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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존 1권(4화)
1장 무영서생 반사영(班査英)(4)
반적풍의 눈은 어느 때보다 싸늘했다. 하지만 반사영도 그에 못지않는 눈으로 대응했다. 절대로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다부진 의지가 담겨 있다.
“이게 아버지의 방식입니까. 어떤 이유도 없이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익숙해져야 한다. 세상은 나보다 더한 놈들 천지이니까. 네가 약하면, 그런 자들의 꼭두각시나 될 테니까.”
“하! 아버지의 무공이 그리도 잘난 것입니까. 이 책의 내용을 익히면 그 누구도 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만큼?”
반적풍은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아들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무연심공이 얼마나 대단한 내공심법인지 반사영은 모른다. 설명해 준다고 해서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십오 년을 무림과는 동떨어져 살아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무연심공을 운기해 온 것 자체만으로 반사영은 평범한 무림인들을 뛰어넘은 상태였다. 웬만한 이, 삼류 무림인들이 갖지 못한 육체적인 능력들이 발달되어 왔을 것이다.
본인 스스로가 그 능력을 느끼고 사용할 줄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내공심법의 운기 방법은 아내에게 배웠을 것이다. 아내도 평범한 삶을 산 여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공심법만 가지고는 강해지지 않는다. 마음 같아서는 반사영의 곁에 들러붙어 하나부터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강했지만, 자신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네 어미가 왜 죽었는지 궁금하지 않느냐?”
반사영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패를 꺼내 들었다. 어지간하면 자신의 입으로 하고 싶지 않은 말이다.
냉정하던 반사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반사영으로서는 둔탁한 무엇인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일 것이다.
유능한 의원들이 어머니의 진료를 맡았지만, 모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엇이 원인인지조차도 그들은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같이 살지도 않은 아버지가 어머니가 왜 돌아가셨는지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아는 것처럼 말한다?
반사영은 냉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 말을 따르면 알려 주마.”
“어머니의 죽음을 이용하는 겁니까.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겨우 그런 존재였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말이 심하구나.”
“이익!”
반사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반적풍에게로 몸을 날려 주먹을 휘둘렀다. 싸움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그가 어찌해 볼 만큼 반적풍이 약하지는 않았다.
반적풍은 가볍게 반사영을 제압했다. 바닥을 나뒹구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눈은 한기로 가득 차 있다.
“저 두 권의 책…… 무연심공을 익혔다면 머릿속으로 집어넣는 데 이틀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불태워 없애 버려라.”
반사영은 얻어맞은 복부의 통증으로 인해 바닥에서 비명을 내지르기만 했다.
다음 날 아침, 반적풍은 매캐한 냄새로 인해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갔다. 마당 중앙에서 반사영이 무엇인가를 태우고 있었다.
“뭐하는 거냐?”
“어제 다 읽고 나면 태우라고 하셨지 않았습니까.”
“설마 그걸 모조리 외웠다는 것이냐?”
반사영은 대답 없이 활활 타오르는 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반적풍은 혹시 그게 아니라면 지금 반사영의 다리를 부러뜨릴 심산이었다.
“무연심공을 바탕으로 한 무공 중 으뜸인 무영살검류(無影殺劍流)는 총 다섯 가지 초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초식은 사람을 죽이는 데 가장 뛰어난 움직임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모든 중심은 무형과 무음이다.”
“…….”
“그중 으뜸은 섬영혈참(閃影血斬)으로, 무형과 무음의 이치를 온전히 깨달은 자만이 표출할 수 있는 최고의 초식이다.”
“…….”
“무영살검류의 바탕은 무연심공이지만, 초식을 발휘하는 데 발판으로 삼는 보법은 무엇이냐.”
“월야무영(月夜無影).”
“월야무영과 쌍벽을 이루는 것은 무엇이냐.”
“은형무(隱形霧).”
반적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기초적인 것들이지만, 일단 읽었다면 허투루 넘겼을 아이가 아니다. 각각의 무공에 관련된 구결과 동작들 모두가 이미 저 아이의 머릿속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일단은 그것만으로 큰 성과다.
“이제 말씀해 주시죠. 어머니가 왜 돌아가셨는지.”
“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았다.”
“아들에게까지도 사기를 치는 겁니까.”
“네가 뭐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반사영은 다시금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치 어머니의 죽음을 이용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참을 수가 없었다.
“뭡니까. 그 한 가지.”
“네가 천검맹으로 가는 것이다.”
“…….”
“내가 준 추천서를 가지고 그곳에서 새 삶을 살아라.”
“정말…… 천검맹에서 짤리기라도 하신 겁니까.”
“앞으로 돌아갈 일은 없다는 것만 알아 둬라.”
아버지가 천검맹에서 근무를 할 수 없는 것과 자신을 천검맹으로 보내려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대체 왜 저토록 아들을 천검맹으로 보내려는 것일까.
너무나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하는 행동들이 모조리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들뿐이다.
하지만 반사영은 어떻게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유를 알아야만 했다. 늘 건강하시던 분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유명한 의원들조차 고개를 가로젓는 병에 걸렸다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다.
만약 어머니의 죽음이 무림인인 아버지의 개인적인 은원으로 벌어진 일이라면 분노를 참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반사영은 직감적으로 무림의 은원 관계와 연관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반적풍은 마지막 자신의 계획을 말해 주지 않고 집을 나섰다. 그가 향하는 곳은 곽씨의 집이었다.
***
“며칠 안으로 저 녀석은 이곳을 떠날 겁니다.”
“하루 만에 설득을 한 건가?”
“제 어미가 어찌 죽었는지에 대해서 말해 준다고 하니 순순히 제 말을 듣더군요.”
“자네는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군.”
반적풍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밖에는 없지 않겠습니까.”
“흐음. 워낙 잔악한 놈들이긴 하지.”
“게다가 점조직으로 활동 중이라 꼬리를 잡는 것 또한 불가능하죠.”
“죽은 사람만 억울할 뿐이지. 그 아이가 자네 상태에 대해서도 알고 있나.”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걱정해 줄 정도로 부자지간에 정이 돈독하지도 않고요.”
반적풍은 자조 섞인 미소를 머금었다.
“알겠네. 그럼 나도 떠날 채비를 하고 있겠네.”
“감사합니다.”
***
반적풍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반사영이 아이들 앞에서 글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다. 아이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지붕 아래를 가득 채운다.
반적풍은 아직 앳된 아이들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번졌다. 배우고 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공자가 지은 논어의 구절을 떠올린 반적풍의 눈은 어느새 온기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그 눈길이 닿은 사람은 반사영이다. 갓 걸음마를 배우기 시작할 때가 아직도 선명했다. 그런 아들이 어엿하게 성장해서 아이들의 선생이 되어 있다니.
직접 보고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 저 아이의 마음을 아비인 자신이 짓밟아야만 하는 현실이 무겁기만 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목숨보다 귀하지는 않은 일이다. 사실 반적풍은 아내와 아들이 머물던 곳에 수하를 심어 뒀다. 물론 그 수하는 아내를 마지막으로 진료했던 의원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수하는 아내가 독살되었다는 사실을 전해 줬고, 아내를 치료한다는 목적 아래 열흘 정도를 함께 머물렀다. 물론 반사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아내의 장례를 마치고, 반사영이 이곳으로 오기까지 먼 곳에서 반적풍의 노력이 있었다. 수하들이 여행객으로 변신해 반사영이 무사히 이 도시로 올 수 있도록 힘을 썼다.
당장이라도 아들을 보기 위해 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저들이 노리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이 누군가의 곁에서 떨어지길 바라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자신은 곧 죽을 몸이 되었다. 하지만 저들은 아들마저도 죽일 것이다. 자신의 손에 죽어 간 동료들의 원수를 갚을 심산일 것이다.
한때 함께 일했던 동료라면 믿을 만했다. 반사영을 무사히 천검맹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그곳으로 가면 그래도 이곳보다는 안전할 거라는 게 반적풍의 생각이었다.
“제법이구나.”
“정말…… 제가 천검맹으로 가야만 합니까.”
“아비의 부탁이다.”
반사영은 머리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잘 굴러간다.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났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을 빌미로 자신에게 무공을 전수해 줬다. 물론 이론적인 것이지만, 내공이 받쳐 주고, 수련만 집중적으로 한다면 어느 정도는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천검맹으로 가라고 한다.
아마도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저렇게 부탁할 정도라면 자신의 안위와 관련된 일임이 틀림없다.
자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받아들여야만 했다.
지금까지 읽었던 무림에 대한 책에서 무조건적으로 나왔던 것이 있다. 은원 관계. 그것은 어느 한쪽이 끝내고 싶다고 해서 끝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후손에 후손까지도 이어질 수 있는 것이 바로 무림의 은원 관계임을 반사영도 알고 있었다.
그 공포를 직접 느낄 줄은 몰랐다.
“뭐부터 하면 됩니까.”
“들어오거라.”
반적풍은 반사영과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지금부터 무연심공의 모든 구결을 알려 줄 것이다.
방 안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지만 반적풍은 전음을 이용했다. 물론 전음을 사용할 줄 모르는 반사영은 잠자코 듣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알고 있고, 지금까지 해 왔던 무연심공은 반토막짜리다. 후반부가 잘린 것이지. 네 어머니가 구결을 알려 줬을 게다. 무연심공의 완전한 구결을 알고 있는 자는 나 말고는 없다. 무공 전승자에게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반사영은 잔뜩 심각해진 반적풍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운기 자세를 잡아라. 그리고 아비가 들려주는 구결을 머릿속에 집어넣어라. 무연심공에 특성상 잊어버릴 일은 없을 것이니 마음을 차분히 해라.
반사영의 귀로 무연심공의 구결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반사영은 구결을 들으며 내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잡생각은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진다. 무연심공의 기운은 청아함이다.
세속에 탁한 기운은 침범할 수 없는 맑은 기운이 반사영의 온몸을 구석구석 훑기 시작했다.
반사영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기운이 몸에 돌자 당혹스러웠다. 지금까지 무연심공을 운기할 적에는 공기 좋은 산을 걷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대로 그건 완전하지 않은 성질이었다. 완전한 구결을 따라 운기를 하자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천산을 거니는 기분이다.
―나무가 보이느냐.
반사영은 하늘을 덮은 커다란 나무 앞에 서 있었다.
―그 나무가 지금 너의 단전에 자리 잡은 내공이다.
반사영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무공 서적에도 단전에 모인 내공이 저렇게 거목처럼 생겼다고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커다란 내공을 지녔다 하더라도 네 몸에 존재하는 기경팔맥은 대부분이 막혀 있는 상태다. 지금부터 내가 네 몸의 기운을 조정해 그 막혀 있는 맥을 뚫을 것이다.
반사영은 아버지의 손길이 닿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흐읍!’
반사영은 단전 깊숙한 곳에 가둬져 있던 엄청난 기운이 튀어나오자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