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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신위 1권(3화)
第二章 제왕령(帝王令) - 여우를 피해 호랑이 품으로 들어가다.(1)


주운은 어리둥절했다.
느닷없이 들이닥쳐 주운을 중심으로 포위하듯 선 자들의 행색은 대단히 특이했다.
얼굴은 구멍 두 개가 뻥 뚫린 검은 복면을 뒤집어써 한기가 뿜어져 나오는 눈빛만 보였고, 온몸에는 흑색 피풍의가 둘둘 말려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구별이 가지 않았다.
단지 처음 입을 연 가운데 복면인의 음성으로 그들이 사내라는 것을 어림잡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그들의 등장은 주운에게는 매우 의외였다.
‘저들이 어찌 여기에?’
주운은 복면인들의 가슴팍에 금실로 수놓아진 글귀를 힐끗 보며 복잡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여태껏 마셨던 술이 식도에 걸려 도로 넘어오려 했다.
흑밀(黑密).
제왕성에서 흑밀이란 글귀를 새긴 피풍의를 걸친 집단은 단 하나였다.
흑밀부(黑密府).
흑밀부는 정보를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강호상의 정보를 수집해 분류, 종류별로 자료를 정리해 가히 소강호(小江湖)라 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내가 없던 사이에 방칙이 바뀐 것인가?’
주운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성주의 지시 없이는 단독으로 움직일 수 없는 곳이 흑밀부였다. 흑밀부에 속한 자들 개개인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의 유출을 막으려 그러한 조치가 취해졌던 까닭이다.
한데, 그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셋이나.
행여 아는 것이 있을까 싶어 강만석을 곁눈질했으나 그도 아무것도 모르는 듯 어리둥절한 눈으로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흑밀부에서 나를 찾았다고? 난 방금 도착해서 아직 그쪽이랑 면식할 일은 하지 않았는데.”
주운은 궁금한 것을 참는 이가 아니었지만 노골적으로 표하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술에 취해 이성이 마비되자 고개를 비스듬히 누이며 대뜸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그렇다.”
처음 말을 꺼낸 흑밀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하게 드러난 두 눈에는 그밖의 다른 질문은 용납지 않겠다는 듯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만약 다른 이였다면 그것만으로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주운은 사소한 것에 혹해 근본적인 것을 놓치는 어리석은 이는 더더욱 아니었기에 핵심을 찔렀다.
“누가?”
흑밀부원은 주운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상거지 몰골에 헝클어진 머리칼과 술에 쩐 눈빛, 그리고 성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자. 확실하군.”
대신 조그맣게 중얼거리더니 소리쳤다.
“잠자코 따라와라!”
주운은 다짜고짜 자신의 어깨를 덥석 잡는 손을 곁눈질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돌아오자마자 황당한 일을 겪으니 화가 치밀었다.
“이봐, 원래 그렇게 상대의 말을 잘 무시하나?”
그러더니 손을 뻗어 자신의 어깨를 잡은 흑밀부원의 손을 꺾어 버렸다.
“크으읏?”
흑밀부원은 졸지에 제압 당한 꼴이 되어 답답한 신음을 흘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이놈!”
“당장 그 손 놓지 못할까!”
양옆에 서 있던 두 흑밀부원이 손목이 꺾인 흑밀부원의 일 처리에 흡족한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작스런 사태에 경악해 소리쳤다.
“이봐, 저놈들 좀 조용히 시켜. 내가 술을 좀 해서 힘 조절을 못할 것 같아.”
주운이 나직이 소곤거렸다.
“크윽!”
제압 당한 흑밀부원은 분한 듯 이를 갈았다.
‘대체 이자는 누구지? 별 볼일 없는 주정뱅이인 줄 알았더니 이런 한 수를 숨겨 놓고 있었다니. 어째서 그분은 이런 자를 보고자 하시는 것일까?’
평소 자신의 무공에 대해 은근히 자부심을 가졌던 흑밀부원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치욕에 이어 의문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하나 주운은 흑밀부원이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이봐, 그러다 손목 부러져.”
그러면서 다른 손에 든 술병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꿀꺽꿀꺽 술을 삼키자 목울대가 춤을 추었다.
흑밀부원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는 주운을 잠시 노려보다가 턱짓을 했다.
물러서라는 뜻이다.
‘분하지만 이자는 내 상대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 전부 달려들어도 어찌할 수 있는 자가 아닐지도.’
종전의 한 수는 전혀 짐작할 수 없으리만치 기쾌했다.
아니, 기실 언제 손을 썼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마 자신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실력자이리라.
도대체 어디서 이런 고수가 나타난 것일까?
흑밀부원은 궁리하면서도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았다.
“당신을 기다리는 분이 계신다. 만에 하나 당신이 우리를 따라오지 않는다면 결코 일이 좋게 끝나지는 않을 터, 얌전히 따라오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주운은 몽롱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싫다.”
“……!”
흑밀부원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감히 제왕성과 척을 지려 하다니 미친놈이군,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나 다음 순간,
“하지만 너희들이 안내를 하는 거라면 응하겠다.”
잡혔던 자신의 손목을 놓고 여유롭게 씩 웃으며 말하는 주운의 말에 그 생각을 정정했다.
가더라도 타의가 아닌 자신의 발로 당당하게 걸어가겠다는 뜻이 아닌가?
이런 자는 결코 강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자…… 참으로 재미있군.’
취한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모습이 흥미로웠다.
흑밀부원은 이채로운 눈빛을 발하며 앞장섰다. 주운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주운은 느긋하게 흑밀부원들의 뒤를 따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복잡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만석을 향해 씩 웃어 주었다.
만나자마자 작별을 하려니 아쉬웠던가?
주운이 입술만 달싹여 무어라 하는 듯했다.
“……?”
강만석은 제대로 보지 못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두 눈만 끔뻑였다.

***

흑밀부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성내 깊은 곳으로 향하는 주운의 눈에 낯익은 건물이 나타났다.
‘여기는…….’
고아한 풍취가 느껴지는 건물을 바라보는 주운의 눈빛이 기이한 빛을 발했다.
“과연 그런 것인가.”
“……?”
주운의 나직한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흑밀부원들이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주운은 히죽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젓고는 화주를 들이켰다. 그러자 흑밀부원들이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흑밀부까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인가?’
오로지 제왕성주의 명령에만 따른다는 자들을…….
주운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눈앞의 건물을 응시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건물에 걸린 편액이었다.

심의각(深意閣)

그 편액에 양각되어 있는 글귀가 주운에게 시사해 주는 바는 대단히 컸다.
바로 제왕성의 군사 백리소가 기거하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향(香).
제왕성 군사의 방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검박한 방 안에는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다. 울금향(鬱金香, 튤립)이었다.
군사라는 지위에 어울리지 않게 그 흔한 사치품 하나 없는 내부가 적잖이 신기할 것이기도 했지만, 주운은 전면을 주시한 채 동이 난 술병을 흔들었다.
주렴.
손톱만 한 구슬이 촘촘히 꿰어 있는 주렴은 그 너머에 앉은 사람을 충분히 가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고작해야 언뜻 윤곽만 보일 따름이다.
‘저 여인이 백리소인가?’
그러나 무공을 익힌 고수들은 다르다.
주운은 안력을 돋워 주렴 너머를 응시했다.
하나 곧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천잠사인가?’
주렴 너머로 보이는 백리소는 면사를 쓰고 있었는데, 내력을 돋운 주운의 눈에도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특수하게 제작된 것임에 틀림없었다.
재료는 분명 천잠사일 터, 그것 외에는 내가고수의 눈이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쉽게 얼굴을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것인가?
주운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낯익은데?’
비록 윤곽만 보이지만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물론 오 년 전에 오가다 한두 번 정도 보았을지도 모르나 그녀를 대하고서부터 느껴지는 이 기이한 불안감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나 주운은 오래 생각할 여가가 없었다.
“그대인가요?”
주렴 너머에서 맑고 청아한 음성이 들려왔다.
“무엇이 말이오?”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주운은 내심 짐작되는 것이 있었지만 짐짓 모르는 척 되물었다.
“알고 계시리라 믿어요.”
한데 백리소는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말을 들었다면 어이없어 하거나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러나 주운은 그럴 수 없었다.
‘과연 심기가 깊은 여인이군.’
만약 그녀가 솔직하게 용건을 말했다면 발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화법은 조금 독특했다. 상대로 하여금 무언가 숨기는 것을 알고 있다는 어조로써 먼저 술술 불도록 유도하는 힘이 있었다.
여기서 주운이 덥석 미끼를 물어 ‘나에게는 당신이 말하는 것이 없소’라고 대답했더라면…….
‘이거 조심해야겠는데?’
주운은 내심 긴장의 끈을 다잡으며 몽롱한 정신을 일깨웠다. 아주 미비한 변화라 겉으로는 계속 히죽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나는 잘 모르겠소만. 당신이 뭘 알고 있는지 알려 줄 수 있겠소?”
그러자 한동안 방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런가요?”
한참이나 말이 없던 백리소가 말했다.
“좋아요. 과연 전 무영십익 중 일익답군요. 술에 쩐 모습이기에 약간 실망했었는데 내가 잘못 봤군요.”
‘어떻게?’
그 말에 주운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 잠깐의 기다리는 동안 자신에 대한 신상 기록을 찾아낸 백리소의 능력에 대한 놀라움이 속에서 들끓었다.
“그렇게 인상 쓸 것 없어요. 내가 누군지는 이미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해요.”
“아무리 군사라 해도 사적으로 누군가의 정보를 빼 오는 것은 성의 방칙에 어긋나는 것으로 알고 있소.”
“하지만 사적으로 치부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건 당신의 생각…… 아!”
주운은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술기운에 정신이 또렷하지 못해 즉각 반응한 게 실수였다.
보기 좋게 한 방 먹었다.
나직한 백리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요. 그건 내 생각이에요. 그리고 제왕성 군사는 곧 제왕성의 두뇌, 즉 내 뜻은 제왕성의 뜻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에요.”
백리소는 말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말하려 그대를 부른 게 아니에요.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 낮에 문지기에게 보여 주셨다던 그 패를 돌려주셔야겠어요.”
“패? 이것 말이오?”
주운은 품속에 손을 넣어 패 하나를 꺼냈다. 낮에 꺼내 든 패가 아닌 옥으로 깎아 만든 패였다.
“그것은?”
“이건 무영십익의 일원을 뜻하는 무영옥패(無影玉牌)요. 이 소중한 걸 어찌 내놓으라 하시는지?”
주렴 너머로 백리소의 고개가 살짝 아래로 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