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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22화)
7 장 무당파(4)


“노움.”
쿠구구구.
화영의 발밑으로 흙으로 된, 두더지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오랜만이군.’
“미안. 요즘 미처 너흴 소환해 줄 여유가 없었어. 헤헤.”
‘그래. 무슨 일이지?’
“아, 혹시 이 근처에 산의 기운이 밀집된 곳이 있는지 알아봐 줄래?”
‘음, 산이 커서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응!”
건명이 그릇을 씻으러 근처 계곡까지 내려간 동안 화영은 노움을 통해 산의 정기가 모이는 곳을 찾았다.
꼭 이 근처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보통은 산의 정상이나 중심이었다. 그러나 산의 중심에는 무당파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으니 설사 산의 정기가 모이는 곳이라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서 이곳까지 올라온 것이다.
한 식경쯤의 시간이 지나고, 땅바닥에 왼손으론 동그라미를, 오른손으론 세모를 동시에 그리며 양의심공을 연습하고 있는 화영의 앞으로 갈색 두더지 한 마리가 불쑥 솟아 나왔다.
‘찾았다.’
“어디야?”
‘여기서 북서쪽으로 이백 보가량 떨어진 곳. 표시해 놨으니 찾기 쉬울 거다. 누군가 오는군. 그럼 난 가마.’
“응! 고마워.”
노움이 사라지기 무섭게 멀리서 사람의 인기척이 났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물기 줄줄 흐르는 그릇들을 들고 멀뚱히 서 있는 건명. 화영이 씨익 웃어 보이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주방으로 몸을 날렸다.
“흐응, 이상한 형이야. 북서쪽으로 이백 보랬지? 하나, 둘, 셋…….”
소림사에서 무오선사가 혼자 껄껄 웃으며 하는 말을 듣긴 했지만 자연동화경이니 하는 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화영이었기에 건명의 행동이 이상하기만 했다.
물론 남궁세가에서도 실프를 통해 무림인들이 뭔가 자신에게 오해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다. 그러나 큰 의미를 두지 않았고, 정령술은 무적이니 실프의 말처럼 자신이 그들의 생각만큼 빨리 강해져 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경지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도 모른 채.
그 경지를 모르기에, 그리고 무림인들에게 자연동화경이란 경지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도 모르기에 화영은 건명의 모습을 이상하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개를 한번 갸웃거린 화영은 노움이 말했던 방향으로 몸을 틀고 한 보 한 보 세어 가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뭐 하시는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예순여섯……. 응? 아앗, 까먹었다!”
그릇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온 건명의 물음에 세고 있던 숫자를 깜박 잊어버린 화영이었다. 울상이 된 얼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떼려는 순간, 구세주 같은 건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순여섯까지 세셨습니다.”
“아? 맞다!”
“한데, 뭐 하시는 건지……?”
“잠깐만. 좀만 더 세면 되니까 다 세고 말해 줄게, 형.”
건명의 입을 막은 화영은 또박또박 걸음을 세며 나머지 숫자를 채워 갔다. 그리고 이백 보가 다 채워졌을 때,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노움 바보! 진작 이렇게 해 놨다고 말해 주면 좋았잖아!”
이백 보가량 떨어진 곳에는 노움이 반듯하게 닦아 놓은 작은 단이 있었다.
사실 노움이 표시를 해 놨다고 했으니 방향만 잡고 걸어갔으면 됐으나 화영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투정을 부리는 것이다.
“이건?”
자소봉이라면 건명도 몇 번 와 본 적이 있다. 얼마 전까지 춘양진인이 이곳에 머물렀기에 장문인과, 혹은 사부와 함께 인사드리러 와 본 것이다. 그러나 그때 이 근처를 돌아봤을 때는 이런 단을 본 기억은 없었다.
“음, 이건 형만 알고 있어야 돼?”
“예?”
잠시 머뭇거리던 화영은 검지를 입에 가져가며 비밀이란 걸 표시했다.
“약속할 거지?”
“그, 그러죠.”
“여긴 산의 기운이 모이는 자리야. 이런 곳에서 수련하면 마나가, 아니 기가 훨씬 빨리 모이거든.”
“헛?”
사실이라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무림인들이 신공비급만큼이나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게 무엇인가? 내공을 향상시킬 수 있는 영약이다.
그런데 저절로 기가 빨리 모이는 자리라니? 산이 수련하기에 더 좋다는 말은 언뜻 들은 기억이 있어도 기가 빨리 모이는 자리라는 것은 금시초문이었지만 화영의 말이니 거짓은 아닐 터였다.
이 놀라운 사실을 빨리 사부에게, 장문인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그를 제어하는 화영의 한마디가 떨어졌다.
“하지만 이걸 악용하면 그 산의 기운을 누르거나 죽일 수가 있어. 그러니까 사람들이 알지 않는 편이 좋아. 이 산의 기운이 너무 강해서 기운 자체가 죽을 일은 없겠지만.”
“아…….”
그제야 건명은 쉽게 입 밖으로 낼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말이란 한 번 퍼지면 걷잡을 수 없는 것. 더구나 비밀은 그 정도가 더한 것이니 자신이 사부에게만 말해도 일파만파로 일이 커질 것이 뻔했다.
사부가 알면 분명 장문인에게 말할 것이고 장문인이 알면 원로원 모두가 알게 될 것이 아닌가? 게다가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 자리를 지킨답시고 일을 크게 만들 수도 있는 노릇이고 은밀히 제자들을 데려와 수련시켜도 언젠간 세상에 퍼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무당파에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닌 무리들이 이곳을 노릴지도 몰랐다.
‘이 일은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자.’
다행히 건명은 현명했다. 산의 정기가 모이는 곳이란 게 문파에 큰 복이 될 수도 있지만 오히려 큰 흉이 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란 걸 파악하고 숨기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화영님은 왜 이런 자리를 찾으신 거지? 이미 축기로 내공을 늘리는 단계는 훨씬 지나셨을 텐데?’
혹시 내상을 입어서 치료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다. 그러나 요 몇 달 사이 보여 줬다는 능력과 낮에 자신이 봤던 능력을 생각해 볼 때 별로 가능성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
‘아아, 내게 기연을 주시려는구나!’
건명이 혼자서 하늘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자 화영은 고개를 저으며 단 위로 가 앉았다.
‘에휴! 만날 할아버지들만 쫓아다니고, 처음으로 사귄 형이 이상한 사람이라니. 난 사람 복이 없는 걸까?’
그래도 남궁성아를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화영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화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련에 들어가기 전에 정신을 차린 건명은 옆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아, 나 오늘은 여기 있다가 늦게 들어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먼저 자.”
“아? 예. 그런데 호법이 필요하진 않으십니까? 혹여나 산짐승들이 돌아다니다 건드리기라도 하면…….”
어차피 화영이 이곳에 머무는 기간은 5일. 건명은 이제 4일에 가까운 시간만이 남았을 뿐이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걸 떠올렸다.
“괜찮아. 여차하면 지켜 줄 든든한 아군이 있거든.”
‘헉! 문파의 어른들도 눈치 채지 못한 호위가 있었던가?’
화영은 정령을 두고 말한 것이었으나 알 리 없는 건명은 식은땀을 흘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 건명을 쳐다보는 화영의 눈빛은 여전히 안타까움의 그것이었다.
건명이 연방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초옥으로 들어가고 약 한 시진 동안, 화영의 마나 수련은 계속됐다.
다음날, 건명은 약속한 대로 낮 동안 화영과 놀아 줘야 했다.
숨바꼭질에서 비석 치기까지. 그동안 가끔 동네 아이들이 하는 것을 곁눈질로 배워 뒀던 화영은 우기고 우겨서 한 번씩 다 해 보고야 말았다.
중간에 살짝 오기가 생긴 건명이 무공을 사용하는 반칙을 했지만 화영이 맞대응으로 실프를 소환하자 결국 계속해서 지고 말았다.
그렇게 낮에는 놀고 밤에는 수련하는 생활이 며칠간 지속되고, 산에서 내려가야 하는 날이 찾아왔다.
“일어나십시오. 이제 슬슬 내려가실 때입니다.”
한 곳에서 한 달이란 규칙을 들었고 화영이 25일이나 방에 처박혀 있다가 이곳으로 왔다는 것도 들은 건명이 5일째 되는 마지막 날 아침, 늘어지게 자고 있는 화영을 깨웠다.
“우웅, 조금만 더 자고.”
“지금 내려가도 어두워질 때쯤이나 산을 완전히 내려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러지 마시고 일어나세요.”
“더 자고 싶은데…….”
계속해서 건명이 흔들어 깨우자 화영도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존댓말은 하지만 조금은 거리감이 없어진 건명. 이게 다 며칠간 같이 뛰어논 결과였다.
화영은 운디네의 도움으로 간단히 세수와 양치를 하고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몇 번 봐서인지 건명도 이젠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별로 짐이랄 것도 없지만 내려갈 채비를 마치자 화영이 구석에서 뭔가를 꺼냈다.
“자, 이거.”
“이, 이건?!”
화영이 꺼낸 것은 산삼 한 뿌리. 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영약이었다. 후에 남궁성아를 주려고 찾아 놓은 것이지만 우연히 한 번에 세 뿌리나 발견해서 한 뿌리 나누어 주는 것이다.
산의 정기가 모이는 곳 근처에서, 노움에게 살라만다의 기운을 나누어 주면 강한 양기를 지닌 산삼 몇 뿌리 찾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산에 따라 다르고, 산의 정기가 모이는 곳을 찾는다는 게 노움으로서도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이미 정기가 모이는 곳은 찾았고, 이곳은 무당산이었다.
어쨌든 우연히 맺게 된 화영과의 인연으로 기연을 맞이한 건명은 감격해서 넙죽 절을 올리고 초옥 깊숙이 산삼을 숨겨 놨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화영을 업고 산을 내려갔다.
“바로 내려가시겠습니까?”
“네.”
기다리고 있던 무림인들은 이미 산 아래에 마차까지 대기시켜 놓은 상태였다. 서두르는 것에 대해 이견을 달지 않은 화영은 내려오던 그대로, 계속해서 산을 내려갔다.
“그럼 잘 있어, 형. 다음에 또 보자!”
“혀, 형?!”
후에 들려온 얘기론 마차가 출발하기 전 건명을 향해 던진 화영의 한마디 때문에 무당파 장문인인 소양진인은, 나중에 화영이 무림맹의 높은 자리에 오를 경우 건명과 자신의 배분 차이에 대해 며칠간 머리 싸매고 고민했다고 한다.
그렇게, 또 하나의 사건을 만들고 화영은 멀리멀리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