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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존 1권(7화)
2장. 이별(3)


반사영의 수련은 다음 날 이어지지 못했다. 두 부자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반적풍의 몸 상태가 지극히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반사영에게는 대충 둘러대고, 혼자 산에 올라 수련을 하고 오라는 말만 했을 뿐이다.
반사영이 집을 떠나자, 반적풍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자신의 몸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이미 상체는 물론 하체마저 몸이 썩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예상보다 더 빨랐다. 지금까지는 반적풍 스스로가 지닌 내공으로 인해 속도를 늦출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반사영에게 전해 준 내공의 양은 삼분지 이에 해당했다.
전부를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갑작스럽게 내공이 빠져나가면 그만큼 몸에 중독된 독이 퍼지는 걸 막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부를 줬더라면 이미 시신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중독된 독은 육체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몸 안에 장기들마저도 독이 침투해 버렸다. 지금 가지고 있는 내공으로는 사흘을 버텨 내는 것도 기적이다.
내색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이미 몸 상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몸이 급속도로 피곤해지자 졸음이 몰려왔다.
왠지 눈을 감으면 다시는 눈을 뜰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밖으로 나왔다.
마당이 보이는 곳에서 반적풍은 반사영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만 나오시죠, 선배.”
한참 동안을 멀뚱멀뚱 눈만 깜빡거리던 반적풍이 중얼거리자, 지붕 위에서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와 마당으로 내려앉았다.
“이런,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닌 모양이야.”
반적풍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이었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혹시…….”
“맞아. 자네가 생각하는 게.”
“언제부터였습니까.”
“처음부터. 난 뼛속까지 그들 편에 있던 놈이지. 모든 게 계획되어 있던 일이다. 자네 아들을 이곳으로 보낼 것도 알고 있었지.”
“아내를 그렇게 만든 건 선배가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후후후. 아직 내게서 과거의 나를 볼 생각인가. 몸 둘 바를 모르겠군. 하긴, 자네가 내 생명을 구해 준 적이 여러 번 있었지. 곧 후회하게 될 거야. 그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은 것을.”
“곧 죽을 몸입니다. 굳이 선배가 나서지 않아도 말입니다.”
“여러모로 확실한 게 좋은 거니까. 그리고 자네…… 아직 내공을 남겨 두고 있지 않나. 예나 지금이나 조심성이 많은 건 여전하군.”
곽씨, 아니 곽대우(廓大禹)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선배야말로 단전이 파괴되었다는 건 거짓이었군요. 이런 살기를 뿜어낼 정도로 멀쩡한 것을.”
“후훗. 천검맹에서 나올 때 연기하느라 애 좀 먹었지.”
“그 모든 게 저를 죽이기 위함이었습니까.”
“뭐, 그런 셈이지.”
“제 아들놈까지 말입니까?”
“그건…… 자네를 처리하고 난 뒤에 고민해 볼 생각이네.”
곽대우의 양손에 파란빛이 감돌았다.
“어디 얼마나 버티는지 좀 볼까?”
반사영은 수련을 하러 산을 올랐다.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것이다. 어떻게든 그 시간까지는 버텨야만 했다.
반적풍은 남은 내공을 끌어 올렸다.
지금 상태로 곽대우를 죽이는 일은 불가능하다. 불과 며칠 전이라면 곽대우 정도의 목숨을 끊는 건 일도 아니었다.
좀 더 조심을 했었어야만 했다.
스스슥!
반적풍은 월야무영을 펼쳤다. 그 순간 곽대우의 눈에는 그의 신형이 네 개로 보였다.
곽대우가 아는 한 월야무영은 최고의 보법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곽대우는 여유가 있었다. 함께 사선을 넘으며 지내 왔던 반적풍이다. 그의 작은 습관도 기억하고 있었다.
쉬리릭!
어느새 뽑힌 반적풍의 검 끝은 허공을 갈랐다. 곽대우의 몸이 핑그르르 돌아서 그의 검을 피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반격.
내공으로 무쇠보다 단단해져 있는 곽대우의 주먹이 반적풍의 등 뒤를 가격했다.
쾅!
“이거야 원, 그동안의 명성은 다 어디로 간 건가.”
반적풍의 무릎이 꺾여 있었다. 하지만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의 검이 낮게 깔려 그어졌다. 검의 궤적이 정확하게 곽대우의 종아리를 베었다.
“크윽!”
방심하던 곽대우는 재빨리 피한다고 피했지만, 피를 봐야만 했다.
“조금…… 분발하셔야겠습니다, 선배.”
반적풍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

수련을 하러 간다고 했지만, 반사영은 산을 오르지 않았다. 자신의 애제자인 소아네 집으로 향했다. 조금 피곤하다며 함께 수련 장소로 가지 않은 아버지를 위해서였다. 그저 눈치로도 아버지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입술은 퍼렇게 물들어 있었고, 얼굴은 핏기가 없었다.
아마 갑작스럽게 엄청난 양의 내공이 빠져나간 탓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반사영은 소아의 어머니에게 보양식을 좀 만들어 주길 부탁했다.
평소 소아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데 고마워하고 있던 소아의 모친은 흔쾌히 음식을 만들어 줬다.
“요즘 매일 어딜 그렇게 가세요?”
반사영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나면 바로 반적풍과 산을 올랐다. 소아의 입장에서 존경하는 반사영의 변화된 행동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운동하러.”
“여러 번 봤어요. 해가 지고 나면 돌아오는 스승님을요. 그런데 얼굴이 항상 피곤해 보이고, 지쳐 보였거든요.”
“세상에 쉬운 게 없다는 걸 좀 배워 가고 있는 중이다.”
“네?”
반사영은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소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소아는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
“아뇨…… 잘.”
소아가 태어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쩌면 처자식을 버리고 도망갔을 수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걸 반사영도 들은 적이 있다. 소아라고 해서 그런 이야기를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나이는 어려도 또래 아이들보다는 좀 성숙하고, 총명한 아이다.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겠구나.”
“원망하지 않아요.”
“왜 원망하지 않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니까요.”
반사영은 잠시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이내 빙긋 웃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이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진리를 스승인 자신은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 기가 막혔다.
반사영이 다시 한 번 기특하다는 듯 소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소아의 모친이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몸이 좋지 않으신 모양이에요.”
“네, 뭐.”
“이걸 드시고 좀 괜찮으셨으면 좋겠네요.”
반사영은 아직도 아버지가 원망스럽고, 마주 보고 있으면 어머니가 생각나 괴로웠다. 하지만 자신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내공을 줬기 때문에 기력이 쇠해졌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원한 건 아니지만 그 중요한 내공을 받은 것에 미안함이 들 수밖에 없었다.
소아 모친의 바람대로 아버지가 이 음식을 먹고 조금이라도 기력을 되찾기를 바랐다. 아픈 사람을 미워해 봤자 자신만 옹졸한 인간이 될 테니까 말이다. 들뜬 마음으로 반사영의 걸음이 집으로 향했다.

반사영은 들고 있던 요리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마당은 이미 짙은 혈향으로 가득하다. 누군가의 피로 땅바닥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 중심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고 서 있다.
두 명 다 반사영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한 명은 아버지다. 아버지 반대편에 있는 남자는 곽씨다. 이 마을에서 자신과 알고 지내던 순박한 농사꾼의 모습이 아니다.
그의 몸에서는 가공할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반사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상황이 단번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두 사람이 이렇게 잔인한 싸움을 벌이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장 큰 충격은 곽씨 아저씨가 무림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저렇게 엄청난 기운을 지닌 사람이 이 시골 마을에서 농사나 지으며 살고 있었다니.
“아……버지.”
반적풍의 몰골은 가히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옷은 넝마가 돼 있는데다 몸의 절반은 피로 얼룩이 져 있었다.
“끌끌. 이제 자네 아들이 왔으니 끝을 낼 때가 왔군.”
짐짓 여유를 부려 보지만, 곽대우도 출혈이 심했다. 반적풍이 이렇게까지 버텨 낼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독에 중독된 상태인데다가 지닌바 내공도 바닥인 그가 자신과 이토록 호각을 다툴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가히 충격적인 일이다. 만약 반적풍을 죽이는 일을 조금만 더 서둘렀다면, 이미 자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동안 같은 편에서 활동하느라 모르고 있었다. 반적풍이 지닌 막강한 힘을 말이다. 그는 타고난 무인이자, 살수였다.
하지만 이제는 반적풍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더 이상의 이변은 없을 것이다.
“너는 뭐하고 있느냐. 어서 도망치지 않고.”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가 그 모양인데 아들인 저보고 비겁하게 도망이나 치라는 말입니까.”
“네까짓 게 무슨 도움이 될 것 같으냐.”
반적풍은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닦으며 비웃음을 흘렸다. 반사영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미 몸 안에 내공이라는 게 존재하고, 아버지가 준 무공에 대한 지식도 머리에 존재했다.
한데 이걸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머리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상황에서 반사영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사이 곽대우가 몸을 움직였다. 그의 목표는 반적풍이 아닌 반사영이다. 곽대우는 이번 행동으로 반적풍을 끝낼 심산이었다. 반적풍도 동시에 몸을 날렸다.
곽대우는 달려드는 척하다가 품에서 암기를 꺼내 날렸다.
쌔애액!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두 개의 비도가 정확히 반사영의 심장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반사영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분명 머리는 움직이라고 강한 경고음을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은 움직이지가 않는다. 온몸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이대로는 죽는다. 죽을 것이 뻔했다. 피해야만 한다.
반사영의 눈동자가 우측으로 돌아갔다. 반적풍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암기와 동등한 속도였다.
동시에 반사영은 아버지에게로 주먹을 내지르는 곽씨의 모습도 봤다. 아버지에게 피하라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입조차 벌어지지 않는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한심할 지경이다.
반적풍의 검 끝이 아슬아슬하게 비도의 방향을 틀었다. 그중 하나는 반사영의 어깨에 박혔다. 그래도 목숨은 살릴 수 있었다. 물론 반적풍의 희생이 따라야만 했다.
쾅! 쾅! 쾅!
둔탁한 무엇인가로 건물을 때려 부수는 소리가 울렸다. 반사영은 처음으로 날카로운 것에 찔린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그 광경을 두 눈에 담았다.
곽대우의 주먹에 맞은 반적풍은 입 밖으로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기혈이 뒤틀리고, 내장이 파괴되어 버렸다. 흔들리는 초점에서도 그는 아들의 안위를 살폈다.
“미안하네. 내가 할 수 있는 배려는 고통을 멈추게 해 주는 거라고 생각하네. 잘 가시게.”
곽대우의 양손이 살짝 반적풍의 머리에 올려졌다.
펑!
한 호흡을 들이쉬고 내뱉을 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이 지나자 반적풍의 머리가 날아갔다.
“아…… 아…….”
반사영은 어깨에 박힌 비도로 인한 고통을 잊어버렸다. 아버지의 머리가 터져 버린 모습은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충격으로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곽대우가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으마. 나와 네 아비가 사는 세상은 본래 이렇게 잔혹한 것이니. 분하고 억울하다면, 훗날 네가 강해져서 내 심장에 검을 박아 넣어라.”
그 말을 끝으로 곽대우는 점혈을 눌러 반사영을 기절시켰다. 그러고는 유유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