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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신위 1권(10화)
第四章 좌천(左遷) - 그는 호걸 중의 호걸이었다(3)
원형으로 이루어진 반투명한 막이 주운과 조원들의 반경 일 장 밖에 둘러져 있었다. 그 주위에는 방금 전 무사들이 쏘아댔던 수백 발의 화살이 수북이 쌓인 채.
“조, 조장님, 이게 대체?”
놀란 것은 수장만이 아니었다. 조원들 역시 경악 어린 시선으로 입을 헤벌리고 멍청히 주운을 바라보았다.
모두의 놀라움을 해소시킬 의무를 느꼈음인가?
주운이 먹빛 검을 회수하며 말했다.
“뭐긴 뭐야, 열나게 칼 휘두른 거지.”
술김에 나온 말이라 다소 황당했다.
같은 검도(劍道)에 종사하는 홍안 소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농담이 나오세요?”
“농담 아냐. 한 호흡에 구십구 번의 칼질만 할 수 있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쉬운 기술이다.”
“…….”
“설마 내가 시답잖은 농지거리나 할 사람으로 보이냐?”
홍안 소년은 크게 눈을 치뜨며 묻는 주운의 말에 차마 그런데요? 라고 할 수는 없어 그저 고개를 홱 돌렸다.
“어쨌거나 이제 어쩌죠?”
다른 조원들도 같은 물음을 얼굴에 띄웠다.
“어쩌긴, 강행 돌파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운의 신형이 전광석화와 같이 쏘아져 나갔다.
조원들은 죽상을 하며 지면을 박찼다.
주운은 힐끗 돌아보더니 조원들이 제각기 산개하여 무사들을 향해 돌진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발끝으로 땅을 톡 쳐 속도를 높였다.
목표는 중앙에 서 있는 수장의 목이었다.
“흥, 어림없다!”
수장은 짧게 코웃음을 치더니 크게 한 입 진기를 마시고 곡도를 일도양단의 기세로 마주 쳐 냈다.
쾅!
폭음이 터지며 풀풀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뚫고 한 인영이 빠르게 쏘아져 나뭇등걸에 처박혔다.
“쿨럭!”
검붉은 핏덩이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검은 수염이 선혈에 젖어 붉게 물들었다.
수장이었다.
뜻밖에도 수장은 질끈 묶은 머리카락이 까치집처럼 뻗쳐 있었고 앞섶이 찢겨져 드러난 탄탄한 근육질의 가슴에서는 흉측한 입이 쩌억 벌려져 내장이 삐죽 흘러내렸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또 있으랴.
“대, 대체……. 크허윽!”
수장은 이루 형용키 어려운 시선으로 천천히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주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주운의 오른손에 들린 먹빛 검을 향해.
어둠 속에서 검붉은 요요(妖妖)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흡사 무저의 끝에 존재한다는 지고한 어둠 같다.
그 검붉은 날에 새겨진 두 글자.
묵궁(墨穹)
마침내 광명(光明)을 먹고사는 마물이 세상의 빛을 보았다.
당장에라도 달빛을 모조리 집어삼킬 듯 사나운 검명(劍鳴)을 토하며…….
수장은 간헐적으로 숨을 헐떡이면서도 쥐어짜 물었다.
“대, 대체 그건, 쿨럭! 무슨…… 초, 초식이었지?”
주운은 오연한 시선으로 짤막하게 내뱉었다.
“묵야섬(默夜閃).”
고요한 밤에 홀연히 피어오르는 한 줄기 섬광.
“그, 그건…… 설마 흑천마검(黑天魔劍)의……?”
주운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수장의 안색에서 핏기가 사라져 버렸다.
마도제일검(魔道第一劍) 흑천마검 비천성(費天成).
오 년 전 정마대전 때 사라졌다던 그의 성명절기를 쓰는 이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도 채 듣지 못하고 수장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그만큼 심각한 상세를 입고도 제때 지혈조차 하지 않아 절명한 것이다.
주운은 심유한 눈으로 묵궁을 털었다. 칼날을 타고 핏방울이 비산했다.
“갈 길이 바빴나 보군. 그 다음은 염왕이 알려 주겠지.”
그러면서 주운은 납검(納劍)했다. 검붉은 검신이 미끄러지듯 검초를 타고 철컥!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주운은 화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캬아! 어디, 다른 데도 좀 쑤셔 볼까?”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묵궁을 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주운이 한 발 내딛는 순간,
스스스―
주운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그라졌다.
카앙!
“크읍!”
야공을 찢어발기는 금속성이 울려 퍼진 것과 동시에 억눌린 신음성이 잇달아 꼬리를 물고 새어 나왔다.
“우윽!”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상대와 부딪친 것일까?
우둘투둘 톱니처럼 이가 잔뜩 빠진 검을 떨리는 오른손으로 쥔 채 홍안 소년은 금시라도 풀썩 쓰러질 듯 후들거리는 다리를 왼손으로 부여잡아 용케도 버티고 서 있었다.
불과 몇 걸음 앞, 피 칠갑한 홍안 소년의 섬뜩한 몰골에 세 명의 무사들이 질렸다는 듯 와락 인상을 굳혔으나 천천히 다가오는 걸음을 늦추지는 않았다.
치열한 혼전 가운데 미처 다른 데 신경을 쓸 여가가 없었던지라 그들의 수장이 이미 주운의 칼날 아래 고혼(孤魂)이 되었음을 몰랐던 탓이다.
때문에 만일 알았더라면 일찌감치 사태의 심각함을 느끼고 후퇴했겠지만 몰랐기에 더욱 약이 바짝 올라 있었다.
“흐흐. 이놈, 그런 꼴이 되어서도 어디 좀 전같이 미꾸라지처럼 쑥쑥 빠져나갈 수 있을 성싶으냐?”
“얌전히 목 내밀고 어르신의 칼을 받아라!”
무사들이 음산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다가왔다.
“크윽!”
홍안 소년은 입술을 짓깨물었다.
고작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었다.
겨우 저런 놈들의 칼에 목숨이 좌지우지되려 배운 무공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여기서 눈을 감아야 한다니.
말도 안 되었다.
정녕 이렇게, 이토록 볼품없는 꼬락서니로…….
어찌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난 아직 죽을 수 없단 말이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처절한 고함을 내지르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크고 작은 상처로 끊임없이 피가 흘러,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쳐 흐릿해진 눈을 억지로 부릅떠 정면을 노려보았다.
입매를 비틀어 노골적으로 비웃는 세 명의 무사는 손에 든 검을 흔들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사냥감을 여유로운 몸놀림으로 서서히 압박하는 맹수인 양 두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살기가 번들거렸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머리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갑게 식어 버렸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
홍안 소년은 얼마 남지 않은 진기를 크게 한 입 마시며 지면을 박차고 신형을 날렸다.
다 죽어 가던 사람이 달려드는 것을 본 무사들의 안색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이, 이놈이?”
하나 그것도 잠시, 무사들은 저마다 어이없다는 듯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마주 검을 휘둘러 갔다.
스파파팟!
경풍(勁風)이 몰아치며 섬뜩한 예기를 줄줄이 뿜어내는 세 개의 칼날 아래 훤히 드러난 홍안 소년의 몸은 금시라도 토막 날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차합!”
그 순간, 낭랑한 기합이 그들의 귓전을 때린다 싶더니 돌연 가운데 무사가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털썩!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그 무사의 턱 아래 드러난 목은 날카로운 무언가에 베인 듯 입을 쩍 벌린 채 선혈을 콸콸 쏟아 내고 있었다.
“……!”
너무도 갑작스런 일이기에 좌우 무사들이 아연한 눈길로 홍안 소년과 쓰러진 무사를 번갈아 보며 눈을 치떴다. 그 눈에는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불신감이 어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독한 외상과 내상으로 움직이기도 어려워 보였던 홍안 소년이 갑작스레 달려들었고, 쾌속하게 바닥을 굴러 그들의 검세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운데 무사의 목을 베는 데는 그야말로 한 호흡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누가 예상이나 하였으랴?
그토록 명예와 체면을 중시한다는 정파의 어린놈이 비루먹은 나귀가 구르는 수치스런 모양새라 부르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절대 상상조차 않는 나려타곤(懶驢打滾)을 펼칠 줄이야!
하지만 그와 같은 놀라움의 눈길을 받고 있는 홍안 소년은 수치는커녕 오히려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한 놈이라도 더 길동무로 삼았으니 형님도 무어라 하시지는 않겠지.’
오 년 전, 제이차 정마대전과 함께 사라져 여태껏 돌아오지 않아 생사가 불명한 형님을 떠올리면서.
“어린놈이 굉장히 독하구나!”
“살려 두었다간 후환이 될 것이 틀림없을 터, 이제 그만 그 질긴 명줄을 끊어 주마!”
두 무사는 살기 어린 외침을 토하고 손에 든 검을 번쩍 쳐들었다. 그 앞에 숨을 헐떡거리며 서 있는 홍안 소년의 몸은 여지없이 두 쪽으로 갈라질 판이었다.
‘끝이구나.’
그렇게 홍안 소년이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려는 찰나,
[전일보(前一步), 좌이보(左二步)! 낙화세(落花勢)!]
낭랑한 음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전음!
‘이것은?’
홍안 소년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한 가닥 의혹이 어린 눈빛이었으나 이내 정수리와 옆구리를 베어 오는 두 개의 칼날을 보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화급히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한 걸음, 좌로 두 걸음, 그리고 떨어지는 매화가 바람결에 살랑이 듯 부드럽게 몸을 흔든다.
쉬쉭!
“……!”
홍안 소년은 두 눈을 부릅떴다.
겨우 몇 걸음, 또 낙화세만으로 그토록 삼엄하게 전신요혈을 노리며 쇄도하던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살갗만 스친 채 허탕을 친 것이다.
그마저도 홍안 소년이 잠시 머뭇거린 탓에 완벽하게 피하지 못한 것이었으니, 그러한 형세를 단 몇 동작으로 주객전도시킨 그 한 수는 정녕 놀랍기 그지없었다.
‘이 한 수는 꼭 본문의 세류표(細柳飄)와 같구나. 한데 어떻게? 혹시 사문의 누군가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일까?’
방금 전의 전음에 대한 의혹이 똬리를 텄다.
그러나 홍안 소년이 계속 머리를 굴리기엔 상황이 너무도 위험천만했다.
무사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새파란 어린놈이 보기 좋게 검세를 피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들을 앞에 두고 딴생각까지 하고 있는 양을 보노라니 속에서 노기가 치밀어 안색마저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분기탱천하여 고함을 내지르며 홍안 소년을 향해 사정없이 각자 배운 바 무공의 절초를 퍼부었다.
두 가닥 경력이 어우러지며 폭풍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쐐쐐애액!
“아……!”
그 가공할 검세에 넋을 잃었음인가?
홍안 소년은 짤막하게 탄식을 내지르곤 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멍청히 바라만 보았다.
두 경력이 한데 어우러져 맹렬하게 소용돌이치며 무방비하게 드러난 홍안 소년의 전신을 후려치려는 찰나,
콰앙!
“끄아악!”
귀가 멍멍할 정도로 큰 폭음.
그와 동시에 울려 퍼지는 처절한 비명!
‘이게 무슨?’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는 홍안 소년의 망막에 한 사람의 모습이 맺혔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구름 사이로 느긋하게 몸을 돌려 이쪽을 쳐다보는 인물.
그가 술병에 든 술을 들이켜고는 말했다.
“고놈 참, 멍청하기도 하다. 그럴 때는 재빨리 매화토염(梅花吐艶)으로 검세를 벗어나 곧장 낙매성우(落梅成雨)로 단숨에 작살을 냈어야지. 요즘 화산파에서는 그런 것도 안 가르쳐 주나?”
예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고 중얼중얼 말을 늘어놓으며 발검조차 하지 않은 먹빛 검을 어깨에 척하니 걸친 그 인물은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이빨을 드러내며 환히 웃고 있었다.
“조, 조장님?”
주운이었다.
“조장님, 어떻게 조장님이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을 아시죠?”
홍안 소년은 갑작스런 폭음, 처절한 비명에 이어 주운이 나타나 마치 사문의 비전절예, 그것도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초식을 매우 잘 알고 있다는 듯 읊어대자 조심스레 물었다.
여태껏 한 번도 유출된 바 없었던 까닭이다. 설혹 만에 하나라도 옳지 않은 방도로 사문의 절기를 훔쳐서 익히기라도 했다면, 하는 생각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세류표도 알고 있는데, 그까짓 게 무어 대수라고?”
홍안 소년은 깜짝 놀랐지만 짚이는 데가 있었다.
“설마 좀 전의 전음이?”
이제는 대놓고 아까 그 전음이 제대로 갔나 보군, 이라고 중얼거리던 주운이 불쑥 말했다.
“너, 성이 진(陳)이냐?”
“어, 어떻게 그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