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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21화)
7 장 무당파(3)
“수환술!”
합장하듯 손을 모으자 화영을 중심으로 방 안 가득 짙은 안개가 퍼져 나갔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가 습한 기운을 풍기며 방 안을 가득 메우자 모았던 화영의 두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양손에 모인 기운을 흩어버린 화영은 뭐가 그리도 기쁜지 앞이 보이지도 않는 방 안을 폴짝폴짝 뛰며 돌아다녔다.
꽝!
“아야야야!”
기어이 어디 한 곳에 부딪히고 마는 화영이었다. 의자쯤에 부딪힌 건지 정강이를 부여잡고 주저앉는 화영이었으나 입가에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헤헤, 이젠 없애야지. 파이어!”
제법 아픔이 가시고 난 후, 두 손을 높게 들고 외치자 화영의 양 손바닥에서 주먹만 한 불꽃이 피어났다. 그리곤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안개를 서서히 거두어 갔다.
안개라는 것이 수증기로 만들어진 것이라 불에 약한 것이다.
“역시 양의심공과 정령술은 잘 맞아!”
무당파 비전인 양의심공. 이것은 분심법의 일종으로 마음을 둘로 나눌 수 있는 공부였다. 신공도, 심법도 아닌 심공으로 불리는 만큼 그 자체로 위력을 발휘하거나 내공을 모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무공과 합쳐지면 결코 적지 않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쌍검술이나 권법같이 두 손을 동시에, 기까지 운용해 가며 움직여야 하는 무공과 합쳐지면 내공의 강약을 미세하게 조정하여 변화무쌍한 공격을 펼칠 수 있고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나 급한 일이 생겼을 때 한 번에 여러 가지를 따져 보고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냥 무공에만 결합되어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 양의심공이 화영에게 들어가자 더욱더 효용이 많아졌다.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생각할 수 있는 양의심공이 정령술과 무공, 양쪽에 결합된 것이다.
무공 쪽은 아직 공부가 얕아 접목시킬 순 없었지만 정령술 쪽은 달랐다. 그동안 시간이 짧더라도 차례차례 정령들에게 명령을 내려서 움직였지만 이젠 동시에 두 정령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정령술의 속도 향상뿐 아니라 정령 간의 연계기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다. 아직 이렇다 할 연계기는 없었지만.
그리고 방금 보여 준 수환술. 전에는 시도하다가 손을 태워 먹을 뻔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완전하진 않지만 마음을 둘로 나눌 수 있게 된 지금은 불의 힘과 물의 힘을 양손에 적절히, 그리고 미세하게 조정하여 어렵지 않게 펼쳐 낼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아니 이 두 가지 중 하나만으로도 화영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화영은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후에 무공이 강해진다면 더 엄청난 능력이 될 게 자명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내공 대결을 할 때 정령이 끼어든다면? 미세한 충격 하나만으로도 생사가 갈리는 내공 대결에서 실프나 노움 등이 방해를 한다면? 누가 승리하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다만, 내공 대결에 들어가려면 적어도 양쪽 다 일 갑자 이상의 내공이 있어야 하는데 화영의 속성삼재심법이 그 정도로 내공을 키워 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태극권과 십단금, 제운종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어디까지나 내 목표는 정령술의 극을 이루는 거니까!”
마지막까지 남았던 후보 중 나머지 셋을 생각하면 아쉽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이쪽이 더 유리했기에 크게 후회하진 않았다.
“그런데 무당파의 태극권은 정말 뭔가 다른 걸까?”
태극권의 원조는 무당파였지만 지금에 와서 태극권은 저잣거리에서도 구할 수 있을 만큼 쉽게 구하고 익힐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마지막 후보에 남을 수 있던 것은 ‘예전엔 비전으로까지 불렸다는데 원조 태극권은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원조 태극권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았다.
“으음, 가기 전에 물어봐야겠다. 그리고 제운종은……. 뭐, 운룡대팔식이란 게 있으니까. 그럼 금나수는 어쩌지?”
화영은 생각했던 나머지 두 개의 대체용 무공을 떠올렸다. 제운종을 대신할 운룡대팔식. 곤륜파의 절기인 운룡대팔식은 오히려 제운종보다도 뛰어난 점이 많았기에 간단히 결론이 났고 문제는 십단금을 대신할 금나수였다.
“어디 보자, 이제 두세 번이면 도착할 사천당문에 삼양수라는 금나수법이 있다고? 그럼 그걸로 할까?”
잠시 보따리를 뒤적거려서 하오문이 작성한 책자를 찾은 화영은 곧 방문할 문파들을 중심으로 살피다가 사천당문의 삼양수라는 금나수를 발견했다.
사실 무당파의 십단금은 금나수 중에서도 최상위를 달리는 것이라 당문의 삼양수와는 상당한 수준 차이가 났지만 금나수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화영은 그런 걸 별로 따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금나수를 꼭 배워야 하는지 투덜댈 뿐이었다. 그저 종류별로 하나쯤은 익혀 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배우려는 것이다.
“어차피 당문에서 독을 배우긴 무리일 테니까.”
독과 암기로 유명한 사천당문이지만 한 달이란 시간은 독이나 암기, 어느 한쪽을 배우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화영은 알고 있었다. 남궁성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날밤 새 가며 공부했는데도 중급 기관진식밖에 익히지 못한 경험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걸 말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제법 유명하다는 편법(鞭法)을 배워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마침 잘된 걸지도 몰랐다.
이렇게 대체할 무공들을 찾아 놓고 보니 한결 아쉬움이 덜했다. 각 문파에서 얻을 비급 목록을 잠시 수정한 화영은 양의심공을 한 차례 더 읽고 방문을 나섰다.
양의심공을 얻은 지 정확히 25일이 되는 날이었다.
“이 산에서 제일 높은 곳이 어디예요?”
“자소봉입니다만, 왜 그러십니까?”
화영이 오랜만에 밥 때도 아닌데 방에서 나오자 반색하던 무림인들은 뜬금없는 질문에 눈을 껌벅거리면서도 친절히 답했다.
“나머지 닷새를 거기서 지내 보고 싶은데, 안 될까요?”
“안 될 건 없습니다만, 끄응!”
25일 동안 방에만 틀어박혀 있더니 이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머지 날을 보낸다 하니 소양진인으로선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화영의 뜻에 반할 수는 없는 법. 어쩔 수 없이 자소봉의 초옥을 내주어야 했다.
“그곳엔 머물 때 필요한 물건들이 거의 없으니 수발들 제자 한 명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알았어요.”
잠시 후, 어린 제자 중 발군의 실력을 자랑하며 장문인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건명이란 소년이 화영의 앞에 섰다.
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건만 아직 어린애 티를 벗지 못하고 얼굴에 귀여움이 남아 있는 화영과 달리, 건명은 건장한 청년 티가 물씬 풍기는 호남아였다.
그도 사부 등의 웃어른들에게 화영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는지라 화영을 대하는 태도가 깍듯했다.
건명이 화영을 데리고 자소봉을 향해 사라지자, 무림인들은 한데 모여 회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길지 않은 토론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화영은 한 곳에서 하나의 깨달음밖에 주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 유추해 낸 명제였다.
그들이 얼토당토않은 헛생각을 하는 동안 화영과 건명은 힘겹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화영의 체력이 약하지는 않았지만 높이가 높이인지라 십분지 일도 올라가지 못해서 주저앉고 말았다.
힘든 것은 항상 무공을 수련해 온 건명 또한 마찬가지. 신법을 쓰면 모르되, 순수한 육체적 힘으로만 올라가다 보니 그조차도 지쳐 버린 것이다.
때문에 건명은 신법을 쓰지 않으면서 힘들다고 헥헥 대는 화영이 원망스러웠지만 장문인의 당부를 생각하니 차마 표를 낼 수는 없었다.
건장한 어른들도 절대 경시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쉬어 가야 끝을 볼 수 있는 무당산인 것이다.
“저, 화영님.”
“네?”
한숨 돌리고 나서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는지 건명이 꾀를 내어 말했다.
“이대로는 날이 저물도록 도착하지 못할 것 같으니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요?”
“제가 화영님을 업고 올라가겠습니다. 물론 화영님이 일상생활에 무공을 이용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하면 저도 수련이 되고 또 시간도 단축시킬 수 있고…….”
“으음, 그렇게 하면 형이 너무 힘들잖아요?”
“아, 아닙니다! 중간에 잠깐씩 쉬면 괜찮습니다. 제발 그렇게 하게 해 주십시오.”
미안한 마음에 곤란한 표정을 짓자 건명이 도리어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발 업고 가게 해 달라고 빌기를 일 각여, 결국 화영도 승낙하고 말았다.
“자, 그럼 갑니다.”
휘리리릭.
화영을 업은 채 몸을 잔뜩 웅크린 그가 힘껏 도약하는 순간, 세상이 달라졌다. 잠시 시선 둘 시간도 없이 휙휙 지나가 버리는 사물들. 그리고 그런 흐릿한 사물조차도 볼 수 없게 만드는 바람의 압력. 온전히 열린 귀에는 오직 바람소리와 건명의 옷자락이 펄럭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게 제운종이라는 신법이라고?’
이렇게나 빠른 움직임은 본 적이 없었기에 화영은 가슴이 철렁함을 느꼈다. ‘곤륜파의 운룡대팔식도 이렇게 대단할까?’ 하는 생각과 ‘다른 문파의 신법은 얼마나 뛰어날까?’ 하는 의문도 똬리를 틀었고 이런 신법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싸울 때 정령술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복잡하게 엉켰다.
그러나, 지금의 화영으로선 답을 내지 못했다.
‘으음, 실프!’
파아앗.
익숙하지 않은 갑갑한 바람의 압력이 숨통을 조이자 화영은 정신감응을 이용해서 실프를 불렀다.
그에 화답하듯 화영과 건명의 주위로 바람의 막을 형성하며 나타나는 실프. 그에 따라 달리는 속도는 조금 빨라졌지만 피부를 때리며 지나가던 바람은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이, 이건 갑자기?’
혼자라면 모를까, 화영까지 업은 상태에서는 진기가 흐트러질까 봐 입을 열 수 없는 건명은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동요했다. 덕분에 진기가 조금 흐트러졌지만 화영의 놀라운 능력에 대해 일부 들었기에 금세 마음을 다잡고 다리에 힘을 더했다.
“제가 바람을 막았는데, 괜찮죠?”
작게 들려오는 화영의 목소리에 건명은 ‘역시나!’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소봉까지의 산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반나절 만에 무사히 올라올 수 있었다. 화영을 업느라 힘이 배는 든 건명이었지만 바람의 저항을 줄여 주고, 중간 중간에 길 쪽으로 삐져나온 나뭇가지들을 알아서 제거해 주는 바람의 막 덕분에 크게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영의 능력에 경탄의 빛을 보낼 뿐이다.
소양진인의 말과는 달리, 자소봉에는 생활에 필요한 몇 가지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자소봉에 도착하자 건명은 바로 음식 준비를 시작했고 곧 몇 가지 찬과 어설프게 구운 토끼 구이를 내왔다.
원래대로라면 다른 무림인들도 뒤늦게 쫓아 올라와야 했으나 소양진인이 막고 있었기에 자소봉에는 둘뿐이었다.
“와아, 근데 형은 안 먹어요?”
“형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토끼 구이에 반색한 화영이 젓가락이 한 짝뿐임을 알고 묻자 건명은 놀라서 머리를 조아렸다.
“흐음, 분명히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고개를 갸웃하는 화영이었지만 건명에겐 죽을 맛이었다.
‘끄응, 날 놀리시는 건가? 아니면 모습이 젊으니 어린아이 흉내를 내고 싶으신 것?’
반로환동을 뛰어넘는 상상도 못할 경지에 드신 분이라 진실된 연배를 알 수 없다는 말을 장문인에게 들었던지라 건명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반로환동이든 아니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것이 확실한데 형이라니, 대개 초극의 고수들은 괴이 신랄하고 변덕이 죽 끓듯 하니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목이 달아나도 할 말 없으리라.
“하…… 하……. 그럴 리가요. 저는 약관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건 나돈데?”
‘정말 날 놀리시려는 게구나’
화영도 자신이 어림을 주장하자 건명은 아찔함을 느꼈다. 일부러 시비를 걸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그러십니까? 그래도 전 지학의 나이밖에 되질 않았…….”
“지학? 열다섯 살? 그럼 형 맞네! 난 열세 살이야. 헤헤.”
건명이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을 빌려 나이를 밝히자 화영은 그야말로 쐐기를 박았다. 눈앞이 캄캄해진 건명. 대체 화영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할 때 화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헤헤, 형이라고 해도 되지?”
“그, 그건…….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우움, 그럼 형도 날 동생이라고 해야지. 동생한테 존댓말 쓰는 형이 어디 있어?”
“아, 아닙니다. 이게 편합니다.”
화영이 하겠다니 말릴 수도 없고, 어떻게든 넘기느라 알았다고는 했지만 건명으로선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혹여나 실수할까, 존댓말만은 끝까지 고집했다.
“음, 그럼 좋을 대로 불러. 사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할아버지들 틈에서 얼마나 심심했는데. 며칠 안 남았지만 우리 같이 재미있게 놀자.”
무림인들이 생각하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화영에게 힘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아직 어린애임에 틀림없었다.
더구나 갓난아기 때부터 세상과 거의 단절되다시피 지내 오다가 몇 년 전에야 비로소 세상과 교류를 시작했으니,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그 누구보다도 컸고 정신 연령도 또래보다 조금은 낮다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인간은 사회 속에서 성숙해 가는 존재라 할 수 있으니까.
때문에, 외로운 상황에서 나타난 비슷한 또래의 건명이 누구보다도 반가웠다.
“노, 놀아요?”
“응. 할 일이 있긴 하지만 밤에 하면 되니까 밝을 때는 같이 놀자!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응?”
“그, 그러죠.”
건명이 승낙하자 화영은 신이 나서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밥상을 물리고 나서 당장에라도 놀고 싶었으나 이미 어두워진 상태. 어쩔 수 없이 노는 건 포기하고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