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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존 1권(6화)
2장. 이별(2)
툭.
반사영의 발 앞으로 목검이 굴러 왔다.
“이번에는 덤비기라도 하겠지. 그렇지?”
반적풍의 도발에 반사영은 무덤덤했다. 지난 사흘 동안 간간이 자신을 자극하던 아버지의 비아냥거림은 이제는 익숙해졌다.
반사영은 목검을 집어 들었다. 한낱 무명서생이 들기에 목검은 묵직했다.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그 물건을 잡고 자세를 취했다.
“하아압!”
비무에서는 내공을 운용하지 않기로 했다. 기본기도 완전히 숙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처음부터 내공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반적풍의 조언 때문이다.
파박!
순식간에 반적풍의 코앞까지 달려들던 반사영은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목검을 대각선으로 내리그었다.
후왕!
목검이 허공을 갈랐다. 한 번에 치명타를 입힐 생각은 없었기에 반사영은 당황하지 않고 반적풍의 위치를 재빨리 찾았다.
“뭐하냐.”
“……!”
그 짧은 시간에 반적풍은 반사영과의 거리를 벌려 놓았다. 엄청난 움직임이다.
“저보고는 내공을 쓰지 말라면서, 뭐하는 짓입니까.”
“너보고 쓰지 말라고 그랬지, 내가 쓰지 않는다고는 안 했다.”
으드득.
아무리 아버지라지만 저 얄미운 입은 어떻게든 막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반사영은 다시 반적풍에게로 달려들어 목검을 휘둘렀다. 이번에 반적풍은 멀찌감치 도망가지는 않았다.
반사영은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목검을 휘둘렀다. 말 그대로 형식적이고, 정직하게 말이다.
“쯔쯧. 하품이 다 나오려고 그런다.”
빡!
반적풍의 발이 반사영의 정강이를 시원하게 걷어차 버렸다.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나? 상대를 파악하고, 그때그때마다 공격법을 바꾸는 거라고. 지금 네놈은 정말 말 그대로 나는 여기를 공격할 테니 너는 재빨리 피해라, 라고 하고 있지 않느냐.”
하지만 반사영은 나름대로 최선이라 생각하고 목검을 휘두른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의 몸놀림이 빠른 것이지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거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목검을 휘두를 때마다 허공만을 가르자 점차 뭐가 문제인지를 알 것 같았다.
문제는 바로 발에 있었다. 무림인들에게는 보법이라고 불리는 그것을 활용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뻣뻣한 자세로 상체만을 움직이며 상대에게 목검을 휘두르니 맞을 리가 없었다.
반적풍이 정강이를 후려 찬 것도 다 그런 부분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었다.
“제법 눈치가 없지는 않네.”
그 뒤로 반사영의 몸놀림은 이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간간이 날카롭게 목검을 찌르고 들어오는 움직임도 보여 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반사영의 수준은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정도였다. 평범함과는 매우 다른 성장이었다.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지극히 어린 시절부터 이런 기본기를 배우는데 비해, 반사영은 이십 대 중반이다.
반면 남들은 중년이나 되어서야 얻을 수 있는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엄청난 내공을 얻은 것에 비해 이처럼 간단한 이치를 너무나 늦게 배우다니. 꽤나 특별한 과정을 겪고 있는 셈이다.
반 시진을 제멋대로 목검을 휘두르니 지치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반사영은 바닥에 대자로 누워 뻗어 버렸다.
“이래도 비무가 멍청한 놈들이나 하는 짓거리라고 생각하는 거냐.”
반사영은 대답할 힘도 없는 듯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기만 했다.
머리로는 이미 무영살검류의 모든 구결과 이치를 깨닫고 있었다.
한데 그건 말 그대로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몸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게 된다. 반사영은 아무 생각 없이 집어넣은 그 무공들이 직접 펼치기에 얼마만큼 어려운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이렇게 아무런 초식도 없이 목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내공을 운용하면서 누군가와 비무나 실전을 벌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머리와 몸이 지극히 따로 놀고 있는 형국이었다.
“잘 들어 둬라. 제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경험이 부족하면 몇 수 뒤지는 무인에게도 얼마든지 패배할 수가 있는 법이다. 그건 학자와 무인에게도 통용되는 진리다. 제아무리 머리에 든 것이 많은 학자라 할지라도 그걸 써먹을 수 없다면 무용지물인 셈이지.”
“…….”
“초식을 펼치는 데 팔 할은 보법에서 나온다. 보법이 흔들리고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자연스럽지 못한 움직임으로 힘만 빼먹고 금방 지치게 된다.”
반사영은 묵묵히 반적풍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반응이 없으니 반적풍으로서는 심심하기만 했다.
“해 떨어진다. 가서 저녁 차려야 하니 일어나라.”
반사영이 말없이 일어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내일부터는 무영살검류를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배울 것이다.”
반사영의 어깨는 축 늘어졌고, 반적풍은 그런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기를 죽였나.”
하지만 자신이라고 이렇게 빠른 속도로 반사영에게 무공을 가르치고 싶을 리가 없었다.
중요한 건 짧은 시간 안에 중요한 것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알려 주느냐다.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하루하루가 중요했다.
“쿨럭!”
입 밖으로 한 움큼이나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내공이 물밀 듯이 빠져나가자 상태는 더욱더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점점 더 조급해져만 갔다.
스스슥.
반적풍의 신형이 순식간에 네 개로 늘어났다.
“커헉!”
옆구리로 목검이 찌르고 들어오는 걸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반사영은 통증을 느끼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게 바로 월야무영이다. 무영살검류의 초식을 펼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월야무영을 온전히 네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초식이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죽어 버리지.”
“그냥 월야무영만 펼쳐 보였어도 되는 거 아닙니까.”
얼굴을 가득 구기며 반사영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를 보던 반적풍이 씩 웃음을 머금으며 다시 몸을 움직여 달려들었다.
“끄윽!”
반적풍은 정확히 방금 찌른 부위에 목검을 가져다 댔다.
“어떠냐. 이번에는 월야무영을 사용하지 않은 채 가격했다. 힘의 세기는 똑같이 말이다.”
반사영은 방금 전처럼 바닥을 나뒹굴지 않았다. 무릎만 반쯤 꺾였을 뿐이다.
통증이 훨씬 반감된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보법을 펼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빠름이 아니다. 강약 조절. 근접거리에서 상대와 맞닥뜨릴 경우 순간적으로 빠르게 움직이기도 하지만,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서는 느리게 움직이기도 하는 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천수만 번의 숙련된 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반사영도 느끼고 있었다.
반복적으로 몸을 길들이지 않는다면 아버지와 같은 몸놀림을 펼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쨌거나 반사영은 본의 아니게 무림인으로서의 기본 과정을 배워 나가고 있었다.
그건 지금까지와는 너무나 다른 삶이었다. 낯설긴 했지만 이제 와서 외면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노력이라는 걸 할 생각이었다.
안 하면 안 했지 직접 발을 담근 이상은 만족할 수준까지 밀어붙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얼추 삼십 년 가까이 됐을 거다.”
반적풍이 무심한 투로 입을 열었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 가고 있었다.
“나름 본 맹에서는 은밀한 일을 자주 맡다 보니 늘 부상을 당하고, 가끔은 작전을 함께하던 동료들과도 떨어져 혼자 살아남는 경우도 다반사였지.”
반사영은 묵묵히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신분은 천검맹 말단 무인이었다.
하지만 반사영은 사실이 아니라고 받아들였다. 말단 무인이 이만한 무공을 지녔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무림이라는 세상을 직접 경험해 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대충 눈치챌 수 있는 것이다.
“부상과 더불어 작전을 함께 실행하던 동료들과도 떨어져 여기로 왔지.”
“어머니가 치료를 해 줬고, 그런 과정에서 젊은 두 남녀가 사랑에 빠졌다는 뻔한 이야기를 하실 생각입니까.”
“아직 내 손에는 목검이 들려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반적풍이 정말로 목검의 끝을 까딱거리자, 반사영의 몸이 움찔거렸다.
“처음에는 워낙 부상이 깊은지라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컸다. 네 엄마가 그렇게 빼어난 미모를 지닌 것도 아니었고.”
“저 위에서 듣고 계시면 아주 좋아라, 하시겠네요.”
“그 사람도 인정하는 바이니 크게 신경 쓰지는 않을 것 같구나. 사흘쯤 사경을 헤매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네 어미가 옆에서 지쳐 잠들어 있더구나.”
“거기서 한눈에 뻑 간 거군요.”
“책 좀 읽었다는 놈의 표현치고는 저급하구나. 그리고 한 번만 더 내 말에 끼어들면 죽는다.”
반사영은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사실 무림인은 살아가면 언제, 어느 때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생활의 연속이지. 해서 나는 절대로 가정을 이룰 생각은 없었다. 이건 정말 진심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을 애써 무시해 왔지. 하지만 지극 정성으로 나를 보살펴 주는 마음에 나도 그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보쌈을 해 가셨다?”
“나를 만나기 얼마 전에 유일한 혈육이던 부친이 돌아가시자 혼자가 되어 나와 함께 도시로 올라온 것이다.”
“거기에 강압적인 힘이 작용했습니까?”
“무슨 상상을 하는 거냐. 물론 서로가 합의하에 이뤄진 과정이다.”
“그래서요?”
“그 사람은 나에 대해 아주 많은 부분을 이해해 줬고, 그리고 희생해 줬지.”
“…….”
“늘 미안했다. 네가 태어나던 날에도 난 천검맹에 있었고, 처음으로 걸음마를 떼던 그날도, 네 어미가 아프고 외로워하던 수많은 날들의 대부분 난 곁에 있어 준 적이 없었다. 그건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을 테지. 무림인을 사랑한 여인으로서 겪어야 할 당연한 현실 말이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반적풍과는 달리 반사영의 입술이 뒤틀렸다.
“변명을 늘어놓을 거라면 그만하시죠. 늘 밖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모습을 지켜보며 자란 제 앞에서는 그저 자기합리화일 뿐이니까요.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제대로 지켜 주지도 못할 거면서 어머니를 택하신 건…… 이기적인 행동이었으니까.”
“…….”
반적풍으로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반사영의 말대로 지금 자신은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자신을 원망만 하고, 닫혀만 있는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서였다.
“그만하죠. 이런 진부한 얘기는.”
“나도 안다. 내가 지금 얼마나 뻔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한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
“미안하다는 말…… 네 어미에게도, 너에게도 꼭 하고 싶었다. 이 말은 내 진심이다.”
반사영은 끝내 뒤돌아보지 않고 먼저 산을 내려갔다.
“이제 와서…… 너무 늦었어요, 아버지.”
반사영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느새 눈물로 앞이 뿌옇게 변해 버렸다.
이런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 매정하게 뒤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말이 진심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마음의 문을 열기엔 지난 시절의 아픔과 외로움이 너무나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