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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존 1권(5화)
1장 무영서생 반사영(班査英)(5)


―겁먹을 것 없다.
단전을 빠져나온 기운은 대맥(大脈)에서 두세 바퀴를 돌았다. 막힘없이 유유히 선회한다. 반사영은 몸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향하기 시작했다.
음교맥, 양교맥, 음유맥, 양유맥 순으로 기운이 막힌 네 곳을 뚫었다. 반적풍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반적풍은 기를 다시 대맥으로 끌어 올리더니 수직으로 상승시킨다.
“크으읍!”
태어나 이토록 뜨거운 기운을 느낀 건 처음이다. 반사영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반적풍 또한 집중한 표정이 역력하다. 지금 반사영의 기운이 독맥(督脈)을 뚫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척추를 따라 올라가는 곳이므로 자칫 방심했다가는 반사영은 평생 불구자로 살아갈 수도 있었다. 본래 이런 식으로 타인의 기경팔맥을 뚫어 주는 일은 굉장히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운기를 하는 사람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양의 내공을 소유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문제는 반적풍에게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 하루 만에 남은 맥을 뚫어야만 했다.
우는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독맥 주변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뚫어야만 하는 부분이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반사영의 고통은 극에 다다랐다. 온몸이 타 버릴 것만 같았다.
최대한의 정신력으로 버티는 중이다.
반적풍도 반사영이 느끼고 있을 고통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집중력을 발휘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후우.’
반적풍이 의도한 대로 독맥이 뚫렸다. 이제부터는 속전속결이다. 인간의 신체 중 가장 크고 넓은 부피를 자랑하는 독맥이기에 시간이 지체됐다.
하지만 남은 임맥(任脈), 충맥(衝脈)은 섬세함보다는 힘 있게 뚫어야만 했다. 이윽고 반적풍은 자신의 내공과 반사영의 내공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나머지 두 맥을 뚫었다.
“하아아.”
드디어 끝이 났다.
반적풍은 모든 기력을 소진해 버렸다. 반면 반사영은 몸 안에서 감당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태산을 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반사영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내공을 전수해 줬음을 알고 있었다. 무공 서적에서 본 적이 있었다. 타인에게 자신이 지닌 내공을 모조리 옮기는 작업을 방금 마친 것이다.
지금 아버지의 단전에는 한 줌의 내공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무인에게 내공이 없다는 건 사형선고를 받은 일과 다름없다고 본 기억이 났다.
어느새 잠이 든 반적풍을 보는 반사영의 시선에 슬픔이 가득했다.



2장. 이별(1)


반사영이 눈을 뜬 건 만 하루가 다 지나서다.
이제 막 동이 트고 있었다.
‘일어나라, 어서…….’
어디선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꿈결에서 들리는 불확실하고 명확하지 않은 음성이다. 반사영은 분명 꿈속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깨우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좋은 말할 때 일어나라.”
감겨져 있던 반사영의 눈이 부릅떠졌다.
“커헉!”
배를 지그시 누르는 통증과 동시에 반사영은 자연스럽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꿈이 아니었어?”
눈앞에 아버지가 떡하니 있는 걸 보니, 귓가에 울리던 목소리는 꿈이 아닌 모양이었다.
“꿈같은 소리 한다. 내공을 전수해 주고 기경팔맥까지 다 뚫은 아비도 반나절 만에 일어났는데, 공짜로 그 대단한 대접을 받은 자식 놈이 하루나 다 돼서 깨어나?”
반적풍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임을 반적풍도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엄청난 양의 힘이 몸으로 밀려 들어오면 기존에 있던 육체나 단전이 급격하게 피로해지고,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전부였던 내공이 대부분 소실된 상태에서 반사영이 단꿈을 꾸는 얼굴을 하고 있자 괜스레 부아가 치밀어 오른 탓이다.
그걸 모르는 반사영으로서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분명 지쳐 잠든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몸은 어떠냐?”
반사영은 정신을 차리고 몸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라…….”
반사영은 남들보다 건강에는 늘 자신이 있었다. 제대로 된 보양식을 따로 챙겨 먹지 않아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었다. 그게 무연심공 때문이라고 어머니가 말을 해 준 기억이 났다. 한데 지금의 몸은 단순히 건강하다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뭐랄까……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고 할까. 마음만 먹으면 도망가는 토끼나 쥐 같은 것들도 쉽게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주체 못할 힘도 느껴진다. 맨주먹으로 바위도 박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모든 오감이 열린 탓인지 이전과는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집 밖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어떤 생물이 있는지도 본능적으로 알 수가 있을 정도다.
하루 만에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가 반사영은 낯설기만 했다.
반적풍의 얼굴에는 편안함이 자리했다.
평생을 무인으로 살아오면서 지녔던 내공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로 옮겨져 갔다. 텅 비어 버린 단전을 느껴 본 경험은 처음이다. 믿기지 않게도 마음은 가벼웠다.
아마 아들에게 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지난 시간 피비린내 나는 생활이 끝났다는 기분이 반적풍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있는 것이리라.
반사영이 오늘 경험한 과정은 결코 하루 만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수년 동안 진행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제 반사영은 무림인으로서 지닐 기본을 갖추게 되었다. 아직 무공에 대한 개념은 없지만 영특한 아이니 어렵지 않게 일류 무인의 반열에 들 것이다.
하지만 반적풍은 아직 자신의 일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따라와라.”
“어딜요?”
“무식하게 내공만 많다고 다가 아니다.”
반적풍은 반사영을 데리고 자신이 올랐던 산으로 갔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좋은 것 같구나.”
반사영은 입술만 움직일 뿐, 물어보고 싶은 질문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곳에서 서로 처음 만났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은 이곳에 와서 아버지를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언제가 됐든 아버지를 기다리라는 말이 다였다. 이 마을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어떤 의미를 가진 장소였는지는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궁금하냐?”
“뭐가 말입니까.”
“네 어미와 내가 어찌 만났는지.”
“낯간지럽게 그런 걸 왜 궁금해합니까.”
반사영은 속내를 들킨 걸 감추기 위해 일부러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궁금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매정한 놈 같으니.”
반적풍은 사방이 탁 트인 공터로 반사영을 데리고 갔다.
주위를 둘러보던 반적풍은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가져와 반사영에게 건넸다. 그러더니 이내 멀찌감치 떨어져서 반사영과 마주 봤다.
“뭐하자는 겁니까.”
“머리 좋은 거 맞는 거냐. 척 보면 딱이지 않아? 지금 너와 비무를 하려는 거다.”
“하!”
반사영은 기가 막히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태어나서 목검 한 번 쥐어 본 적이 없는 자신이다.
물론 자랑은 아니지만, 지금 들고 있는 굵은 나뭇가지조차 들어 본 경험이 없었다. 누군가와 싸움을 해 본 적도 없거니와 상대를 때려눕혀 버리고 싶다, 라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건 머리가 텅 빈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해 왔던 반사영이다.
아무리 단전에 내공이, 그것도 어마어마한 양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런 힘을 표현해 내기에 몸은 익숙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능글맞은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버지라고는 하지만 왠지 보고만 있어도 얄미운 존재다.
게다가 손을 들어 까딱까딱거리는 행동은 절로 살심이 피어오를 만큼 자극을 주기에 충분했다.
“내 단전이 이제 텅텅 비어 있다. 뭐, 이제는 농사나 지을 힘밖에 남지 않은 셈이지.”
“그 대단한 내공을 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그러니 생색낼 생각은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이냐. 설마 쫄아 있는 건 아니겠지. 하긴 서책에 파묻혀 있던 놈이 비무라는 걸 알긴 하겠냐. 일개 무명서생 따위가 무인들만의 전유물인 비무가 뭔지는 모르겠지.”
반사영의 눈썹이 역 팔자를 그렸다. 함께한 시간보다 떨어져 지내 온 날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성격을 귀신같이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한다는 것을 말이다.
“비무라는 거…… 멍청한 작자들만 한다고 생각하는 아니겠지, 설마.”
“…….”
“어라? 표정을 보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구나.”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네요.”
“무공은 단순히 육체적인 능력으로만 하는 건 아니다. 비무건 실전이건 간에 상대를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서 매 순간순간 공격을 바꾸는 거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정확한 상황 판단을 내리는 머리가 있어야 하고, 그 결정을 따르려면 빠른 행동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무공은, 아니 네놈이 우습게 여기는 비무는 머리와 몸의 능력이 합쳐서 나와야만이 가능한 일이라는 소리지. 너처럼 책만 파던 놈에게 내가 준 내공은 지금으로서는 무용지물인 셈이다.”
반사영은 반박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기 때문이다.
단전에는 당장이라도 태산을 부술 만큼 엄청난 힘이 존재하고 있다.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그 대단한 기운을 절제하지 못하면 육체는 터져 버릴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걸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그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을 모른다. 몸을 움직이려고 하면 자연스럽지 못하고, 쭈뼛쭈뼛거릴 게 틀림없었다. 그런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안 됐다.
아버지와의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발이 움직이지가 않았다. 겁을 먹고 있는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결국 반사영은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바닥에 내던져 버렸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겨우 이런 거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적풍은 그런 반사영을 보며 더 이상 자극하는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많은 걸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반적풍은 천천히 반사영에게 아주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서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검을 잡는 손목의 각도, 발의 위치. 지금과 같이 비무를 벌일 때 어떻게 상대를 파악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건 타고난 머리나 무지막지한 내공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경험이 많은 스승이 옆에서 지도해 줘야만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반적풍은 그동안 아들에게 해 주지 못했던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아들인 반사영이 조금이라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렇게 그날 하루가 빠르게 저물어 갔다.

기본적인 자세의 교정은 계속 이어졌다. 본래 기본기라는 건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해 오는 것이 무림인들의 특성이다. 그래야 나중에 가도 본능적으로 그 자세가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사영은 남들과는 다르게 머리가 총명했다. 그리고 의외로 운동신경이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반적풍이 만족할 수준이 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기본자세를 배우고 나서는 내공을 운용하는 법을 일러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단전에 저장된 엄청난 내공의 힘을 조절하는 법도 가르쳐 줬다. 반사영은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정말로 이해력이 빨랐다.
대개 무공을 배울 적에 몸으로 하는 기본기보다 더 어려운 부분이 내공을 운용하고 조절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반사영은 반대였다. 기본기를 배울 적에 버벅거리던 얼뜨기 같은 행동은 보여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