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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정령사 1권(24화)
9 장 사천당문(1)
점창산을 빠져나온 화영 일행은 다시금 힘차게 말을 몰았다.
이번에는 꼬박 한 달 거리. 운남성에서 사천성으로 넘어가는 것이었지만 두 성의 땅이 워낙에 넓은 탓에 작은 성 몇 개를 지나는 것과 맞먹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시간들이 아깝지 않게 사천성에는 모두 세 개의 문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구파 중 하나인 아미파와 오대세가 중 한 자리를 차지한 당문, 그리고 역시 구파의 일원인 청성파가 그들이었다.
방문 순서는 당연히 가까운 순이다.
하북에서부터 산동, 안휘, 하남, 호북, 중경, 귀주를 거쳐 운남으로 횡단하고 이젠 위로 올라가는 형국이었기에 다음 목표는 사천성의 서부, 아미산으로 결정됐다.
“아미산……. 또 산이야?”
이제 비천십이표를 익혀 보법을 연속적으로 펼치면 전보다 몇 배는 빠르게 산을 오를 수 있는 화영이었지만 보법은 발동작이 많다 보니 오래 펼치면 피곤한 것도 있고, 별것 아닌 일에까지 능력을 쓰는 건 자제하려 했기에 한숨은 가시지 않았다.
마차 안에서 보법을 연습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화영은 양의심공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주력했다.
양손으로 서로 다른 모양을 그리는 것은 물론 획수가 같은 다른 글자, 다른 문장까지 적는 수련이 구결 암기와 병행되며 점점 성취를 높여 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실프의 조언에 따라 무언가 한 가지에 집중하는 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양의심공의 성취가 5성에 달해 갈 때, 드디어 마차가 아미산의 문턱에 닿았다.
“화영님, 올라가시……. 음?”
한숨을 깊게 들이쉰 화영이 산 위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저 멀리서 하얀 옷자락을 펄럭이며 세 명의 비구니가 나는 듯 다가왔다.
“아미파의 제자들이로군.”
“아미의 제자들이 여러 무림 명숙들을 뵙습니다.”
등천능운십팔식(騰天凌雲十八式)이란 상승의 신법을 펼쳐 사뿐히 날아온 세 명의 비구니는 곧장 포권을 취하며 예의를 차렸다.
“그래, 마중 나온 것은 아닐 테고 무슨 일인가?”
“두 가지 소식을 알려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두 가지 소식이라?”
“예. 먼저 은거에 드셨던 멸절사태께서 부족한 저희 때문에 다시 세상에 나오셨습니다.”
“오, 그거 축하할 일이로군.”
멸절사태. 아미파 사상 최고의 고수라는 평을 듣는 그녀는 악을 지독히도 싫어해서 젊었을 적 검에 많은 피를 묻혔다가 후에 후회하며 은거에 든 극강의 고수였다. 각 파의 최고수라는 이들조차도 승부를 장담하지 못할 만큼.
그런 그녀가 아미파를 위해 다시 한 번 세상에 발을 들였으니 아미파의 무공이 날로 발전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여러 고수들의 축하 인사가 끝나자, 고개 숙여 답례한 비구니들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두 번째 소식을 전했다.
“두 번째 소식은 저희 아미파가 금남의 규율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아미파가 지금 화영님을 문전박대하겠다는 소리더냐?”
비구니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규율을 깨고 화영의 방문을 받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딴소리란 말인가?
무림인들이 가만 생각해 보니 멸절사태의 등장이 이 일에 연관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수백 년간 지켜져 내려온 전통과 규율을 지키겠다는 것뿐입니다. 너무 노여워하지 말아 주십시오.”
“멸절사태의 뜻인가?”
“저희 아미파의 뜻이라 이해해 주십시오.”
말을 돌렸지만 무림인들은 자신들의 짐작이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문인이나 그에 준하는 배분을 지닌 아미파 고수가 아니라 새파랗게 어린 처자들이 나온 것도 뭔가 그와 관련된 이유가 있을 터.
더 물어봐야 소용없음을 알고 무림인들은 화영의 눈치를 살피며 맺음을 지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어린 제자들을 내보내다니, 아미파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군! 오늘 일은 기억해 두겠다!”
예의에 어긋난 아미파의 행동을 질책하며 무림인들은 걸음을 틀었다. 물론 산을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화영은 잽싸게 마차 위로 올랐다.
아미산에서 다시 삼 일 거리. 사천성의 성도에 도착했다.
좀 더 정확히는 사천성 성도 부근에 있는 오대세가의 일원. 암기와 용독술의 제왕인 사천당문에 도착한 것이다.
데릴사위제를 채택하는 당문이라서일까? 장원 주변에 유독 어슬렁대는 사내가 많았다. 물론 당문의 꽃, 무림사미 중 한 명인 당예화가 장원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으니 헛수고에 불과했지만.
하지만 인생 역전이 가능하다면 검술 수련하다가 벼락 맞을 말도 안 되게 작은 확률에도 도전해 보는 게 인간이었다.
때문에 당문의 장원 근처에는 항상 어슬렁거리는 사내가 끊이질 않았다.
과거 가출을 시도하며 월담하던 당문의 여식이 담에서 뛰어내리다 깔아뭉갠 사내와 눈 맞은 일화도 있었으니까.
“다 왔습니다, 화영님. 내리시지요.”
여타의 세가들과는 달리, 마차는 당문의 입구에서 멈춰 섰다. 때문에 화영은 의아한 얼굴을 했지만 곧이어 들려온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오십시오. 화영님, 그리고 무림의 명숙 여러분. 저는 당문을 맡고 있는 당천기라고 합니다. 여기부터는 기관과 진법이 가동되고 있으니 제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오십시오.”
과연, 화영이 느끼기에도 주위의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본래 중요한 손님이 오면 기관과 진법을 일시적으로 해제시켜 놓는 것이 보통이나, 당문의 경우엔 오히려 좀 더 강화시켜 놓았다.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는 일종의 무력시위인 것이다.
일 각여를 걷고 나자 드디어 전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커다란 전각 아래, 웬 소녀가 선녀도에나 나올 법한 하늘하늘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가만히 서 있었다.
“누구지?”
화영이 그녀를 발견한 순간, 소녀는 수줍은 듯 전각의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개를 갸웃하며 무림인들을 쳐다봤지만 화영을 제외하곤 아무도 그녀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맨 앞을 걸어가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 사람은 있었다.
조금 더 걷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자취를 감췄다. 다른 세가들처럼 무공이 중심이 아니라 암기와 용독술이 중심이니 연무로써 시선을 끌기 어려운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당문의 무공이 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아미파를 건너뛰고 방문하셔서 미처 숙소 정리가 끝나지 못했습니다. 조금 전 정리가 거의 끝났다고 연락이 왔으니 잠시 안으로 들어가셔서 차라도 드시죠.”
“네.”
당천기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아미파를 그냥 지나쳐 온 것은 확실히 의외였으나 전서구를 통해 보고 받은 지 오래였다. 숙소가 아무리 많고, 넓다 하나 반나절이면 충분히 정리할 수 있었고 사실 점창파에 도착했다는 전서구가 왔을 때부터 매일같이 숙소의 정리를 지시했었다.
그런데도 이런 거짓말을 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건 바로 종종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꼭꼭 숨어 버리는 화영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
붙잡아 두는 이유는…… 당연히 음흉한 속내가 있기 때문이다.
“앉으시지요.”
전각의 안으로 들어온 당천기는 화영과 그 일행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면서 움직임을 교묘히 하여 자신은 화영의 옆자리로 앉았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여러 시비들이 나와 개개인의 앞으로 차와 다과를 대령했다. 혹시나 신경을 거스를까 하여 시비들은 모두 무공을 모르는 아이들로 골랐고, 면사를 씌웠으며, 은으로 된 짧고 가는 막대를 차와 함께 두었다.
어차피 독을 쓰리라 의심하진 않겠지만 재차 확인해 보라는 의미였다. 면사를 씌운 이유는 조금 달랐지만.
펄럭.
시비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느라 고개를 돌린 화영의 눈에 조금 전 봤던, 이상한 소녀의 하늘하늘한 옷자락이 보였다.
“어?”
그러나 이내, 기둥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지만 왠지 아쉬워진 화영. 쫓아가 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남의 집이라 함부로 헤집고 다닐 수도 없었다.
‘근데 이번에도 나 혼자만 본 건가?’
혹시나 해서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폈지만 아무도 그녀를 본 듯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혹시 귀, 귀신?!’
세상을 구성하는 기운들의 집합체인 정령을 다루는 자가 귀신 따위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직 어린아이였기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은 조금 이해가 되기도 했다. 어른들도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는 막연한 두려움을 갖기 마련이니까.
놀란 화영이 다시는 그쪽을 보지도 않고 뻣뻣하게 차만 마시고 있을 때, 눈치를 살피던 당천기가 몰래 손짓을 했다.
“화영님,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제 아내와 여식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하연입니다.”
“소녀, 당예화라 하옵니다.”
“……!”
당천기의 말과 함께 두 모녀가 화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중후한 미를 풍기며 살갑게 웃는 황하연과 수줍은 듯 시선을 피하는 당예화. 그중에 당예화는 귀신으로 오해했던 소녀였기에 화영은 깜짝 놀랐다.
“아들놈은 지금 천수학관에 있어서 인사시켜 드리지 못했습니다.”
“아, 네.”
아직 얼떨떨한 표정의 화영을 보며 당천기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무림사미 중 일인으로 꼽히는 자신의 딸이니 화영도 넋이 나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계획대로 되고 있음에 만족하며 당천기는 계속해서 일을 진행시켰다.
“화아야, 좀 더 가까이 오너라.”
“아닙니다, 아버님.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제가 어찌…….”
“어차피 화영님께서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은 네가 모실 것이 아니더냐? 괜찮으니 가까이 오너라. 화영님, 혹 언짢진 않으시지요?”
“네. 괜찮아요.”
“그것 보거라.”
“그럼 잠시…….”
당예화는 여전히 수줍은 얼굴로 사뿐히 화영의 옆으로 움직였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긋나긋하고 행동 하나하나가 조신한 모습. 그녀를 바라보는 무림인들은 대부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10년만 젊었어도…… 하고 생각하는 자도 없지 않았다.
씨익.
모두의 반응을 보는 당예화의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갔다. 긴 옷자락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시 한 번 소개하겠습니다. 제 여식인 당예화라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가문의 무공을 익혀 일신에 지닌 무공이 또래 중엔 제법이지요. 자식 자랑 같지만 무림사미 중 한 자리를 차지할 만큼 미색이 출중하답니다.”
“강호의 친구들이 저를 놀리려고 붙여 준 허명이니 신경 쓰지 마시어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 당예화.
하지만 아마 이 모습을 천수학관의 그녀를 아는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기겁을 했을 터였다.
천하의 당예화가 누군가? 뛰어난 무공과 암기술, 용독술을 바탕으로 천수학관의 남학생들을 모두 자신의 발아래로 보는 여인이 아니던가? 거기다 뛰어난 미모까지 더해지니 오만하기 그지없어서 그녀의 미소를 본 자는 꼭 하나씩 뭔가 해코지를 당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차가운 여인이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나 변하다니, 뭔가 이유가 있을 게 분명했다. 그것도 아주 큰 이유가.
‘무림사미? 그러고 보니 그녀도 무림사미 중 한 명이라 했었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화영의 마음은 이미 송두리째 다른 사람이 가져가 버린 상태였다. 그런 상황이니 당예화의 신비주의 전략도, 내숭 작전도 모두 허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본인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화아가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 화영님께 마음이 있는 모양입니다. 하하하!”
“아이, 아버지도 참!”
당예화는 부끄러운 듯 붉어진 얼굴을 가리며 수줍게 돌아섰다. 그러나 얼굴이 붉어진 것조차 특수한 무공에 의한 것일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할 것이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당예화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예쁜 자신이 마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지 않고 배길 남자는 없다고 자신하는 득의의 미소인 것이다.
“저기…….”
“예, 화영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화영이 말을 걸자 당천기는 막연한 기대를 품으며 눈을 빛냈다.
“방 정리는 아직 멀었어요?”
“허, 험! 아마 다 됐을 겁니다. 크흠.”
“큭큭큭.”
“킥킥.”
뒤늦게 당천기의 의도를 알아채고 내심 불안해 하던 무림인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명색이 무림사미라 불리우는 당예화인지라 걱정된 게 사실인데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다소 의외이긴 했지만 화영의 실제 나이가 더 이상 여색에 관심이 없어질 정도로 많을 것이라 예상하며 안도한 것이다.
덕분에 무안함과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질 대로 붉어진 당천기는 대충 장내를 정리하고 시비를 시켜 무림인들을 각자의 배정된 방으로 몰아넣었다.
“공자께서는 이쪽으로.”
하지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당천기는 어떨지 모르지만 당예화만큼은 아니었다.
항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어딜 가든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 줄을 서던 그녀였기에 화영의 무관심에 오기가 생긴 것이다.
때문에 웃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이를 빠득빠득 갈고 있었다.
“다 왔습니다. 밤에 이 앞 정자에서 보는 연못의 경치도 꽤 좋으니 가시기 전에 한번쯤 가 보시는 것도 좋으실 듯하옵니다. 그럼 편히 쉬셔요.”
화영의 숙소는 크기나 주변 풍경도 그렇지만 다른 무림인들과 방향부터가 전혀 달랐다. 무림인들의 방해를 받아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 것을 염려한 당천기, 당예화 부녀의 계략인 것이다.
화영의 숙소 앞에 있는 연못과 그 위의 작은 정자에 대해 살짝 언급한 당예화는 별다른 시도 없이 공손히 인사한 뒤 물러났다.
“연못이라고? 음, 저녁때나 한번 가 봐야겠다.”
이동하는 내내 정령들 이외엔 말동무도 없이 마차 안에 있었고, 보통 도착한다 해도 방에만 틀어박히기 일쑤였으니 화영도 조금 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아니, 한창 뛰어놀 나이에 이만큼 버티는 것만 해도 용한 것이다.
그 심정을 이해하는지 엄격한 스승인 실프도 군소리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오행권을 세 번 연달아 펼친 뒤 욕조에 들어가 땀을 씻고 다시 양의심공을 두어 번 정도 되뇌자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저녁은 당문에 도착하기 전에 화영이 우겨서 이미 먹은 상태. 덕분에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았던 화영은 방에 놓인 전병 몇 개를 들고 당예화가 알려 준 숙소 앞 연못을 향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