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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신위 1권(17화)
第六章 천사혈명(天邪血命) - 이제는 유일한 나의 자부심이다(4)


“난 이미 수도 없이 도망쳤어. 이제 신물이 날 정도라고. 무섭지. 안 무서울 리 없지. 그래도 그건 아니야. 이렇게 막다른 곳에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아. 살고 싶지만, 죽어도 죽기 싫지만…… 그런다고 죽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잖아? 그럴 바엔 죽는 게 나아. 적어도 내가 죽을 곳은 내 스스로 정할 수 있잖아? 정말 멋지지 않아?”
진호방이 하하 웃었다. 덜덜 떨면서도 웃어 젖혔다. 떨리는 그의 몸은 이미 본능적으로 죽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진호방은 더없이 후련했다.
이제야 비로소 원하던 것을 알았다. 그토록 찾으려 했던 것을 찾았다.
“난 처음부터 생긴 것과 다르게 살고 싶었거든.”
진짜 사내답게, 그렇게.
구양절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생각지도 못한 진호방의 당찬 발언에 헛웃음마저 나왔다.
구양절이 말했다.
“놈. 어차피 살려 줄 마음도 없었는데, 잘 알고 있어서 오히려 흥이 가시는구나.”
그의 무공이면 아무리 발이 빠르다 해도 단숨에 붙잡아 갈가리 찢어 놓았을 터였다. 애당초 그럴 속셈이었다. 도망치다 막다른 길에 들어선 사냥감을 유린하는 것만큼 흥분되는 것도 없었으니까.
그걸 기대했던 구양절로서는 몹시 기분이 상했다.
스아아아―
구양절의 몸 주위로 스산한 돌풍이 일었다. 그 서슬에 옷자락이 펄럭였다. 내력을 끌어 올린 것이었다.
구양절이 섭선을 냉랭히 휘저었다.
부챗살 모양의 백색 강기가 벼락처럼 발출됐다.
쑤아아아앙―
여기서 끝이구나. 조장님, 두호, 사초, 사청…… 잘 있어라.
진호방은 마지막으로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였다.
꽈꽈아아아앙!
귀청이 터져 나갈 것만 같은 폭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누군가 세게 밀친 것처럼 진호방의 몸이 두세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그 순간,
투캉!
마치 망치로 쇠를 부러뜨리는 것 같은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쿨럭, 커헉!”
그리고 막혔던 숨통이 트였다. 밭은기침이 나왔다.
죽지 않았다. 살았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진호방이 뜨이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떴다. 그러고는 흐릿한 시야로 앞을 바라보았다.
푸스스스…….
폭발의 여파인지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 있었다. 그 속에 대체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시야마저 흐릿해 사물조차 제대로 식별되지 않았다.
진호방이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두세 개로 보이던 세상이 점차 겹쳐 갔다.
그때 누군가 올연히 서 있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둘!
그 다음 순간,
콰앙! 우르르르릉!
우레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그 순간,
번쩍!
시야가 밝아졌다.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섬광이었다.
그런데 검붉은 검이 그 섬광을 먹어 치워 버렸다.

주운이 전방을 향해 묵궁을 내뻗고 있었다. 광명을 먹고사는 검, 묵궁이 꾸역꾸역 잘도 빛을 삼켰다. 그 앞에 구양절이 내뻗은 섭선을 거둘 생각마저 잃어버린 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두 번째다. 악록산에서 한 번, 그리고 여기서 또 한 번.
“조장님……?”
주운의 등을 본 것은.
그의 등은 세상 그 무엇도 허물지 못할 금성철벽인 것 같았다.
그 뒤에만 있으면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안도케 하는 힘이 있었다.
그게 바로 눈앞에 있었다.
“것 봐. 내가 뭐랬어? 적어도 아무 데서나 죽진 않는댔지?”
그러면서 진호방을 돌아보며 주운이 씨익 웃었다.
그 미소를 본 순간 진호방은 맥이 풀려 버렸다. 소리 나게 주저앉는 그의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지어졌다.
더불어 구양절이 불쌍했다. 저 무시무시한 조장이 나타났으니, 곧 작살이 날 것이다. 진호방이 아는 주운은 그러했다.
그리고 그런 진호방의 생각은 매우 정확했다. 주운은 이미 구양절보다 곱절은 무서운 남해검마 좌불복도 가지고 놀았다. 더구나 구양절의 무공은 이제 초절정의 문을 두드리는 수준이었다.
구양절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 어떻게 당신 같은 고수가 여기 있는 거지?”
주운이 구양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눈이었다.
“쟤들 조장이 나야.”
“겨우…… 척사대의 일개 조장이라고?”
“제대로 이해했네. 정확해.”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뭐가 그리도 불만이야?”
“어째서 저딴 버러지들의 조장 노릇을 하는 거지? 어째서 너 같은 고수가 이곳에 있는 거냐!”
“확실히 나도 이런 후미진 곳에서, 저 녀석들 조장을 하는 게 맘에 들진 않아. 처음에는 그랬지.”
구양절이 반색했다. 그러니 천사련으로 전향하라는 눈빛을 마구 보냈다.
저런 떨거지 놈들은 버리고 나에게 와라!
주운은 그 생각을 읽었는지 손가락을 세워 흔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유일한 자부심이다.”
구양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다 틀렸다.
주운은 씨익 웃으며 왼손에 든 술병을 한 번 흔들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한 발 다가가는 순간,
퍼억!
구양절의 턱이 돌아갔다.
구양절이 두려움이 깃든 눈으로 주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허공을 가르는 주운의 술병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멋대로 평가절하하지 마!”
퍽! 퍽! 퍼벅! 퍽!
구양절의 몸이 정신없이 뒷걸음질 쳤다. 얼굴이 홱홱 소리를 내며 좌우로 도리질했다. 금세 코피가 터지고 피가 튀어 허공으로 비산했다. 섭선은 놓친 지 오래였다.
“그, 그만……. 쿠엑!”
구양절이 풀썩 쓰러졌다.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 설령 오래 전에 죽은 구양절의 생모가 와도 몰라볼 정도로 엉망이었다.
주운은 그 앞에 앉아서 말했다.
“저 녀석들 저만큼 키우려고 애 좀 먹었다고. 그렇게 쉽게 버러지로 만들면 내가 다 무안하잖아?”
부들부들.
구양절의 몸이 떨렸다. 끔찍한 고통도 그렇거니와 무지막지한 공포심에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지옥의 수라를 접견한 것처럼 덜덜 떨었다.
주운이 시선을 돌렸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두호와 사씨 형제를 보더니 혀를 찼다.
“꼭 생긴 대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놨구나.”
그때였다.
쉬익!
구양절이 슬금슬금 주운의 눈치를 보다가 이때다 싶어 검지와 중지를 세워 내찔렀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음인지 전력을 모조리 쏟아부은 회심의 일격이었다.
“어흑!”
괴이한 신음을 흘리는 구양절.
뜻밖에도 구양절의 손가락은 주운이 내민 술병과 격돌하여 뼈가 부러져 버렸다.
주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어쩜 이렇게 좌불복이란 미친 늙은이랑 똑같냐? 혹시 천사련 놈들은 다 이런 거야?”
최후의 수단까지 저지당했다.
구양절은 최대한 비굴한 표정으로 애원했다.
“제발, 제발 살려 주게. 아니, 살려 주십시오! 다, 다시는 이런 짓…….”
주운이 혀를 내두르며 말허리를 잘랐다.
“이야, 그것까지 똑같을 줄은 정말 몰랐다. 판박이네. 하지만 이거 어떡하지?”
구양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주운이 상체를 숙여 구양절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만 살려 두면 먼저 간 놈들이 저세상에서 내 욕을 할 것 아냐?”
구양절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우드득!
무형의 강기가 구양절의 목을 쥐어짜듯 비틀어 버렸다. 그리고 구양절의 몸이 맥없이 쓰러져 버렸다.
쿵!
“그르륵…….”
구양절이 피거품을 흘리며 몇 번 꿈틀대더니 이윽고 몸이 축 늘어졌다. 두말할 것도 없이 즉사였다.
“아…….”
진호방이 입을 헤벌렸다. 결과를 모르진 않았지만 저토록 싸움이 쉽게 끝나 버릴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자신을 거의 죽음 직전까지 이르게 했던 절정고수의 죽음은 굉장한 허탈감마저 안겨 줬다.
“이게…….”
이게 강호다. 이게 자신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어쩌면 평생.
심장이 찬물에 넣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뚝. 뚝.
문득 진호방은 얼굴을 적시는 물방울의 차가움에 화들짝 놀란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 줄기, 두 줄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쏴아아아―
소나기가 시원하게 쏟아졌다.
외진 숲 속에서 일단의 무리가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육백여 명이었다.
육백여 명의 척사대 무사들이 수십 개의 수레를 끌고 숲 속의 공터로 나왔다. 말조차 없어 사람이 끄는 대형 수레였는데, 거기에는 시체가 한가득 실려 있었다.
맨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척사대 대주 조아봉이었다.
“구덩이를 파라, 아주 큰.”
조아봉의 말에 육백여 명의 무사들이 바삐 움직였다. 각자의 무기로 소나기로 질퍽한 흙을 파기 시작했다.
조아봉은 말없이 기다렸다. 방원 십여 장에 깊이가 삼사 장 크기의 구덩이가 순식간에 입을 벌리고 드러났다.
육백여 명의 무사들이 조아봉의 지시에 따라 수레에 실려 있는 시체들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는 속도로 넣고 도로 흙을 퍼다 덮었다.
삽시에 대형 무덤이 만들어졌다.
무덤에 묻힌 시체들은 바로 반 시진 전만 해도 살아 있던 사람들이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천사혈명대와의 격전에서 허무하게 스러져 간 생명들이었다.
그 앞에 선 무사들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전우에 대한 애도, 혹은 친우에 대한 왕생을 기원하는 묵념.
일대에 죽은 자에 대한 숙연함이 깊숙이 틀어박혔다.
조아봉이 돌아섰다.
조아봉의 시선이 전방의 육백여 명의 무사들을 훑어보았다.
무사들 역시 조아봉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조아봉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오늘 수많은 동료들을 잃었다. 그 잔악한 천사혈명대를 상대로 그들은 진정 용감하게 싸워 주었고, 장렬히 전사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잊어선 안 된다. 잊지 않고 반드시 천사련의 악귀들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돌려주어야 한다. 이는 척사대 대주로서의 명령이 아니다. 나, 조아봉이란 한 사람의 간절한 부탁이다!”
“……!”
무사들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처음에는 남의 일이었다. 비록 제왕성에 몸담은 처지였지만 마음마저 바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의 전투가 그들의 관념을 바꿔 버렸다.
동료, 그리고 친우의 죽음.
잊을 수 없다. 잊어서는 안 된다.
원통하게 죽은 그들의 넋을 위로코자 하는 방도는 오직 단 하나뿐이었다.
응전(應戰)!
맞서 싸워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것이다.
무사들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분노와 흥분, 그리고 전의를 느끼며 눈빛을 불태웠다.
그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주운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술맛이 떨어졌다. 가식이 철철 흐르는 조아봉의 일장 연설이 고까운 탓이었다.
유일하게 그 본성을 알고 있는 주운만이 속으로 콧방귀를 흥, 하고 뀔 뿐이었다.
‘아, 정말 피곤하게 됐군. 이제는 결사 항전이라도 해야 할 판이네. 빼도 박도 못하고 끌려가게 생겼어.’
주운 역시 죽은 자들에게는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 조아봉의 말마따나 희생은 희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주제도 모르고 따라나서 꽃다운 나이에 이승을 뜨고 싶진 않았다.
설혹 내일 당장 죽는다 해도 그것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원하지 않는 죽음, 원하지 않는 곳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만큼 처연한 것은 없을 테니까.
조아봉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외쳤다.
“거기 있는가, 먼저 간 척사대의 자랑스러운 무사들이여! 그대들의 불굴의 의지, 그대들의 용맹한 의기를 이어받아 반드시 천사련을 무찌를 것이다! 듣고 있는가, 그대들이여! 지켜보고 있는가, 그대들이여! 우리는 결코 지지 않는다! 그대들의 넋과 함께 싸우겠노라!”
“우와아아아아!”
우레가 터지는 굉음처럼 커다란 함성이 숲 속을 쩌렁쩌렁 떨쳐 울렸다. 누군가 먼저 흥분해 소리를 지르자 그 자극적인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모두에게 퍼져 입을 한데 모아 목청이 찢어지도록 소리를 터뜨린 것이었다.
척사대 제십팔조 조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운이 진호방 등을 쳐다보며 손으로 이마를 짚고 말았다. 대책이 서질 않았다. 조아봉의 번드르르한 웅변에 감쪽같이 속아 자진해서 죽으러 나가기라도 할 것 같았다.
주운은 하염없이 빗줄기를 쏟아 내는 하늘만 탓했다.
‘고놈의 하늘, 우라지게도 찔끔거리는구나.’
한동안 날씨는 우중충할 것이다. 금방 그치는, 잠깐 스쳐 지나가는 폭우가 아니었다.
하지만 주운은 마치 그 빗줄기가 자신의 마음속에 빗금을 죽죽 그어 놓는 것처럼 우울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
그 빗줄기만큼 자신에게 불행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생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