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


헨리에타는 후작저의 집사인 달튼에게로 소년을 데려가며 묻는다.

“이름이 뭐니?”

그 물음에도 소년은 그저 헨리에타를 바라만 본다.

“이름도 없다고 하지는 말자.”

헨리에타는 설마 했지만, 소년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게 사실인 모양이다. 도대체 뭘 어떻게 살았기에.

“어거스트.”

헨리에타는 짧게 내뱉으며 말을 잇는다.

“그걸로 해. 네 이름.”

이름을 정한 건 단순하다. 현재의 달에서 이름을 땄다.

“감사해요.”

성의가 없는 게 대놓고 티가 나는데도 소년은 그렇게 말한다. 조금 기뻐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



“달튼. 새로운 고용인이야. 이름은 어거스트. 앞으로 여기서 일할 건데, 어디서 일할지는 대충 정해 줘.”

다짜고짜 들어와서 하는 헨리에타의 말에 후작저의 집사, 달튼은 헨리에타와 어거스트를 번갈아 바라보며 묻는다.

“오늘도 한 건 하신 건 들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한 건은 무슨. 늘 있는 일이잖아.”

달튼은 이미 카타리나와 헨리에타가 또 싸웠다는 걸 전해 들은 모양이다. 거기다 헨리에타가 옆에 못 보던 소년 하나를 달고 왔으니 예측도 쉽겠고.

“설마 이 아이가,”

그 목소리가 이어지기 전에 헨리에타는 단번에 달튼의 말을 끊는다.

“그만. 더 묻지 마.”

분명히 달튼은 잔소리를 시작할 것이다. 물론, 그건 잔소리라기보다는 타당한 의심과 반론이겠지만, 어쨌거나 헨리에타는 어거스트를 들이기로 했다. 충동적이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렇게 결정했으니 그렇게 될 일이다.

“그냥 이 애한테 일 배정해 주고 카타리나가 얘 괴롭히지 못하게 해. 미리 다른 사람들한테도 주의하라고 일러 놓고.”

헨리에타가 제 말을 전혀 듣지 않을 것을 안 달튼은 흘깃 어거스트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 시선에 어거스트는 조금 움찔하며 움츠러든다.

“하지만 후작 부인께서는 사용인들에게 저를 말리지 말라 명하실 텐데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다. 카타리나는 성격이 그리 온순한 편은 아니다.

“그래서 그게 뭐?”

헨리에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잇는다.

“내 명령이 우선이잖아.”

말하자면, 카타리나와 헨리에타는 기 싸움을 하는 중이다. 헨리에타는 카타리나를 대놓고 싫어하지만, 그건 새어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런 건 상관도 없다. 거기다 사실 헨리에타에게 카타리나는 새어머니라기보다 그냥 아버지의 새로운 부인이다.

“어디 굴러 들어온 돌이 내 자리를 뺏으려 들어.”

헨리에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그런 거다. 만일 카타리나가 제 주제를 알고 얌전히 굴었다면 헨리에타도 카타리나를 일정 부분 인정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그렇지가 않다.

“아가씨, 아무리 그래도 이제 아가씨의 새어머니이신데,”

달튼은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 목소리에는 타박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어차피 모두가 안다. 저택의 1순위는 후작이고 2순위는 헨리에타이다. 카타리나를 제외한 모두가 안다. 저택의 모든 것은 그에 맞춰 돌아간다.

“달튼, 카타리나는 그냥 소꿉놀이가 하고 싶은 거야. 그런데 내가 안 굽혀 주니까 짜증을 내는 거지.”

카타리나가 헨리에타를 건들지 않았다면 헨리에타는 카타리나를 3순위로 만들어 주었겠지만, 카타리나는 헨리에타를 제 아래에 두려 했고, 그걸 헨리에타가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그런데 내가 미친 게 아닌 이상 왜 굽히는데? 어차피 못 버티고 떨어져 나갈 건 그쪽이잖아. 다 알면서 새삼스럽게.”

카타리나는 후작의 네 번째 부인이다. 후작은 사람에 질리는 게 빠르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면 조금 유예를 두기는 하지만, 그게 끝나면 그대로 끝이다. 헨리에타는 후작가의 유일한 후계자이니 계속해서 남겠지만, 카타리나는 그리 오래지 않아 후작저에서 나가게 될 것이다. 그 이전의 부인들이 그랬듯이. 어차피 모든 건 시간문제다.

헨리에타는 그저 한 번 어깨를 으쓱이고는 턱짓으로 어거스트를 가리킨다.

“잘 지켜 줘. 불쌍하잖아.”

헨리에타는 대놓고 말한다. 그럼에도 어거스트에게는 그다지 불쾌한 기색이 없다. 어차피 어거스트의 반응은 헨리에타에게 별 상관도 없지만.

“알겠습니다.”

달튼은 답했고 헨리에타는 문을 열어젖히며 걸음을 옮긴다.



*



“새로 들어온 애는 어디 배정받았다니?”

제 시녀인 하퍼에게 물은 헨리에타의 목소리에 하퍼는 드레스를 입혀 주며 답한다.

“마구간이요.”

“괜찮네.”

카타리나가 아직 어거스트의 상황을 모르고 있는 것이야 안다. 어거스트가 저택에 있는 걸 알았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다. 거기다 카타리나는 이미 헨리에타의 앞에 나타났던 전적도 있다. 묻고 싶은 게 있는 걸 숨기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자존심에 차마 묻지는 못했지만, 아마 어거스트를 어떻게 했냐고 물으려 했을 것이다. 뻔한 일이다.

달튼은 지금의 상태가 폭풍 전야인 것을 안다. 어거스트가 저택에 있다는 걸 카타리나가 알기만 하면 바로 깨질 평화이다. 그러니 달튼은 어거스트를 카타리나의 눈에서 최대한 숨기는 것을 택했으리라. 마구간은 카타리나가 절대 들를 리 없는 공간이니 평화를 사랑하는 달튼의 성정과도, 어거스트를 잘 지켜 주라고 했던 헨리에타의 명에도 잘 들어맞는 선정이다.

“그 애 본 적 있어?”

살짝 몸을 틀어 하퍼를 바라보는 헨리에타의 행동에 하퍼는 헨리에타의 몸을 다시 바로 세우며 답한다.

“아니요. 집사님이 일부러 보러 가지는 말라고 하셨거든요.”

그것도 괜찮은 결정이다. 분명 그런 명이 없었더라면 다들 호기심에 어거스트를 보러 갔을 것이고, 그 외모 덕에 그 아이에 대한 소문이 났을 테다. 그러다 보면 카타리나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겠고.

“달튼이 뭐라 하든?”

하퍼는 헨리에타의 드레스 허리에 공단 리본을 둘러 멘다.

“마구간에 새로운 아이가 들어왔는데, 후작 부인이 그 아이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라고 하셨어요. 혹시라도 궁금증에 일부러 애를 보러 가면 혼을 낼 거라고 하시면서요.”

“그걸 다들 지켜?”

헨리에타가 다시 뒤를 돌자 하퍼는 조용히 헨리에타를 바라본다. 헨리에타가 움직인 탓에 기껏 위치를 잡은 끈이 조금 틀어졌다. 헨리에타는 얌전히 다시 바른 자세로 서며 제 허리에 감긴 끈을 제 손으로 잡아 위치를 조정한다. 하퍼는 리본 모양을 세심히 다듬고는 핀으로 끈을 드레스에 고정한다.

“그럼 어째요. 집사님 명령이신데.”

헨리에타는 조용히 내뱉어지는 그 목소리를 듣는다. 헨리에타라면 호기심에 분명 그 명을 어겼을 텐데, 다들 착하다 싶다. 물론, 헨리에타와 사용인들은 처지가 달랐으니 그게 당연하지만.

“아가씨가 데려오셨다면서요?”

“아니. 카타리나가 데려온 애야.”

헨리에타는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바라본다. 아직 단장을 하지 않은 탓에 그저 축 늘어진 머리칼과 짙은 녹색의 드레스는 조금 상반되는 구석이 있다.

“그걸 내가 뺏었어.”

헨리에타와 하퍼는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헨리에타가 여섯 살일 때부터 하퍼는 헨리에타의 시녀였다. 그때의 하퍼는 고작 열넷이었지만, 그때도 일을 꽤 잘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퍼는 입이 무겁다. 그게 헨리에타가 하퍼를 곁에 두는 이유 중 하나다.

하퍼는 그 누구에게도 헨리에타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게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그러니 지금의 이 이야기도 다른 이의 귀에 들어갈 일은 없다. 하지만, 헨리에타가 그러기를 원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건 다른 사람한테 말해도 돼. 그러면 혹시라도 카타리나랑 그 아이가 만났을 때 다들 더 열심히 카타리나를 말리지 않겠어.”

하퍼는 헨리에타의 치마 밑단을 정리하며 답한다.

“네. 그럴게요.”

어차피 머리를 하려면 앉아야 했고 그 후 일어났을 때 다시 정리해야 할 텐데도, 하퍼는 꼭 두 번은 드레스의 매무새를 점검한다. 헨리에타는 그 모습을 흘깃 바라보다가, 제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려 대충 손으로 잡아 들고 거울을 바라본다. 역시 이편이 더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