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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신위 1권(8화)
第三章 격일호위(隔日護衛) - 뜻하지 않은 일을 당하다(4)
“그만두게.”
“예? 하지만!”
“그만하면 되었네. 어차피 줄행랑 놓기로 작정한 이들을 추격하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네. 그보다 자네는 다른 큰 문제에 봉착해 있지 않나?”
연궁천이 마치 놀리듯 입매를 비틀면서 말하자, 주운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잊지는 않았겠지?”
연궁천이 빙긋 웃었다.
“내 한 가지 조건을 걸겠네. 조건 내용은 바로 묵검과 자네, 둘이서 격일로 나를 호위하는 것일세. 기간은 한 달. 만에 하나 자네가 그 기간 동안 나에게 아무런 위해 없도록 잘 호위한다면 자네를 묵검 대신 내 호위무사로 두도록 하겠네. 어떤가?”
어찌 잊었겠는가?
연궁천의 조건을 떠올리며 주운은 가슴속에 천근석을 들여놓은 양 마음이 무거웠다.
“이렇게 하세. 자네가 비록 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했으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것을 보니 파직은 조금 미안하군. 하여 내 그동안 자네의 노고를 높이 사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자네만 원한다면 비록 내 호위무사로 둘 수는 없으나 호남지부 무사 자리를 마련해 주겠네. 자네가 직무 중 음주를 한 것을 생각하면 아주 파격적이지 않은가?”
연궁천은 모처럼의 선심이라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호남지부 무사라고?’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주운의 심경은 참담무비했다.
말이야 좋지 그야말로 죽으러 가란 소리가 아닌가?
연궁천의 시커먼 속내를 읽지 못할 주운이 아니었다.
호남지부는 천사련과의 접전선.
명백한 사지(死地)다.
계륵을 처리하는 데 이만한 묘책이 또 있으랴?
“알겠습니다.”
그런 연궁천의 제안은 지극히 어처구니없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운으로서는 묵묵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 아비는 이 일이 참으로 좋단다. 앞으로 네가 아비의 뜻을 이어 어엿한 호위무사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구나.”
귓전을 울리는 아버지의 음성.
성주를 호위하는 일에 그토록 큰 자부심을 여과 없이 말씀하시곤 했던 아버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당부를 지켜내려면 이것밖에 없었다.
‘하. 좋은 일은 혼자 오고 나쁜 일은 혼자 오는 법이 없다더니, 정말이었군.’
주운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하늘의 구름은 다시 짙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중천에 우뚝 서서 타오르는 태양은 더더욱 뜨겁게 몸을 불살랐다.
어쩌면 마지막 발악일는지…….
第四章 좌천(左遷) - 그는 호걸 중의 호걸이었다(1)
그날.
순순히 자신의 제안에 응하는 주운의 모습에 연궁천은 속으로 희희낙락하며 표홀히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연궁천도 미처 알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주운을 제외한 다른 무영십익에 비하면 그나마 주운의 처지가 조금은 더 낫다는 것을…….
참담함에 홀딱 젖은 주운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날 밤 강만석과의 술자리에서였다.
꿀꺽, 꿀꺽!
“크으! 그래, 언제 출발하는 겐가?”
시원하게 한 잔 들이켠 강만석이 물었다.
“아마 며칠 내로 연통이 오겠지.”
주운은 고소를 머금었다.
오 년 만에 돌아온 것이 엊그제 같건만 고작 두 달도 채우지 못하고 다시 외지로 떠나야 한다니.
입맛이 썼다.
강만석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허, 거 비 맞은 생쥐 꼴이 다 되었군 그래. 그래도 자네는 우리 중 가장 낫구먼.”
“가장 낫다니?”
“말 그대로일세. 전에 말했던 적이 있었을 거야. 나를 비롯해 반가, 지가 놈이 각기 내원삼대의 대주나 집법부의 부주가 된 것 말일세. 그건 그동안 보필했던 원로원(元老院)의 태산노사(泰山老師), 목검자(木劍子), 마옥진인(馬鈺眞人)께서 뒷배를 봐주신 덕분이었네. 하나 다른 놈들은 죄다 파직되어 지금은 귀향하여 논밭이나 갈고 있다고 하네. 그러니 자네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 천운이 따랐다 할 수 있지 않겠나?”
주운은 마치 잘못 들은 것처럼 되물었다.
“그 녀석들이 파직되었다고?”
강만석은 그렇다고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군.”
주운의 말에 강만석도 석연찮은 듯 뺨을 긁으며 말했다.
“하긴 그놈들의 파직은 지금 생각해도 조금 이상한 감이 없잖아 있었네.”
“그게 뭔가? 혹시 연궁천이 관련되어 있나?”
강만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니지만 누군가 손을 쓰긴 했지.”
주운은 그제야 감이 잡혔다.
“백리소?”
강만석이 꿀꺽! 술을 들이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러네. 내 알아본 바, 모두 군사가 뒤에서 지시한 것임을 알게 되었네.”
주운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백리소, 백리소라!’
그러고 보니 자신과 관련된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군사 백리소가 있었다.
‘혹시 이번에도?’
그때 그 다섯 복면인들로 하여금 연궁천을 치라고 지시한 것이 백리소가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나 곧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버렸다.
‘아니다. 그렇다고 보기엔 술수가 너무도 허술해. 그토록 무서운 심기를 소유한 여인이 조금만 머리를 굴려도 들통 날 어리석은 짓을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발적으로 연궁천을 노렸던 것일까?’
그것도 조금 미심쩍었다.
그처럼 능숙한 합격진을 구사하는 이들을 사주할 만한 인물은 많지 않다. 그중 가장 유력한 대상은 바로 군사 백리소였다.
‘혹시?’
그러던 주운은 벼락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가지 가능성에 눈빛을 빛냈다.
‘이 모든 게 연궁천의 계략이라면?’
그러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처음 주운을 대면했을 때부터 꺼리는 듯하던 반응과 죽어라 멀찍이 떨어뜨려 놓고자 하던 것 하며,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타났다가 주운이 당도하자 적당히 어울려 접전을 벌이고는 표홀히 사라진 것.
‘단지 눈엣가시를 뽑고자 그와 같은 치밀한 계략을 짰단 말인가?’
주운은 새삼 연궁천의 악독함에 절로 치가 떨렸다.
그러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던가?
주운의 눈빛이 되살아났다.
‘두고 봐라, 연궁천. 나 주운이 겨우 이 정도로 포기할 성싶은가? 겨우 이 정도로 무너질 졸장부인 줄 알았는가? 기다려라, 연궁천. 그 편협한 뇌리에 똑똑히 새겨 주지.’
무영일익 주운이란 이름을!
술잔에 가득 담긴 술에 비친 주운의 눈은 흡사 생사대적을 눈앞에 둔 것처럼 한광(寒光)이 흐르고 있었다.
다음 날.
주운은 제왕성을 벗어나 호남으로 향했다.
물론 무작정 길을 나선 것은 아니었다.
언제 되돌아올지 모를 긴 여정이 될 터였다. 한 번 말도 없이 떠났던 전적이 있어 만에 하나라도 귀환이 늦어질 것을 대비하여 훗날의 재회를 약조할 몇 안 되는 이들을 만났다.
“형, 이번에는 일찍 돌아올 거지?”
콩알, 장두 녀석은 전에 당한 것이 있어서 그런지 음성에 차마 숨길 수 없는 불안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오라버니…… 몸조심하셔요.”
한두 해가 더 지나면 능히 그 아름다움이 꽃이 만개하듯 활짝 피어올라 뭇 사내들의 애간장깨나 태울 법한 장소하도 염려스러운 눈길로 나지막이 말했다. 그 눈빛이 너무도 애처로워 억지로나마 웃어 주었다.
그리고 어머니 우문영.
그녀는 연궁천이 건네준 천년삼왕을 달여 마신 후 느리지만 확실히 차도를 보였다.
이제는 병석에서 일어나 소일거리를 할 정도였다.
“후우.”
주운은 어머니를 떠올리자 깊은 한숨을 불어 내쉬었다.
아버지, 주원명(周原命)에 이어 아들 주운마저 달리 기약할 수 없는 길을 걷고야 말았으니, 오죽 걱정이 태산과 같지 않으랴?
주운은 거대한 호랑이가 웅크린 듯 웅장한 위용을 여과 없이 뿜어내는 제왕성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자기 대신 많은 일을 떠맡게 될 강만석을 떠올렸다.
“뒷일을 부탁한다.”
친우여.
***
장사(長沙).
예로부터 수륙 양로의 교통 요지이며 병가의 필생지지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수륙 교통이 매우 발달하여 천하 각지의 온갖 진귀한 산물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상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비단 그뿐만이랴?
제왕성과 천사련의 접전지라 그런지 나무가 숲을 이루듯 제각기 검, 도, 창 등을 소지한 무수한 무인들이 거리를 활보하여 앞서 열거된 평소의 장사와는 대조된 팽배한 긴장감이 장사 땅 전역에 드리워져 있었다.
호남지부 대청 안.
호화로운 장식품과 서화가 고루 배치되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불러일으키건만, 주운의 안색은 먹구름이 낀 양 어두웠다.
주운이 오늘부로 호남지부 척사대(斥邪隊) 제십팔조의 조장으로 부임되었다는 내용이 간략하게 적혀 있는 제왕성주의 직인이 찍힌 명령서를 훑어본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심히 즐겁다는 빛이 만연했다.
“그래, 이름이 주운이라고?”
주운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내는 킬킬 웃으며 말했다.
“나는 척사대 대주 조아봉(趙阿逢)이네. 잘해 보자고, 신입 조장.”
웃음소리와 함께 조아봉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측한 흉터가 씰룩였다.
구면.
그것도 지독시리도 악연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아봉은 바로 일전에 주운에게 흠씬 얻어맞고 달아난 흉터 사내였다.
장두와 장소하 남매를 괴롭혔던 흉터 사내를 혼쭐내 버린 것이 돌고 돌아 뜻밖의 곳에서, 뜻밖의 신분 차로 주운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여러모로 불리한 형국이 아닐 수 없었다.
“예까지 오느라 피곤할 텐데 여독이나 풀게나. 쉬엄쉬엄하게, 나중을 위해…….”
조아봉은 그렇게 말하며 낄낄거리고는 주운의 어깨를 소리 나게 두어 번 두드리더니 휑하니 나가 버렸다.
어깨가 저릿했다.
조아봉이 두드린 어깨였다.
‘하긴 그렇게 두들겨 팼으니 악감정이 안 생길 리 없지.’
방금 전, 조아봉이 주운의 어깨를 두드린 그 한 수에는 음험한 암경(暗勁)이 실려 있었다. 비록 화후가 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일반인이라면 대번에 어깨뼈가 바수어질 위력이었으며, 일신의 무공이 진경에 이르지 못한 자도 족히 십여 일은 요상해야 정상적인 거동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나,
“이 정도야 우습지.”
주운이 한 모금의 진기를 마시고 어깨를 이완하자 기묘한 소리와 함께 어긋났던 어깨뼈가 제자리를 찾아들어 갔다.
뚜둑!
말이야 쉽지, 암경을 격중당한 상태로 어긋난 뼈를 다시 맞추는 것은 그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순식간에 암경을 해소하는 이 수법을 무림에 이름깨나 날린다는 고수들에게 보여 줬다면 아마 다들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었다.
더군다나 아무런 내상도 입지 않았음에야.
“앞으로 고달프게 생겼군.”
그러나 정작 경악을 금치 못할 신기를 선보인 주운은 골치깨나 아프다는 얼굴로 한숨이나 쉬고 있었다.
빌어먹을 상관을 두었다고.
그와 같은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무림인들로서는 큰 위안거리가 되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주운은 바빴다.
누가 함부로 말을 걸 수조차 없을 정도로 바빴다.
하나 정작 그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은 물이 가득 찬 나무로 만든 잔이었다.
심지어 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 손수 기막(氣幕)까지 둘러쳤다. 맨 정신이었으면 이러지도 않았을 테지만 주운은 항상 술독에 빠져 살았다. 강호인들이 봤더라면 기가 막혀 버렸을 고도의 수법을 고작해야 물 잔에 써야 할 정도로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나무 잔에 물을 떠오는 것.
이 해괴한 일을 하는 원인은 바로 조아봉의 명령 때문이었다.
“하다하다 이제 이런 것까지 시키는군. 가뜩이나 술 마실 시간도 부족해 죽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