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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신위 1권(16화)
第六章 천사혈명(天邪血命) - 이제는 유일한 나의 자부심이다(3)
주운이 한 줄기 회광(灰光)으로 화하여 건물군의 잔재를 박차며 웃음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신형을 날릴 때였다.
“으흐하핫하하!”
또다시 굉소(轟笑)가 오륙 장 밖에서 들려왔다. 그곳에는 대청이 있었다. 주운이 그 웃음소리에 내포된 광포한 살기를 느끼고 크게 한 입 진기를 마시며 신형을 솟구쳤다.
퍼엉!
동시에 폭음이 터졌고 무언가 시커먼 물체가 미증유의 거력에 떠밀려 대청 밖으로 훌훌 날아갔다. 그 도중에 희끗한 회영이 나타났다.
주운이었다.
순식간에 전력으로 신법을 펼친 주운이 대청 밖에 도달해 그것을 낚아챘다.
시커먼 물체의 정체는 척사대 제삼조의 조장이었다.
“삼조장! 정신 차리시오!”
“으으…….”
삼조장이 힘겹게 눈을 떴다. 쉴 새 없이 떨리는 눈동자는 좀처럼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원인은 과다출혈만이 아니었다. 육중한 둔기에 후려쳐진 듯 삼조장의 가슴은 움푹 꺼져 있는 터라 이미 살기는 그른 목숨이었다.
“사, 살려…….”
살려 줘, 라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삼조장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주운이 삼조장의 코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운은 삼조장의 시신을 한쪽에 바로 눕혀 주었다.
‘미안하오.’
시간이 촉박하여 제때 당도하지 못한 것도 삼조장에게는 원통한 일일 터였다. 속으로나마 삼조장의 왕생을 기원한 주운이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주운의 눈가에 미미한 경련이 일어났다.
“……!”
가죽신 밑창으로 무언가 끈적끈적한 느낌이 전해졌다.
주운이 시선을 내렸다.
피[血]!
선혈이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점점이 흩어져 있는 새빨간 수십, 수백 조각으로 토막 난 고깃덩이들이 울컥울컥 토해 내는 선혈이 흘러 대청 문턱에 걸려 찰랑였다.
가히 천인공노할 참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였다.
툭.
떼구르르.
주운이 자신의 발아래로 굴러온 누군가의 머리통을 딱딱하게 굳어 버린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척사대 제십일조 조장의 머리통이었다. 그와 동시에 광기에 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으힛히히히.”
주운이 흠칫했다.
그 앞에서 적포인(赤袍人)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포인이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엔 네 차례인가?”
가느다란 눈주름이 잡힌 웃음. 그 주름의 가닥가닥에 살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평범한 이목구비가 그 눈웃음 하나로 변질되었다. 숫제 보는 이로 하여금 심장이 꽁꽁 얼어붙는 충격을 받게 하였다.
할짝.
적포인이 왼손에 든 검의 칼날을 혀로 핥았다. 선홍빛 검에 기다란 은색선이 그어졌다. 검은 원래 은백색이었지만, 사람의 피로 목욕을 하고 목을 축여 붉게 물들어 있었다.
화주를 한 모금 털어 넣고 주운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귀하가 천사혈명대의 대주요?”
적포인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천사혈명대? 대주? 그까짓 놈들 대장 노릇해서 뭐 해?”
적포인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주운은 그 웃음소리에 사람의 혼백을 미혹케 하고 진기를 흐트러뜨리는 기이한 섭혼의 효력이 있음을 알아챘다. 다급히 진기를 끌어 올려 귀를 보호했다.
적포인의 웃음이 뚝 끊겼다.
적포인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말했다.
“너는 다른 놈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구나. 좋아, 그래야지! 간만에 세상에 나왔는데 별 시답잖은 것들만 보여서 흥이 싹 가셨었는데 과연 이곳까지 온 보람이 있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리는 적포인. 주운과 만나게 된 것에 대해 진정 기꺼워하고 있었다. 성격을 종잡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반쯤 혼백이 몸 밖으로 빠져나온 사람이 이러할까?
오히려 소름이 다 돋을 정도였다.
주운이 피식 웃었다.
“이제 보니 살육에 환장한 미치광이였군.”
“뭣이?”
“낯가죽은 젊어 보이는데 속은 썩어문드러졌나? 말귀 하나 못 알아먹게.”
“이놈이?”
적포인이 눈을 치떴다.
“어린놈이 뚫린 입이라고 망발을 내뱉는구나!”
주운은 냉소했다.
“나는 인명(人命)을 가벼이 여기는 개돼지만도 못한 작자에게 그런 소리를 들을 만큼 어리지는 않소.”
적포인은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노부가 이십여 년 만에 강호에 나왔더니 이제는 별의별 하루살이들이 다 왱왱거리는구나! 감히 노부, 남해검마(南海劍魔) 좌불복(左不福) 앞에서 제 죽을 줄도 모르고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것을 보니.”
그는 바로 사도삼마(邪道三魔) 중 남해검마라고 불리는 좌불복이었다.
좌불복은 실로 잔악한 인물이었다.
해남파의 반도(叛徒)인 그는 차기 장문인의 위를 사형에게 빼앗기자 사형제들을 도륙한 뒤 달아난 무림 공적이었다. 그런 그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천사련에 가입한 후로는 아무도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못했다. 공연히 천사련을 건드리기가 겁나서가 아니었다. 좌불복은 초절정 고수였다. 괜히 멋모르고 덤벼들었다간 순식간에 저세상 구경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남해검마 좌불복이 이십여 년 만에 천사련을 나서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며.
그러나 주운은 그가 보기보다 훨씬 연배가 높은 것에 대해 내심 놀랐을 뿐, 태연히 맞받아쳤다.
“거 다 늙은 분이 방구석에 틀어박혀 손자 재롱이나 감상할 것이지 괜한 걸음을 하여 그 앙상한 손에 피를 묻히셨군. 어디 그래서야 뼛골이나 남아나겠소?”
어차피 보는 눈도 없었다. 딱 적절했다. 이참에 제대로 몸 좀 풀어 볼 요량이었다.
남해검마 좌불복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이름을 듣고 벌벌 떨며 이마가 땅에 닿도록 굽실거릴 거라 여겼는데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황당했던 나머지 얼이 빠져 버렸다.
내 이름이 그리도 빛바랬단 말인가?
나 남해검마 좌불복이…… 이렇게 어린놈에게 저런 말을 들을 정도로?
이건 말도 안 돼!
좌불복이 불신 어린 눈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좌불복은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만큼이나 자존심도 강했다. 그러다 보니 주운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분노가 치밀었다.
저 새파란 놈이 감히 날 가지고 놀아?
기어이 좌불복의 머리꼭지가 돌아 버렸다.
좌불복이 노호성을 터뜨렸다.
“네 이놈!”
동시에 남해검마 좌불복이 신형을 날렸다.
좌불복이 일주파랑(一舟破浪)의 검초를 전개했다. 사문이었던 해남파를 뒤엎을 때 같이 훔쳐 낸 남해삼십육검(南海三十六劍) 중 최고 절초였다.
무수한 검기가 해일을 이뤄 덮쳐 갔다.
파파파파!
퍽!
갑자기 해일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좌불복이 왼팔을 덜렁거리며 다급히 물러섰다. 부러진 모양이었다.
주운이 혀를 찼다.
“그러게 집에 얌전히 있을 것이지.”
어느새 말투도 반말로 바뀌었다.
“크아아!”
열이 뻗친 좌불복이 괴성을 지르며 다시 신형을 날렸다.
콰직!
뼈가 함몰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남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일 장 밖에 내동댕이쳐졌다.
“대, 대체 뭐냐! 어떤 사술을 펼친 것이냐!”
금세 부어오른 얼굴로 좌불복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었다. 미처 손을 쓰는 것조차 보지 못했는데, 끔찍한 고통을 수반한 외상만이 딸려 왔다. 특히 그 단단하다던 두개골 중 광대뼈를 부순 일격은 좌불복으로서도 차마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아팠다.
“사술은 무슨, 순수 실력이지.”
주운이 차분히 말하며 상체를 숙이는 순간,
퍼걱!
“크악!”
좌불복의 상체가 직각으로 꺾였다.
좌불복이 피를 토하며 눈으로 한 가닥 살광을 뿌려냈다. 하지만 주운의 주먹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누가 겁먹을 줄 알고?”
퍼벅! 퍼버버벅!
아예 대놓고 한 손으로는 좌불복의 어깨를 잡아 못 피하도록 하고 한 손으로는 신나게 복부를 올려쳤다.
한참 얻어맞다 보니 좌불복이 짐짓 눈빛을 죽였다. 반항이 무소용한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이를 감지한 주운이 스윽 손을 거두려 했다.
그건 명백한 실수였다. 자신의 사문을 피바다에 잠기게 한 비열하기 이를 데 없는 좌불복이 그 정도로 패배를 시인할 리 없었다.
“차앗!”
재빨리 진기를 끌어 올려 장력을 발출했다.
그러나 진짜 실수를 한 사람은 바로 좌불복이었다.
주운이 슬쩍 상체를 비스듬히 틀어 좌불복의 장력을 간단히 피해 냈다.
주운이 스산하게 말했다.
“난 당신 같은 사람을 아주 잘 알지.”
“이, 이놈! 죽어라!”
폭갈을 터뜨리며 좌불복이 일신의 내력을 몽땅 주입한 장력을 후려갈겼다.
거대한 손 모양의 강기가 폭사되었다.
꽈아앙!
굉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동시에 한 인영이 피 떡이 된 채 벽에 처박혔다. 좌복불이었다.
좌불복이 밭은기침을 토했다.
“쿨럭, 커헉…….”
그 앞에 주운이 나타났다.
“당신 같은 사람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것을.”
주운은 싸늘히 말하며 발을 들었다.
“아, 안 돼…… 제, 제발 살려 줘!”
좌불복이 간절한 눈으로 애걸복걸했다.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죽기에는 앞으로 할 일들이 많았다. 여기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안 돼.”
주운은 사정없이 다리에 힘을 주었다.
빠각!
***
“크윽!”
지독한 강격이 휩쓸려 왔다.
진호방이 비칠거리면서 뒷걸음질 쳤다. 검을 쥔 손아귀가 찌르르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무형의 강기(|氣)에 진호방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상대가 너무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했다. 쏟아지는 공세에 죽어라 마주 쳐 갈 뿐, 진호방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막는 것밖에 없었다.
“하아, 하아…….”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조장님이 사라지고, 조원들과 함께 몰려오는 적도들을 상대로 하나하나 처리하고 있을 때, 바로 그때였다.
저 사내가 나타난 것은.
그의 가슴팍에 새겨진 문양.
종전에 보았던 두 글자를 중심으로 한 마귀 문양.
천사혈명대의 일개 무사는 절대 가지지 못하는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상징.
혈명을 이끄는 단 한 사람.
“빙마선(氷魔扇) 구양절(歐陽癤).”
굳게 다물린 잇새를 비집고 나온 한마디.
진호방은 입술을 짓깨물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긴장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고통스러운가 보군 그래. 그런데 그 꼴을 하고도 버티고 서 있는 게 참으로 용하군, 용해!”
마치 만년설처럼 흰 백색 학창의에 검은 관(冠)을 쓴 유생풍의 구양절이 짐짓 놀랍다며 조롱하는 말투로 말했다.
구양절의 말마따나 진호방의 몸은 피투성이였다.
한데 묶었던 머리는 산발이 되었고 흑의경장은 다 찢어져 너덜너덜했으며 그 사이로 보이는 상처가 흉측하게 입을 벌리고 선혈을 울컥울컥 토하고 있었다.
“으윽!”
진호방은 온몸에서 울어대는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뒤를 곁눈질했다. 두호와 사씨 형제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죽은 듯 널브러져 있었다. 여기서 자신이 물러나면 그들의 죽음은 기정사실화되는 것이다.
“오호, 저놈들 때문이더냐?”
구양절 역시 그를 알았는지 입매를 비틀었다. 이윽고 호선을 그리는 입술. 조롱기 어린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구양절에게는 네 사람의 목숨쯤은 파리 목숨과도 같았다.
“도망쳤더라면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왜지? 어째서 저런 놈들의 앞을 막아서는 것이냐? 자신의 목숨은 중요치 않다는 멍청한 소릴 지껄여 보고 싶었느냐?”
구양절이 이죽거렸다.
진호방이 냉소했다.
“도망이라고? 웃기는 소리 말라 그래. 누가 도망을 친다고 그래? 어쩌면 당신 말이 옳을지도 몰라. 아니, 옳겠지. 누구든 자기 목숨은 소중하니까. 그런데 말이야…… 그거 알아?”
진호방은 정색을 하며 씹어뱉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