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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신위 1권(9화)
第四章 좌천(左遷) - 그는 호걸 중의 호걸이었다(2)
그도 그럴 것이 주운이 이처럼 물이 가득 찬 잔을 조아봉에게 대령하기 전에도 별의별 성가신 일들을 숱하게 겪었던 까닭이다.
하루는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 우물이 메말랐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물을 길러 오라 하고, 또 하루는 지부의 일류 숙수가 만든 음식이 맛없다며 장사제일의 객잔인 장성루(長成樓)의 음식을 가져오라 쓸데없는 명령을 내리는 등.
고의성 다분한 억지 명령을 수두룩하게 쏟아내었다.
그 피해는 온전히 주운의 몫이 되었다.
지극히 소심한 보복.
그러나 그것도 오늘로 끝인 듯했다.
“마침 악록산(岳麓山) 부근에서 수상한 무리를 보았다는 급보가 들어왔더군. 어디, 이참에 자네의 실력을 발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모쪼록 조심해서 다녀오게.”
두셋도 아니고 고작 일개 조만 보낸단다.
자칫 진짜 천사련의 무리들이 건너와 악록산에 주둔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다면 꼼짝없이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일진대 구태여 십팔조만 보내는 저의가 무엇이겠는가?
‘드디어 본심을 드러내는 건가.’
조아봉 자신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으니 정보가 잘못되어 허탕을 쳐도 좋고, 만에 하나라도 진짜 천사련의 무리여도 피 튀기게 싸우다 장렬히 산화하면 그만이라는 심산일 터였다.
모 아니면 도.
이렇거나 저렇거나 아무렴 눈 하나 깜짝할까.
하지만 그런 조아봉이 미처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동안 말도 안 되는 짓거리에 장단 맞추느라 찌뿌드드했는데, 마침 잘됐군.’
바로 주운이란 존재를 말이다.
주운은 흘러내린 머리를 쓸며 고개를 들었다.
“이런 날에는 화주 한 병에 동파육이 딱인데…….”
온통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
땅거미가 내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소슬한 바람결에 머리카락이 춤을 춘다.
완연한 가을의 문턱.
그 문턱과 동시에 첫 출정의 날이 성큼 다가왔다.
조아봉의 뒤를 따라 도착한 그리 넓지 않은 방 안에는 이제부터 주운의 지시를 받을 다섯 명의 사내가 있었다.
척사대의 열여덟 조 중 하나인 십팔조의 전원이었다. 그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가 문소리가 들리자 그쪽으로 눈을 굴렸다. 하지만 곧 관심을 끊고 자기 할 일에 몰두했다.
주운이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뒤이어 조아봉의 모습이 비치자 그들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일어서서 조아봉 앞에 도열했다.
그들의 면면을 말없이 훑어보는 주운. 알록달록한 화의부터 해어진 넝마 쪼가리까지 행색이 다양했다.
‘가관이군.’
주운이 보기에 이들은 아직 젖비린내도 채 씻어내지 못한 핏덩이들이었다. 애들을 데려가라고? 하는 시선으로 조아봉을 쳐다보니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릴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제야 주운은 깨달았다. 십팔조는 급조된 것이었다. 한눈에도 그들이 전혀 유대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서로 떨어져 있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십중팔구 오합지졸.
‘이런 놈들을 휘하에 두고 출정을 하라니…….’
주운은 가슴속에 천근석이 들어참을 느꼈다.
조아봉의 의도는 보나마나 뻔했다.
“저들은 새로 부임한 자네를 위해 내 친히 척사대에서도 실력 있는 자들로 선별한 인물들이네.”
실력 있는 자들이 아니라 골칫덩이들이겠지.
한 조당 사십여 명에 달하는 다른 조들과는 달리 고작해야 다섯 명인 인원수만 보더라도 답이 나왔다. 적잖이 부당한 처사였으나 애석하게도 위에서 까라는 대로 군말 없이 이행하는 것이 아랫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여태껏 아무 말 없다가 이제야 이들을 소개시키는 것으로 조아봉의 악독한 심보를 뼈저리게 절감할 수 있었다.
주운은 대강 어림짐작하면서 맨 왼쪽에 껄렁껄렁한 자세로 서 있는 놈에게 시선을 던졌다. 맞바로 불량한 놈의 시선이 지지 않고 주운의 시선과 격돌했다.
비로소 주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잡석들 틈에서도 그나마 괜찮은 원석이 하나 있었다. 비록 모나고 우둘투둘하여 다소 거칠고 제값을 할는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주운은 다시 시선을 옮겼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넝마 쪼가리를 걸치고 드러난 살갗이란 살갗은 죄다 땟국물이 줄줄 흘렀다. 주운보다 족히 열 줄은 위로 보이는 거지 장년인이 시선을 받자 누렇게 뜬 얼굴로 싱글벙글 웃어 보였다. 제 딴에는 잘 보이려는 양.
마지막으로 주운의 시선이 거지 장년인을 지나쳐 맨 오른쪽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느낌상이 아닌 한눈에 보기에도 아직 채 약관도 되지 않은 홍안의 소년이 보였다. 가뜩이나 여장을 하면 낯가림 심한 소녀라고 해도 껌뻑 믿을 법한 곱상한 외모에 알록달록한 화의까지 곁들어지니 그야말로 여자였다.
잠시 스치듯 훑어본 나머지 두 사람은 그저 쌍둥이란 것만이 특이할 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외모 탓에 흥미조차 동하지 않았다.
주운은 말없이 조아봉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하고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출정이다. 일각 주겠다. 시간 내로 챙길 것 다 챙기고 성문 앞으로 집결하라.”
그러자 처음 주운의 시선을 받았던 껄렁껄렁한 염소수염 놈이 아니꼬운 듯 입매를 비틀며 물었다. 취기가 잔뜩 오른 주정뱅이가 해봤자 어쩔 거냐는 눈이었다.
“만약 늦으면?”
“늦으면…….”
술병을 입에 대어 가던 주운이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은 얼굴로 말끝을 흐리자 십팔조 조원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죽는다.”
그 말을 내뱉고는 씨익 웃는 주운을 바라보는 조원들은 등골을 타고 싸한 한기가 스멀스멀 기어오름을 느꼈다.
분명 웃고 있으나…….
그들을 응시하는 두 눈에는 실로 형언키 어려운 빛이 흐르고 있었다.
수천 수만 명을 도살한 지옥의 수라(修羅)나 가졌을 법한 살기가.
그들이 알 리 없었다.
진정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자가 눈앞에 있음을…….
일각 후.
“다 모였나?”
총 다섯 명밖에 되지 않는 조원이다. 구태여 묻지 않아도 될 테지만 주운은 물었다.
…….
대답은 없었다.
한순간이나마 압도되었다는 데 대한 반항심인가?
그도 아니면 극한의 두려움을 겪어 자연적으로 싹 틔운 경계심에서일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출발한다.”
중천에 걸린 뜨거운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척사대 제십팔조의 출정이 시작되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악록산.
을씨년스러운 바람에 단풍으로 붉게 물든 악록산이 마치 옷깃을 여미듯 더욱 몸을 웅크린 채 그들을 굽어보았다.
***
반나절이 흘렀다.
땅거미가 지고 소슬했던 바람이 한층 싸늘해지자 주운을 비롯한 척사대 십팔조는 모닥불을 피워 휴식을 취했다.
긴장 때문일까?
그들의 만면에는 피로의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 주운은 처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담담한 얼굴로 바람결에 흔들리는 모닥불에 마른 잎사귀를 던져 넣으면서 독한 화주를 쉼 없이 들이켜고 있었다.
일신의 무공에서도 물론이거니와 지닌바 경험으로도 조원들과는 그 차이를 측량키 어려웠다. 게다가 조원들과 달리 주운은 긴장이라 할 만한 것은 하지도, 구태여 할 필요도 못 느꼈다. 술기운이 올라 담이 커진 이유도 약간 있었지만.
천사련.
그리고 사방이 탁 트인 산속.
감히 불회곡에서의 하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천사련에 속해 있는 자들도, 그 지옥에서 끊임없이 피와 살을 탐닉하던 망자들과는 비기기는커녕 하룻강아지보다 못한 존재일 따름이다.
타닥!
나무 막대로 모닥불을 들쑤시던 주운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눈매가 탁 풀려 있었다.
“여기 막내가 누구지?”
내심 가장 구석에 앉아 있는 홍안 소년이겠거니 생각하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일까?
“…….”
눈만 데굴데굴 굴려 눈치만 보는 십팔조.
그러다가 거지 장년인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제, 제가 막내입니다.”
한눈에도 삼십 줄은 되어 보이는데 막내란다.
주운의 한쪽 눈썹이 치켜졌다.
“장난하면 맞는다, 알겠나?”
그렇게 말하면서 나무 막대를 가볍게 모닥불에 쿡! 찌르고는 도로 빼내었다.
칡뿌리가 우수수 딸려 나왔다.
모닥불을 피우기 전에 미리 넣어 두었던 것이다.
구운 칡뿌리의 향긋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꿀꺽!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하는 가운데,
“막내, 하나 집어 가라. 동작 봐라! 빠릿빠릿하게 못 움직이나? 너 하나 때문에 전원 다 굶을 수는 없잖나?”
주운이 버럭 소리쳤다.
거지 장년인은 화들짝 놀라 화급히 나무 막대에 꽂혀 있는 칡뿌리를 뽑아 들었다. 막상 먹을 것을 앞에 두니 허기진 배가 아우성쳤다.
그러고는 거지 장년인이 행여나 아까운 칡즙 한 방울이라도 헛되이 흘릴까 조심스레 한 입 베어 물 찰나.
피슛!
날카로운 파공음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오더니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거지 장년인의 몸이 맥없이 고꾸라졌다.
“……!”
모닥불의 온기와 주운의 입담에 한결 긴장이 풀려 있던 조원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이런 제기랄!”
주운은 나직한 욕설을 내뱉었다.
화살.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정확하게 거지 장년인의 미간을 뚫고 뒤통수로 삐죽이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다.
즉사다.
주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방금 전만 해도 살아 있었다. 미처 자신의 죽음을 모르고 있었는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듯 웃는 얼굴 그대로 죽은 것이다.
한 손에는 여전히 칡뿌리를 꽉 쥔 채.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주운은 마치 거지 장년인의 죽음이 자신의 탓인 양 자책했다. 떨리는 손으로 거지 장년인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화살 쏜 놈이 어디 숨어 있는지 눈 감고도 알 수 있었다.
‘등 뒤.’
거지 장년인은 바로 주운의 앞에 서 있었으니까.
하나 구태여 찾는 수고로움을 할 필요도 없이,
처척! 처처척!
절도 있고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주운을 비롯한 십팔조를 중심으로 에워싼 무사들.
대략 눈짐작으로도 삼십여 명은 되어 보이는 인원이 제각기 한 손에는 활을, 어깨에는 화살이 가득 들어 있는 시복(矢腹, 화살집)을 메고 있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주운이 외쳤다.
“산개(散開)!”
그러나 조원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것과는 달리 주운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주운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검초째로 먹빛 검이, 왼손에는 칡뿌리가 그대로 박혀 있는 나무 막대가 들려 있었다.
“저 녀석이 죽어서도 놓지 못한 칡, 네놈들이 대신 찌꺼기 하나 남기지 말고 다 먹어 치워라!”
돌연 칡뿌리가 경력의 소용돌이에 산산이 조각나더니 허공으로 비산했다.
퓨퓨퓨퓻!
수십 개의 칡뿌리 조각이 이십여 장의 거리를 격하자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던 무사들 사이에서 처절한 비명이 야공(夜空)을 찢어발겼다.
“케케켁!”
“케엑, 켁!”
칡뿌리가 산산조각 나는 기이한 광경에 넋 놓고 입을 헤벌리고 있던 무사들의 목구멍으로 칡뿌리 조각이 사정없이 틀어박혀 숨이 콱 막힌 것이다.
순간적인 기지로 발휘한 칡뿌리 조각 뿌리기는 어느 훌륭한 암기 못지않은 위력을 동반했다.
“이런 머저리 같은 놈들! 어서 쏴라! 쏴!”
그때 무사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텁석부리 수염이 곡도(曲刀)로 주운과 조원들을 가리키며 고함쳤다.
피피피피핏!
그와 동시에 주운과 조원들이 서 있는 일대에 어마무지한 화살의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모두 모여!”
주운의 명령에 조원들이 허겁지겁 곁으로 모여들었다.
따따다다다당!
한바탕 요란한 금속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
그리고 기묘한 적막이 맴돌았다.
“이, 이럴 수가?”
그 정적을 깬 것은 무사들의 수장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치뜨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망막에 맺힌 것은…….
“거, 검막(劍幕)이라니?”
휘황한 금빛 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