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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신위 1권(15화)
第六章 천사혈명(天邪血命) - 이제는 유일한 나의 자부심이다(2)
그것이 바로 척사대 이십칠 개 조의 조장들이 회의실에 집결한 연유였다.
끼익─
그리고 이제 막 회의실로 들어서는 척사대 대주 조아봉의 흉터가 씰룩이는 얼굴을 쳐다보며 주운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불어 내쉬면서 술 생각을 더욱 간절하게 만드는 이유였다.
“늦어서 미안하오. 방금 수색조가 보낸 전서구를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늦고 말았소.”
이십일조 조장이 물었다.
“무슨 내용이기에 그러십니까?”
“이미 그들의 전투부대가 호남으로 넘어왔다고 하더이다.”
조아봉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들은 장사 백 리 밖에 있는 숲 속을 주둔지로 삼은 채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고 하오.”
모두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버렸다.
“그, 그럴 수가!”
이십일조 조장이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방금 전투부대라 하심은……?”
조아봉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들의 막사에 꽂힌 깃발에 새겨진 두 글자로 말미암아 그들은 천사혈명대(天邪血命隊)로 밝혀졌소이다.”
“……!”
갑자기 주위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천사혈명대.
비록 천사련의 삼대(三隊) 중 두 번째로 꼽히는 부대지만 그렇다고 척사대에 비길 바가 아니지 않는가?
‘아예 비교 자체가 어불성설에 가까운데, 고작해야 척사대로 그 천사혈명대와 싸워야 한다고? 미치겠군.’
주운은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방금 마셨던 술기운이 몽땅 머리로 치솟은 것만 같았다.
다른 조장들도 인상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척사대로서는 쉬이 물러설 도리가 있을 리 만무하다. 천사련을 견제하려 편성된 부대임에야 당연한 것이었다. 일단 살고 보자고 싸워 보지도 않고 후퇴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제왕성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중죄이다.
그야말로 죽자 살자 매미가 고목나무에 달라붙고, 무서운 줄 알면서도 수레바퀴 앞에 달려들어야만 하는 가엾은 사마귀의 형국이 아닐 수 없으리라.
‘진정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속에 갇힌 기분이군.’
주운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하아, 이를 어쩐단 말인가.”
“정녕 방도가 없단 말입니까? 무어라 말들 좀 해 보시오.”
척사대 스물여섯 개 조의 조장들도 적잖이 답답한지 탄식 섞인 말을 한마디씩 내뱉었다. 오로지 주운만이 말없이 잠자코 있을 따름이었다.
‘아무리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 해도 달리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마저 하지 않고는 심란한 마음을 걷잡을 길이 없을 것 같았던 까닭이리라.
장내의 분위기는 이를 데 없이 무거웠다.
주운은 그 이유를 잘 알았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죽을 줄 알면서도 대항해야만 하는 절망감이 장내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것이다.
스물여섯 명의 조장들은 천근만근 그 무게를 측량키 어려운 바윗덩이를 속에 들여앉힌 양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땅이 꺼져라 탄식이 떨어져 내렸다.
심지어 그를 지켜보는 주운으로서도 쿵! 하는 환청마저 들릴 지경이었으니.
그때 누군가 말했다.
“대주님에게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청천비검 척운수였다.
조아봉은 짐짓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시오.”
“예. 다름이 아니라 어째서 일전에 수색을 미루고 실전 모의 전투를 시행토록 하신 겁니까?”
‘그걸 조아봉이 지시했단 말인가?’
실로 예기치 않은 대화에 주운은 아연했다. 단지 부대주가 임의로 결정한 일이라고 여겼는데 아니었다니. 좌우를 살펴보니 다른 조장들도 모르고 있었는지 얼굴 가득 놀람의 빛이 역력했다.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척운수가 직접 말하기 전까지는.
조아봉이 그렇소, 라고 운을 떼었다.
“그저 천사련 쪽에서 한 달이 되어 가도록 아무런 움직임도 없기에 그동안 본대가 해이해질까 우려하는 마음에 그러한 조처를 한 것이오. 내 미처 이런 실착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소. 그 점에 대해서는 깊이 반성하는 바이오.”
‘뭔가 미심쩍군.’
주운의 눈빛이 침잠하게 가라앉았다. 조아봉의 그러한 조처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우선 주운이 아는 조아봉의 본색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개차반이었다. 이처럼 진중하고 얼핏 들어서는 사리 깊게 느껴질 말 따위를 하며 쉬이 자기 잘못을 시인할 이가 아니었다. 되레 너희들이 못난 탓이라고 아득바득 우기고도 남음이 있을 적반하장 격인 인물이 조아봉이 아닌가.
더구나 침중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지만 짐짓 태연하려 애쓰는 것을 모를 리 만무했다.
조아봉의 연기는 주운의 날카로운 눈을 속이기에는 아직 한참은 부족했다. 경험에서 차이가 현격한 탓이다.
무영십익으로서 활동할 당시에만 거친 숱한 경험도 그러했으나 불귀곡에서의 오 년은 주운에게 잃은 것보다 훨씬 많은 지대한 산물을 남겼다.
‘대체 이 배후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아직은 모든 것이 의혹으로 짠 장막에 감춰져 있었다.
하나 언제고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
‘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겠지.’
주운은 대수롭지 않게 결론지었다.
휘이이잉―
어디선가 찬바람이 귓가를 간질였다. 보니, 창가로 달빛이 구름에 가리어 제 빛을 잃은 것이 보였다.
사위가 숨 막히는 어둠에 몸을 사리듯 그처럼 시끄럽게 울어대던 풀벌레 소리마저 잦아들었다.
마치 곧 폭풍이 몰려듦을 예고하듯이.
어쩌면 조만간 한바탕 폭우가 쏟아질는지도…….
반 시진 후.
주운은 자신의 방으로 조원들을 불렀다.
진호방 등은 막 잠들었었는지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졸린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주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불렀는지 대답을 재촉하는 눈빛이었다.
“잠자는 데 방해했나 보군. 그러나 워낙 촌음을 다투는 일이기에 부득이하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주운은 약간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천사련 쪽에서 심상찮은 움직임이 있었다. 그들은 이미 호남으로 넘어와 백 리 밖에 주둔해 있다고 한다.”
“……!”
잠이 확 달아났다.
진호방 등은 당혹감 어린 눈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의 시국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 어느 때 그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이날부로 행동하는 데 있어 각별히 유의해라.”
주운의 얼굴에는 전에 없던 엄숙함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만큼 일의 경중이 간단치 않다는 뜻.
“알겠습니다.”
진호방 등은 그 의미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눈빛도 침잠하게 가라앉았다.
주운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에라도 천사련의 무사들이 들이닥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대는 그 잔혹하기로 유명한 천사련의 삼대 중 천사혈명대가 아닌가.
그야말로 죽음의 사신이 먼발치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숙연한 분위기가 방 안에 무겁게 내리깔렸다.
그때였다.
아아아악!
바깥으로부터 찢어질 듯한 비명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이어 쿵! 하는 굉음이 들려오며 호통 소리와 금속음이 뒤섞인 지옥에서나 들을 법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장님, 지금 이 소리는?”
진호방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음. 우려했던 일이 터졌나 보구나. 각자 무기는 가지고 있겠지?”
주운의 말에 진호방 등은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 자신의 무기를 꽉 쥐었다. 무인은 언제 어느 때건 자신의 무기를 몸에서 떼 놓지 말아야 한다는 주운의 가르침을 받은 진호방 등으로서는 실로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주운은 내심 흡족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일단 내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라.”
명색이 조장씩이나 되는 이가 야음을 틈타 기습한 침입자들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뒤로 진호방 등이 결연한 눈빛으로 바짝 따라붙는 것을 확인한 주운이 방문을 열려는 찰나,
콰직!
좌측 창이 박살 나더니 한광이 번쩍였다.
그러나 미리 이를 알아챈 주운의 재빠른 응수에 땅― 소리와 함께 한 인영이 주르르 뒤로 밀려났다. 그 인영의 오른손에는 방금 한광을 발했으리라 짐작되는 검이 들려 있었다.
“……!”
그 인영은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며 눈을 부릅떴다.
아직도 찌르르 제 몸을 떨고 있는 검.
검도 아닌 고작 술병으로 칼날을 퉁기는 지극히 간단한 한 수에 그처럼 심후한 내력이 내포되어 있을 줄이야. 그건 말은 쉽지만 대단히 고절한 수법이었다. 이미 안에 액체가 든 사물 속에 내력을 주입한다는 것은.
도대체 저런 고수가 어떻게 이런 곳에?
인영은 그러한 의문을 떠올렸지만 더는 그 생각을 이을 수 없었다.
“……!”
인영의 눈이 경악으로 치떠졌다.
그 망막에 맺혀 있는 술병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피하고 자시고 할 새도 없었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술병은 얼음장처럼 굳어 버린 인영의 정수리로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퍼억!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인영의 몸이 휘청거렸다. 찢어진 정수리에서 흐르는 피가 얼굴을 뒤덮었다. 시뻘겋게 물든 인영의 얼굴이 마치 악귀와 같았다.
곧이어 인영이 이를 부득 갈며 검을 휘둘러 왔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칼날을 타고 경력이 뿜어져 나왔다.
폭사된 경력의 돌풍이 일려는 순간,
뻐억!
쿵!
인영의 몸이 실 끊긴 연처럼 훌훌 날아 뒤쪽 벽에 처박혔다가 퉁겨져 바닥에 널브러졌다. 느닷없이 발 하나가 그 돌풍의 중심을 뚫고 파고들어 경력을 산산이 흩어 버리고는 인영의 가슴팍을 걷어찬 것이다.
인영의 몸이 몇 번 꿈틀거렸다. 부들부들 경련이 일어났다. 그러더니 축 늘어져 버렸다.
“아!”
진호방 등이 놀람에 찬 탄성을 터뜨렸다.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단 두 수만에 인영이 맥도 못 추고 숨이 끊어진 것을 보자 가슴이 쿵쾅거렸다.
과연 그들의 조장은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평소 헐렁한 말투와 주정뱅이 같은 행실, 그리고 느긋한 몸짓에다 능글맞은 웃음이 잘 어울렸는데 지금의 조장은 많이 달랐다. 그 능력이 얼마 만큼인지 측량키가 어려웠다.
주운이 발끝으로 앞에 엎어진 시신을 돌려 눕혔다.
“진짜 그들이군.”
무심한 주운의 중얼거림.
진호방 등이 의문 섞인 눈으로 주운의 시선을 따라갔다.
진호방 등의 눈이 부릅떠졌다. 방금 전에 놀랐는데 또 놀라고 말았다. 그 인영의 함몰된 가슴팍에 새겨진 두 글자가 그런 반응을 이끌어 냈다.
혈명(血命)
천사혈명대.
피와 살육을 즐긴다는 그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주운이 말없이 묵궁을 회수하며 진호방 등을 이끌고 문밖으로 나섰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졌다. 누군가 횃불을 코앞에 가져다 대면 이러할까. 야심한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장원은 대낮인 양 밝았다.
“부, 불?”
장원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놈들이 장원에 불을 붙였습니다!”
이미 건물군은 불길의 탐욕스런 혓바닥에 잿더미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건 숫제 다 타 버려 원래 모습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누구의 짓인지 명백했다.
진호방 등이 멍청히 불구경에 정신이 팔렸다.
주운이 그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넋 나가 있던 진호방 등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바로 그 순간,
“와핫핫하하!”
천둥치듯 우렁찬 웃음이 들려왔다.
살기가 짙게 배인 웃음소리였다.
주운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웃음소리에는 심대한 내력이 실려 있었다. 때문에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그 웃음소리가 또렷하다 못해 천둥인 양 들려온 것이었다.
“너희들은 여기서 꼼짝하지 말고 있어라.”
주운이 심각한 어조로 말하며 지면을 박찼다.
진호방 등이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이미 주운의 신형이 사라진 후였다.
진호방 등이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조, 조장님?”
진호방 등은 그것이 바로 주운의 가전신법인 암향무영보(暗香無影步)임을 알 리 없다. 암향무영보는 보신경을 한데 버무려 굉장히 효율적이었다. 일단 펼친 후에는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고 오로지 그윽한 향기만이 누군가 있었다는 자취를 남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