 균현의 무당산. 정확히는 무당파였다. 역시나 보름가량 걸리는 거리였고, 그 먼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화영은 마차 안에서 착실히 배운 바를 정리해 나갔다.
일단 소림에서 받아 온 금강경을 이미 세 번이나 정독했다. 학식이 부족하고, 세상을 살아온 경험 또한 부족해서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부분부분의 이해는 대충이나마 가능했다. 물론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훨씬 많았지만.
그리고 오행권의 수련. 입문자용 무공이나 다름없는 오행권은 조금씩이나마 화영에게 무공을 익히는 요령과 자세 등을 일깨워 줬다. 마차 안에서 무공을 연습할 수 있을 만큼 화영이 작은 덕도 있지만 오행권이란 자체가 따로 보법을 두지 않을 만큼 간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내공 수련. 이젠 제법 익숙해진 가부좌와 호흡법은 상당히 긴 시간 동안의 수련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래 봐야 어릴 때부터 꾸준히 수련해 온 대문파의 제자들에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꾸준한 수련을 통해 완전히 녹아든 태을신단의 기운과 한 알 남았던 소환단을 바탕으로 화영은 소림사를 떠난 지 열흘 만에 소주천을 이루었다. 기를 자유로이 운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때가, 화영의 내공이 반 갑자에 이르는 상황이었다.
“일류고수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최소한 일 갑자의 내공이 있어야 한댔지?”
한 차례의 운기를 마치고 난 화영이 다소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자신의 내공은 반 갑자에서 더 불어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삼재심법이 원체 극악한 축기 속도를 보이는 것이고 한 번에 너무 많은 내공을 쌓다 보니 이 정도론 성에 안 차기에 그리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영은 다른 심법으로 바꾸어 익힐 마음은 없었다. 때문에 삼재심법이라면 도중에 다른 심법으로 바꾸어 익혀도 탈이 없음에도 각 문파에서 얻을 비급 목록엔 심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겨우 삼십이 년 내공을 가지고…… 천수학관에 들어갈 수 있을까?”
천수학관의 최소 입학 연령은 십오 세. 현재 화영의 나이가 십삼 세이니 이 년 후에나 입관 시험을 볼 수 있을 터였다. 때문에 화영은 삼십 년 내공이 아니라 삼십이 년 내공을 말했다.
“그녀는 약 사십 년 내공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지.”
화영보다 두 살 연상인 남궁성아는 이제 막 천수학관에 입학한 상태였다. 그녀가 가진 내공은 약 사십 년 정도. 또래 중 가장 강하다는 모용업이 오십 년 내공을 가졌다지만 그녀 또한 결코 약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강한 편에 속했다. 남궁세가의 심법이 그리 녹록치 않았기도 했지만 어렸을 때 몇 가지 영약을 복용한 덕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의 얘기일 뿐, 각 대문파에서 보낸 제자들의 수준은 거의 엇비슷했다.
중위, 하위의 실력을 지닌 자들은 추천 입학이나 시험을 보고 들어온 자들이었다. 그들의 내공은 대개 화영과 엇비슷하거나 조금 모자란 정도.
하지만 대문파의 후기지수들과 주로 어울리는 그녀가 그런 것까지 얘기할 리는 없었고, 화영은 천수학관에 입학하려면 그녀 정도의 내공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었다.
물론 내공이 모든 걸 결정짓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 정령술도 이용하면 어떻게든 될 거야.”
덜컹.
화영이 다시 한 번 결의를 다질 때, 마차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안으로 들어왔다.
“화영님, 무당산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올라가야하니 내리시죠.”
“네.”
아무 생각 없이 마차를 내려온 화영은 곧 끝이 안 보이는 계단에 입을 쩍 벌리고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여, 여길 올라가야 한다고요?”
“물론입니다.”
“아, 안 가면 안 될까요? 아니면 내일 간다거나…….”
“흐흐, 안타깝게도 이곳은 마을과 꽤 거리가 있습니다. 올라가시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사악한 웃음을 짓는 무당파 전대 고수 춘양진인이었다.
“난 죽었다.”
하늘이 노래짐을 느끼며 작게 내뱉은 화영의 마지막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