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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애, 오셨습니까?”

더스틴은 헨리에타의 기사인 버나드가 헨리에타를 에스코트하기도 전에 헨리에타에게 팔을 내민다. 헨리에타는 그런 더스틴의 모습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일단 그 팔에 제 손을 얹고 마차에서 빠져나온다.

“오늘은 소꿉놀이인가요?”

헨리에타는 더스틴에게 말하고는 버나드에게 눈짓한다. 이제 헨리에타가 다시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는 표시이다. 어차피 기사는 문까지만 출입할 수 있다.

“영애가 가장 늦으셨어요.”

헨리에타는 더스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걸음을 옮긴다. 어차피 길이야 다 알고 있으니 에스코트가 필요하지 않음에도. 헨리에타는 이미 랜체스터 공작가를 방문한 전적이 꽤 있다.

“그래서요?”

헨리에타의 말에 더스틴은 헨리에타를 바라본다.

“잠깐, 혹시 오늘 기분 안 좋아?”

더스틴이 헨리에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뻔했지만, 헨리에타는 일부러 무표정을 유지하며 말한다.

“그럴 리가 있나요.”

그냥 좀 놀리는 것이다. 더스틴은 헨리에타가 화내는 걸 꽤 무서워한다. 정작 헨리에타는 더스틴에게 화를 내 본 적이 없는데도 그렇다. 언제 한 번 헨리에타가 다른 사람과 싸운 적이 있는데, 그때 화를 내던 것을 보고는 아직도 무서워하는 것이다.

더스틴은 다른 이들이 모인 장소 근처에 다다르자 곧바로 그쪽으로 달려간다. 헨리에타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더스틴의 모습이 어이가 없어 조금 바라보다가, 이내 저 역시 그 뒤를 천천히 따른다. 헨리에타는 자리를 살피다 의자에 앉아 책을 보는 이안에게로 다가간다.

“왔네.”

“지금 쟤 기분 안 좋아. 건들지 마.”

이안의 말 뒤로 바로 더스틴의 목소리가 나왔다. 헨리에타는 이안의 앞에 놓인 소파에 앉으며 구두를 벗고 다리를 쭉 뻗는다. 헨리에타의 예절 선생님이 본다면 기겁을 하겠지만, 지금은 옆에 없으니 상관없다.

“그냥 장단 좀 맞춰 준 거 가지고 호들갑이야.”

헨리에타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테이블 위 잔을 들어 올린다. 그 모습에 앤더슨이 헨리에타의 잔에 차를 따라 준다.

“왜?”

턱을 괴고 저를 빤히 바라보는 오데트의 모습에 헨리에타가 묻자, 오데트는 헨리에타를 관찰하듯 바라본다.

“너 키 컸니?”

그 물음에 헨리에타는 드레스로 감싸여진 제 다리를 한 번 바라보았다.

“아니!”

헨리에타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나온 더스틴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더스틴에게로 향한다. 헨리에타는 또래 여자아이들보다 키가 큰 편이고 더스틴은 성장이 좀 느린 건지 뭔지 키가 좀 작다. 그나마 오데트는 체구가 작은 편이라 더스틴이 오데트보다는 컸는데, 헨리에타와는 비슷하다. 더스틴은 늘 저가 헨리에타보다 더 크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재 보면 되겠네.”

이안의 말에 헨리에타는 신발을 벗은 그대로 카펫에 발을 디디고 선다. 그 모습에 더스틴도 신발을 벗고 헨리에타에게로 다가온다. 저번에 쟀을 때는 더스틴과 헨리에타의 키가 거의 비슷했다. 헨리에타와 더스틴은 서로 등을 대고 선다.

“에티가 조금 더 크네.”

이안의 목소리는 간단하게 나왔다. 헨리에타는 그새 키가 컸나 보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뭐? 잘못 본 거 아니야?”

“에티가 큰 거 맞아.”

“그래. 너보다 에티가 커.”

더스틴의 반발 뒤로 오데트와 앤더슨이 나란히 말하자 더스틴은 그럼에도 쉽게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아니, 나 요즘 키 좀 컸단 말이야.”

“그럼 에티는 그것보다 더 컸나 보네.”

헨리에타는 다시 소파에 몸을 파묻으며 더스틴을 바라본다.

“우리 작은 더핀, 너도 곧 클 테니 걱정하지 마.”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더스틴은 저를 더핀이라고 부르는 걸 싫어한다. 헨리에타는 얼마 전 이안에게 왜 더스틴이 그 애칭을 유독 싫어하는 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이안은 더스틴이 그 애칭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헨리에타가 항상 그 앞에 작은 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걸 더 싫어하는 거라고 말해 주었다. 물론, 헨리에타는 그 이후로도 더스틴을 작은 더핀이라 부른다. 어감이 더 귀여워서 그렇다.

이안, 오데트, 앤더슨, 더스틴, 그리고 헨리에타는 또래의 친구들이다. 어른들끼리의 이해관계를 적당히 엮어 만들어 준 관계이다. 제 부모들은 또래끼리 어울리며 친목을 다지고 사교 기술을 배우기를 바랐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과 조금 다르게 됐다. 뭐, 다들 친해졌고 서로를 다루는 법을 알게 되기는 했는데, 그게 그리 예의 바른 형태는 아니다.

헨리에타와 더스틴은 대놓고 제멋대로 굴고 이안은 얌전한 척하며 가끔씩 큰일을 친다. 오데트는 원래부터도 꽤나 예민한 구석이 있는 걸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앤더슨은 그나마 이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다고 얌전하기는 한데, 그건 그냥 만사가 귀찮아서 그런 거다.

그렇다 한들 처음에는 다들 나름대로 서로에게 예의를 차렸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다.

“콜튼 저택은 여전해?”

문득 나온 오데트의 물음에 헨리에타는 대충 손사래를 친다. 여전하다는 뜻이다. 다 같이 만날 때는 보통 서로의 저택에서 만난다. 물론, 이안이 황자인 만큼 황성에서 만날 때가 드물게 있기는 한데, 그러려면 서로서로 예의를 차리고 준비해야 할 게 너무 많아 보통은 그러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만날 때는 오데트의 밀턴 공작저, 앤더슨의 리드 백작저, 더스틴의 랜체스터 공작저, 헨리에타의 콜튼 후작저, 그중 한 곳에서 만난다. 하지만 헨리에타는 한동안 콜튼 후작저에 이들을 초대하지 않았다. 카타리나가 들어와서 그렇다. 카타리나는 명예욕과 권력욕이 강하다. 분명 간섭하려 들 게 뻔하다.

“앤디, 너 그런데 우리 만나고 나서 어디 가니?”

헨리에타는 문득 눈에 들어온 앤더슨의 옷차림에 물었다. 물론, 다들 꽤 잘 차려입고 오기는 했다. 헨리에타만 해도 그렇다. 아침부터 일어나서 머리를 하고 그 전날부터는 피부 관리를 하고 아주 난리도 아니다.

실상은 서로 농담 따먹기나 하며 낄낄거리는 별것 아닌 모임이지만, 그 모임 참가자들의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정작 당사자도 아닌 주위에서는 신경을 많이 쓴다. 시녀와 시종들 입장에서는 제 가문의 아가씨, 도련님이 다른 이들에게 밀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기는 한데, 앤더슨의 차림은 평소보다도 더 각이 잡혀 있다. 거기다 평소에는 답답해서 싫다고 머리는 잘 건들지 않는데, 오늘은 머리도 단정히 넘긴 상태이다.

“로라가 왔대.”

답은 이안에게서 나왔다.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로라는 앤더슨의 사촌 동생이다. 옷 입히기를 가장 좋아하는데 인형보다는 사람 가지고 노는 걸 더 좋아한다. 이번에는 이안을 가지고 논 모양이다.

“너 앞으로도 그러고 다녀. 보기 좋네.”

“나는 자연스러운 게 더 좋은데.”

헨리에타의 말 뒤로 나온 오데트의 목소리에 헨리에타는 그냥 한 번 어깨를 으쓱인다. 사실 앤더슨이 뭘 어쩌든 헨리에타는 관심도 없다. 그건 오데트 역시 마찬가지다. 헨리에타와 오데트는 앤더슨의 차림에 대해 말은 하면서도, 적나라하게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 없다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는다.

“너희가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니 참 새로운 사실이다.”

건조하게 나온 앤더슨의 목소리에 헨리에타와 오데트는 실없이 앤더슨에 대해 하던 말을 멈춘다. 오데트는 테이블 위로 준비된 과일을 먹으려 손을 뻗었고 헨리에타는 잠이나 좀 자려 쿠션을 찾는다. 원래도 분위기가 이렇다. 얘기를 하기도 하고 그냥 서로 할 걸 하기도 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

“더핀, 여기 베개 같은 거 없어?”

헨리에타의 목소리에 더스틴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창가 근처에 덩그러니 있던 흔들의자에서 쿠션을 가져와 헨리에타에게 던진다. 헨리에타는 쿠션을 어렵지 않게 잡아 제 머리 밑에 놓고 자세를 잡는다. 머리가 좀 흐트러지기야 하겠지만, 오데트의 도움을 받으면 괜찮을 것도 같다. 거기다 더스틴도 은근히 머리 정리를 잘하니 어떻게든 될 것이다.

“뭐 읽어?”

오데트와 앤더슨은 서로 차를 따라 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더스틴은 요즘 한창 십자말풀이에 재미를 붙였다고 하더니 그걸 하고 있다. 그리고 이안은 헨리에타가 누운 소파 근처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 헨리에타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고 이안은 그냥 책을 들어 헨리에타에게 제목을 보여 준다. 헨리에타도 아는 책이다. 요즘 유행한다는 로맨스 소설이다. 헨리에타가 직접 읽은 건 아닌데, 성행위 묘사가 적나라하다고 유명하다.

“재밌니?”

“쓰레기야.”

이안의 답은 단번에 나왔다. 그러면서도 계속 읽고 있기는 하다.

“진짜 표현이 적나라해?”

“응.”

그 답 역시 간결하다.

“그런데 내용이 속 터져.”

“그럼 난 중요한 부분만 볼래. 너 다 읽고 나한테 그 부분 어딘지 알려 줘.”

헨리에타가 말하는 중요한 부분이야 뻔하다. 이안은 짧게 웃는다.

“그래.”

헨리에타는 이안에게로 손을 뻗는다. 이안은 그 손짓에 의자에 걸쳐 놓았던 제 재킷을 헨리에타에게 건넨다. 헨리에타는 주위가 밝으면 잘 자지 못한다. 이안도 아는 사실이다. 헨리에타는 이안의 재킷을 뒤집어쓰고는 조금 웅얼거린다.

“더핀이 나 깨우게 두면 가만 안 둘 거야.”

헨리에타는 잠귀가 밝은 편이라 남들이 깨우기 어려운 편은 아니다. 그러니 그냥 작게 흔들거나 일어나라고 평범하게 말을 해도 충분히 깨어나는데, 더스틴은 꼭 헨리에타를 요란하게 깨운다. 그 탓에 두어 번 심장을 부여잡으며 잠에서 깬 이후로 헨리에타는 자기 전 주위에 꼭 더스틴이 자신을 깨우지 못하게 하라고 일러둔다.

“알았어. 내가 깨워 줄게.”

뒤집어쓴 재킷 너머로 이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응. 꼭 그래야 해.”

헨리에타는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