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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멀기는 개뿔, 합격만 시켜 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다녀야지. 등록금도 싸고, 임용 합격하기도 사대보다 쉽고. 남자 선생님 한 명 만나서 우리 엄마 아빠처럼 부부 교사 해야지.’

스스로 우스운 농이라 여겨 낄낄낄 웃어 댔는데 원이는 스르륵 눈을 들어 나를 빤히 바라본다.

‘부부 교사. 그거 좋네, 부부 교사.’

‘그럼∼ 좋지.’

아직 어린 고1의 눈에 선생님은 그저 좋은 것투성이인 둘도 없는 좋은 직업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어린 중3의 귀에도 그것은 퍽이나 좋은 직업 같았나 보다.

‘그럼 나도 선생님 해야겠네.’

원이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내가 나열한 선생님의 장점들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항상 먼저 가던 누나이기에 이것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아, 그때의 일을 더 자세히 상기시킬 수만 있다면 답을 알 것도 같은데.



* * *



“아, 나 공부하기 완전 싫어. 임용 완전 싫어. 교생 실습에서 눈치 보는 거 완전 싫어. 내 스타일 아니야.”

“또라이로 불리던 사람이 대학 왔다고 어련하시겠어요.”

“그 별명도 오랜만이다.”

고1의 풋풋했던 장래희망은 이미 몇 차례의 교생 실습으로 인해 생각했던 것만큼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움직이지도 않고 앉아서 공부만 하니까 살이 뒤룩뒤룩 찌는 게 보이면서도 임용 합격하면 다 빠질 거라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이나 하고 있는 지금, 나는 엄청 힘들다.

임용 고시에 대한 압박이라는 건 고3의 수능 압박보다 약 1.5배 정도 더 심하다. 고3 때야 무조건 좋은 대학들이 목표라 그 중에 좋은 곳 붙으면 가면 된다지만 교대생의 길은 오로지 임용 하나라 하나를 놓치면 앞이 안 보이는 깜깜한 상황을 겪지 않으려면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한다.

아…… 나도 코피는 항상 터지는데.

“또라이…… 그거 알아, 원아? 그거 너 때문에 생긴 별명이야.”

“뭐만 하면 다 나 때문이래.”

진짜 너 때문이야, 멍청아.



* * *



어릴 적엔 순둥이었던 원이는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점점 거칠어져 갔다. 내가 고2, 원이가 고1. 원이는 나를 따라 우리 학교 1학년으로 입학했는데,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곧 여자아이들 대화의 중심이 되어 갔다.

난 매일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잘생겼는데 남들은 오죽할까. 모두에게 까칠했던 원이가 나에게만은 꼬리를 흔드니 강원을 사모하는 것들의 눈에 나는 불여우 같았을 게 뻔했다. 허나 그들이 몰랐던 게 있는데, 실제로도 난……,

‘아∼ 이게 뭐람.’

불이었다. 중학교 때도 겪어 봤던 일이 고등학교에서도 일어났다. 중학교 때야 생각 없이 일을 치렀지만 고등학생이 되어 머리가 큰 이후론 그래도 나름 참하게 살았다고 자부했는데.아니, 안 그래도 안 좋은 머리로 교대를 가려 하니, 빡세게 공부만 하며 지냈는데.

‘야, 너냐.’

평소라면 참을 만도 했건만 안타깝게도 그날은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었다. 내 책상 서랍이 어지럽혀 있고 내 필기 공책은 사라졌으며 불여우라는 글이 적힌 쪽지까지 손수 붙여 주신 누구 덕에 내 기분은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평상시에 날 고까워하는 모임의 대표인 친구 앞에서 껄렁껄렁 쪽지를 흔들어 댔다.

‘생사람 잡지 마.’

‘글씨체가 넌데, 이것아.’

평상시처럼 귀여운 정도로 끝났다면 내 봉인이 풀리지 않았을 텐데. 중학교를 같이 나온 이들은 웬만해선 날 모르고 졸업하진 못했다. 꼭 이런 짓을 하는 머리 빈 것들은 어디서든 존재했고 나는 그것들이 하는 짓을 가만히 수용하고 있을 그릇이 아니었다.

‘또라이.’

내 중학교 별명이었다. 그리고 이 날, 여자아이의 머리채를 잡고 휘둘렀던 탓에 고등학교까지 연장된 별명이었다. 학교에 부모님이 오신 게 몇 번이더라. 용의주도했던 내가 일 치르기 전에 증거를 충분히 모아 망정이지, 까딱하면 학생부 못 낼 일 생길 뻔했네.

엄마, 아빠.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남자애들이건 여자애들이건 머리채는 원 없이 잡아 봤어요. 딸이 태권도 검은 띠를 괜히 딴 게 아니에요, 그렇죠?



* * *



교대에는 신이 존재한다.

피아노, 축구, 피구, 장구, 단소, 소고, 리코더, 앞구르기, 뒤구르기, 그림 그리기, 노래 부르기, 텃밭 가꾸기 등등 배워야 할 것이 많은 교대이면서도 누군가 한 명은 꼭 이 모든 것을 배우기도 전에 통달하는 이가 있는데, 우리 교대에서는 원이가 그러했다.

“강원, 넌 참 좋겠다. 어릴 적부터 다양하게 배우더니 교대 와서 능력 발휘 다 하네.”

무식하게 몸 쓰는 것만이라면 나도 꽤나 자신 있었지만, 원이는 피아노도 꽤나 수준급으로 다룰 줄 알았다. 태권도야 나와 함께 검은 띠까지 땄으니 그러려니 하겠다만 저런 우아하고 고상한 취미를 가진 원이는 참 잘나 보였다.

“그러게. 기껏 배워 놓고 썩힐까 봐 걱정했는데 다 쓸모가 있다.”

“너 어릴 적엔 지금보다 훨씬 하고 싶은 게 많았나 봐. 기억해 보면 너 항상 예체능 학원 다니느라 바빴어.”

태권도, 피아노, 미술, 실용 음악 학원. 정말 다양하게도 다녔구나.

“……호기심 아니야. 해 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어.”

‘다 누구 덕분이지.’

강원이 내 귀에 들릴락 말락 한숨을 내쉬듯이 작게 내뱉었다.



* * *



어릴 적 우리 부모님과 원이의 부모님은 아이들을 건강하게 자라게 하겠다며 우리 둘을 나란히 태권도장에 보내셨다. 내가 다닌 예체능 관련 학원은 오로지 태권도장이 끝이었건만 원이는 달랐다. 나는 배운 태권도를 아주 요긴하게 사용했기에 단순히 원이는 자신의 배움에 성이 차지 않는가 보다고 생각했었다. 중학생이 되어 이성에 눈을 뜨게 된 나는 이상형이란 것이 존재하기 시작했다.

‘피아노 치는 남자 멋있더라.’

‘뜬금없이 웬 피아노?’

‘악기 다루는 남자는 엄청 멋진 것 같아.’

그날은 음악 시간에 악기를 전공하는 아이가 콩쿠르에 나간다며 우리에게 시범 연주를 해 준 날이었다. 그 남자아이는 첼로를 전공했지만 피아노도 기본적으로 다룰 줄 알아 간단한 곡을 쳐 주기도 했었다. 모든 아이들과 넋을 잃고 바라봤다 이야기 하니 원이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좋아하는 곡 있어?’

‘왜? 원이 너도 피아노 배우려고?’

‘뭐, 그래 보려고.’

생각해 보면 항상 이런 패턴이었던 것 같다. 원이는 항상 나로 인해 뭔가를 배웠던 것 같다고 자부하기엔 너무 나아간 걸까.

‘저번엔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좋다 하고, 저저번엔 노래 잘하는 사람이 좋다 하고, 이번엔 피아노야? 누나는 취향이 너무 자주 변해.’

나도 이때만큼은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니, 원이는 그림 학원도 실용 음악 학원도 다녔었다. 그림 학원 같은 경우는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가은이가 바통을 이어받아 다닌다지만 실용 음악 학원은 정말이지 뜬금없었다.

‘나 뉴에이지가 좋아,’

나는 미련하고 눈치가 없었던 것일까, 아예 생각의 범주에서 지워 버렸던 것일까.

‘더 이상 높아지면 힘들어, 누나.’

원이는 대체 누가 힘들어진다는 말이었을까. 내 이상형이 점점 높아져 내가 남자를 만나기 힘들어진다? 그게 아니면 내 이상형처럼 되어 가는 게 힘들다? 원이의 말은 항상 중요한 것이 생략되어 알다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