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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신위 1권(4화)
第二章 제왕령(帝王令) - 여우를 피해 호랑이 품으로 들어가다.(2)


확실히 무영옥패는 무가지보라 할 수 있었다. 호위를 하느라 따로 무공을 수련할 여가를 낼 수 없는 무영십익을 위해 전대 성주가 친히 만년한옥을 깎아 만든 옥패였기 때문이다. 만년한옥은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운기할 때마다 내공의 증진을 가져다준다.
주운의 저러한 반응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하나 백리소는 냉소했다.
“그대는 내 앞에서 농을 치는 건가요? 그 문지기가 보았던 패는 먹빛의 용이 꿈틀거리는 형상의 묵패라고 했는데, 그대가 꺼내 든 패는 옥빛이군요.”
주운은 히죽 웃었다.
“그 문지기가 뭔가 잘못 보았나 보군요. 내가 낮에 꺼내 든 패는 틀림없는 이 옥패였소.”
백리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볼일도 끝난 듯하니 난 이만 가 보겠소.”
주운은 내 할 말은 다 끝났으니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재빨리 일어나 방문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그러세요. 그나저나 애석하군요. 그대가 사라진 오 년 동안 그대의 노모가 심병을 크게 앓아 몹시 위독하다더군요. 그런데 일자리를 잃었으니…….”
백리소가 걱정스럽다는 듯 나직이 말했다.
“……!”
방 문고리를 잡아 가던 주운의 손이 멈칫했다.
‘지독하군.’
상대의 약점을 꼬집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심보를 느끼지 못할 리 없다.
하지만 주운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문을 열고 나섰다.
문이 열려 있는 틈새로 주운의 나직한 음성이 새어 들어왔다.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고, 또 상관할 생각도 하지 마시오. 내 일은 내가 해결합니다.”
쾅!
문이 거칠게 닫혔다.
“무영일익 주운…….”
주렴 너머로 백리소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곳에서 살아 나왔을까?”
그 죽음의 공간에서…….

***

남해 보타문(普陀門).
수백 년 전 검후(劍后)라는 일세를 풍미한 여고수를 배출한 검문이었다.
그 후 대대로 여중제일고수라 할 만한 여고수가 등장했고, 어느새 뭇 사람들은 보타문의 의발을 이은 여인을 검후라는 별호로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우문영(宇文瑛)은 칠대 검후였다.
이십여 년 전, 온갖 패악을 저지르고 다니던 잔월쌍마(殘月雙魔)를 단 몇 초식 만에 패퇴시키며 나타난 그녀는 천하를 주유하며 무수한 마두들을 처단했다.
그 당시의 신진고수들 중에서도 일약 손꼽히는 고수로 떠오른 그녀의 앞길을 막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그녀의 위명은 가히 하늘을 찔렀고, 그 어떤 사내도 그녀 앞에서는 쉬이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고강한 무공만큼이나 그녀의 미모 또한 대단했던 것이다.
그러던 그녀가 뭇 사내들의 열렬한 구애에도 불구하고 포목점을 하는 평범한 사내와 혼인을 한 것은 일대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구애를 한 자들 중에는 명문가의 후손도 있었고, 또 손꼽히는 대부의 자식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명문대파의 장문제자도 숱했다.
한데도 그녀는 평범한 사내를 택한 것이다.
명예도, 부귀와 영화도 그렇듯 쉽게 버리고.
실로 어려운 결정이었으리라.
하지만 이 일화는 강호 뭇 여인들의 방심을 흔들어 놓기에 남음이 있었다. 아무리 자유롭다 한들 혼처마저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었다. 하기에 그렇듯 연모하는 이와 혼인을 한 우문영의 이야기는 그녀들에게 자그마한 희망의 불씨를 지펴 주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검후 우문영은 지금, 그 시절의 미모는 퇴색하고 만면에 병색이 짙은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주운은 무거운 안색으로 그녀의 손을 그러쥐었다.
“어머니…….”
삐쩍 마른 손가락 사이로 툭 불거진 뼈마디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가슴이 미어졌다.
얼마나 상심하셨기에 이렇단 말인가?
어머니의 초췌한 모습을 보는 것은 아마도 그날 이후 처음인 듯했다.
십 년 전 그날.
‘아버지…….’
웃으면서 옷감을 배달하러 간다던 아버지가 차디찬 시체가 되어 돌아왔을 때, 며칠간 아무것도 못 드신 어머니의 모습이 바로 이러했다.
하나 그때는 금세 훌훌 털고 일어나신 어머니가 지금은 아들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눈조차 뜨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것이다.
부군에 이어 자식까지 잃은 것이 큰 충격이었으리라.
“죄송해요, 어머니. 하지만…….”
주운은 괴로운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표면상으로는 포목점을 하는 평범한 집안이었으나 그 진면목은 대대로 제왕성주를 보필하는 호위무사 가문이었다. 다만 그 특성상 정체를 드러낼 수 없었기에 적자에게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따름이다.
그 비밀은 지켜져야만 했다. 자칫 정체를 밝혔다가는 가족마저 위험에 처할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밖으로나 안으로나.
“운, 미안하네.”
강만석이 조용히 지켜만 보다가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뭐가 말인가?”
주운의 물음에 강만석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자네 어머니의 병환은 내 능력으로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네. 정말 미안하네.”
주운은 힘없이 웃었다.
“그게 어째서 자네 잘못인가? 어머니의 병은 외적인 것이 아닐세. 심병의 원인은 바로 나야. 자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네. 아니, 오히려 자네에게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큰 은혜를 입었군.”
“자네…….”
“그보다 의원은 무어라 하던가?”
강만석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자네 어머니의 원기가 상했다고 했네. 이대로 두었다간 언제 숨을 거두실지 모른다고.”
“원기가?”
“그렇다네. 상한 원기를 회복하려면 영약이 있어야 한다더군. 그것도 웬만한 풀뿌리는 효과조차 없다고 하네.”
강만석은 ‘천년삼왕 정도는 되어야……’라고 말끝을 흐렸다.
주운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천년삼왕이라니?
천년삼왕은 무림인들에게 있어 만년삼왕보다는 못하지만 그 값어치가 상당했다. 한 뿌리만으로 일, 이십 년 내공이 증진되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이 먹으면 무병장수할 수 있는 영초였다.
말이야 쉽지 구하기는 백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보다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그 값어치란 상상을 불허할 지경이었다.
그런 물건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아니, 구할 수 있다 해도 값을 치를 돈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강만석은 그러한 주운의 생각을 읽었음인지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요번에 금원상단(金元商團)에서 대대적으로 산삼을 거래했다고 하네. 그중에 천년 묵은 산삼도 있다고 하니 구하려면 못 구할 것도 없지. 하지만…….”
그 뒷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법했다.
결국 돈이 문제였다.
족히 은 천 냥은 될 천년삼왕이니 말이다.
오 년 동안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 살았던 주운에게 그만한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 한다는 것인데…….

“그대가 사라진 오 년 동안 그대의 노모가 심병을 크게 앓아 몹시 위독하다더군요. 그런데 일자리를 잃었으니…….”

‘아니다. 그녀는 아니야.’
불현듯 떠오른 백리소의 음성에 도리질을 하던 주운은 돌연 눈빛을 빛냈다.
있다!
방도가 있었다.
“이보게, 만돌. 잠시 다녀오겠네.”
주운은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어어? 어딜 가려는 겐가?”
등 뒤로 당황한 강만석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나 주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문을 박찼다.
어머니의 병세가 너무도 깊었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큰 보폭으로 빠르게 걷는 주운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팍 옷자락을 더듬고 있었다.
이윽고 그 손은 단단한 무언가를 꽉 쥐었다.

“자네가 무영일익 주운인가?”
그 물음에 주운은 대꾸 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직 채 술기운이 가시지 않아 할 수 있는 대담한 행동이었다.
장대한 체구, 각진 턱 아래 짧게 다듬은 수염, 불룩 튀어나온 광대뼈. 일견 강퍅한 인상이었지만 약간 위로 치켜 선 가느다란 눈썹 탓인지 교활해 보이기도 했다.
태사의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시선만 아래로 내리깔아 다분히 권위적이었다.
하나 이 장년인의 신분은 그 모든 것을 납득하도록 하는 힘이 있었다.
주운은 그가 누군지 잘 알았다.
“제가 무영일익 주운입니다.”
작금 제왕성의 유일무이한 주인.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성주님.”
바로 전륜검군(轉輪劍君) 연궁천이었으니까.
전륜이란 말 그대로 연궁천의 무공은 고절하다.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는 구주십팔좌(九州十八座) 중에서도 손꼽히는 절대강자였다.
그렇지만 정도를 걷는 자치곤 손속이 잔인하고 성품이 조포(粗暴)하여 인망이 그리 두터운 편은 아니었다.
주운이 대답하자 연궁천은 즉시 물었다.
“그래, 제왕령을 가지고 있다고?”
급한 성미 대로 거두절미,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내는 것을 보아하니 그 사실에 틀림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제왕령은 틀림없이 제 수중에 있습니다.”
주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 줄 수 있겠는가?”
다급히 말하는 연궁천의 눈에 탐욕의 빛이 어렸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동안 제왕령이 없어 반쪽짜리 권력만 가진 채 성주 노릇을 하느라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한데 느닷없이 자신을 지금은 해체된 무영십익 중 일익이라 밝히며 제왕령을 가지고 있다는 자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이제 그것만 손에 넣으면 완벽한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되는 것이다.
“그전에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그렇습니다. 제왕령을 보여 드리는 조건으로 병석에 누워 계신 제 어머니의 병세를 완치할 모든 비용과 그 후 한 달 주기로 평생 동안 은자 열 냥을 지급할 것을 보장해 주십시오.”
“무어라?”
연궁천이 가뜩이나 곤두선 눈썹을 치켜세웠다.
은자 열 냥의 가치는 대단했다. 대략 은자 두 냥이면 쌀 한 섬을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연궁천의 입장에서는 딱히 큰돈이라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어머니의 병세라 해 봤자 그리 대수로운 것은 아닐 것이었다. 주운의 나이는 어림잡아 스물하고 두셋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일찍 혼인을 하는 관습 탓에 지천명을 겨우 넘어섰을까 말까 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나이의 사람은 잘 요양하고 잘 먹으면 쉬이 기운을 차리게 마련이었다.
결론적으로 실보다 득이 많다.
“좋다. 너의 조건을 받아들이겠다.”
연궁천은 흔쾌히 약조했다.
“감사합니다.”
주운은 품속에서 제왕령을 꺼내어 연궁천에게 잘 보이도록 높이 들면서 내심 웃었다.
‘과연 신검연가에서도 가주의 재목이 아니라고 할 만큼 어리석군. 한 집단의 우두머리란 자가 탐욕에 젖어 이성적인 판단을 잃었으니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구나.’
또 한편으로는 전대 성주의 죽음이 못내 안타까웠다.
진정한 군주의 덕목을 전부 갖춘 이의 죽음은, 한때 그를 보필했던 주운에게는 수하로서도, 친우로서도 울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 오오. 진정 제왕령이……!”
연궁천은 주운의 손에 들린 제왕령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쳤다.
“진정하시지요.”
그러자 주운은 잽싸게 손을 거두어 제왕령이 안 보이도록 손바닥을 뒤집었다.
“크, 크흠.”
추태를 부렸음을 깨달았는지 연궁천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래, 내 너의 조건을 들어주겠노라 약조하였으니 이제 제왕령을 이리 주거라.”
“물론 제왕령은 성주님의 수중에 놓일 것입니다. 하나 그전에…….”
그전에?
또 무엇이 남았단 말인가?
연궁천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말해 보거라.”
“저를 복직시켜 주십시오.”
“복직?”
“예. 저는 본래 무영십익 중 일익이자 전대 성주님을 보필했던 호위무사입니다. 그런데 제가 없던 오 년 사이에 퇴직 처리가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