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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존 1권(8화)
2장. 이별(4)
***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마른 땅도 빗물로 인해 질퍽였다. 반사영은 누런 천으로 꽁꽁 싸맨 시신을 등에 업은 채 산을 올랐다. 반사영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신기한 건 몸에 박혀 있던 비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자리에 있을 상처마저도 없었다. 마치 꿈을 꾼 게 아닐까, 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역시나 꿈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멀쩡하지 못한 시체로 버려져 있었고, 곳곳에는 치열했던 두 무인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반사영은 자신에게 들이닥친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저 마을 농부였던 곽씨가 무림인었다는 것과 아버지를 이토록 잔인하게 죽인 장본인이라는 게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더 가슴 아픈 건 아버지마저도 이제 자신을 떠났다는 것이다.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두 사람은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이제 이 세상에 정말로 홀로 남겨진 것이다.
반사영은 머리가 터지는 순간까지도 쥐고 있던 검을 시신과 함께 묻었다. 무인에게 자신의 무기란 하나의 신념이고, 자긍심이라고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다. 한데 그 순간에도 자신은 그저 힘없이 지켜만 봐야 했다.
반사영이 괴로운 건 바로 그 때문이다. 무력감. 가장 자신을 사랑해 주던 어머니가 돌아가실 적에도 반사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반사영은 무덤 앞에 무릎을 꿇은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의 절규는 날이 새도록 이어졌다.
***
반사영은 자신이 글을 가르치던 아이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그동안 읽어 왔던 무림에 관한 책 몇 권을 행낭에 챙겨 넣었다.
그건 아버지가 이곳으로 왔을 적에 들고 왔던 것이다. 안에는 상한 육포와 옷 몇 가지, 그리고 천검맹에 반사영을 추천하는 추천서가 있었다.
반사영은 대충 자신의 옷을 구겨 넣고 마당으로 나왔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재물이나 명예, 권력에 욕심이 없었다. 그저 배움이 좋았고, 그것에만 의존해 왔다.
하지만 힘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절정 무인으로 성장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본인이 있는, 가질 수 있는 힘의 종류는 무력이 아니다.
지금까지 욕심을 내지 않았던 재물, 명예, 권력을 손에 넣고 싶었다. 그래서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상대는 무림인이었으니 무림이라는 세상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어쨌거나 아버지의 뜻대로 천검맹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반사영은 그동안 지내 왔던 집을 둘러봤다.
그는 이 집을 마을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주기로 촌장에게 말해 둔 터다. 쌓아 두었던 책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 자신이 없어도 이곳이 훌륭한 배움의 터전이 되기를 바랐다.
대문을 열고 나오자 소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아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반사영은 애써 웃으며 소아를 안아 올렸다.
“서운하냐.”
소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울음을 터트릴 기세였다.
“멋진 한량은 슬플 때 웃을 줄 알아야 한다. 알겠지?”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네…… 스승님.”
소아는 힘없이 대답했다. 울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웃지도 않았다.
“자, 이제 저 안에 있는 책으로 열심히 학문에 매진하는 일만 남았구나. 다음에 만났을 때는 멋진 한량이 되어 있어야 한다.”
반사영은 소아에게 손을 흔들며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3장. 혼자만의 수련(1)
“쓰읍.”
반사영의 미간이 구겨졌다.
“분명 방금 지났던 길인데.”
촌에서 도시로 상경하는 풋내기 선비처럼 그는 지도와 주변을 번갈아 둘러봤다.
아무리 살펴도 분명 어제 지났던 길이다. 그건 틀림이 없었다. 기억력 하나는 누구도 자신을 따라올 수 없었다. 문제는 그 탁월한 기억력이 길을 찾아 나서는 것에 엄청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자신의 기억이 확실하다고 믿는 반사영으로서는 지금 엄청나게 곤혹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길을 잃어버린 건가.”
허탈한 얼굴을 하고서 반사영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지도를 보고 제대로 왔다. 자신이 바보도 아니고, 지도에 나와 있는 대로 길을 찾으면 되는 이토록 쉬운 일을 못 할 리가 없다. 반사영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도가 잘못된 거네. 빌어먹을.”
반사영은 절대로 스스로가 타고난 길치, 방향치인 걸 인정할 수 없었다. 그건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이처럼 명석한 머리를 타고난 자신이 기껏 길 하나 못 찾고 헤맨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
하지만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 매일같이 거기서 거기인 작은 동네에서만 다녔다. 방에 틀어박혀 책만 팠고, 바깥 구경을 등한시해 왔다. 태어나고 자란 곳도 그다지 번화한 도시가 아니었다. 당연히 이처럼 홀로 어딘가를 찾아가는 일에는 영 서툴렀다.
“하…… 하하하!”
지내던 마을을 떠난 지 반나절 만에 길을 잃었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어린애처럼 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짓을 한다고 누군가가 나타나서 도움을 줄 리도 없고 말이다.
그저 좋은 머리로 지도를 열심히 보며 연구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길이 저길 같고…… 돌아 버리겠네.”
그러고 보니 밖에서 노숙이라는 걸 해 본 경험이 없는 반사영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밤이 되어도 목적지인 인가를 찾는 일이란 불가능하다. 갑자기 노숙을 할 생각을 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더니. 큰일이네.”
갑자기 조급해졌다. 노숙을 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한지조차 몰랐다.
“……!”
그때 귓가로 금속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오감은 절정 무인들을 능가하는 반사영이었다. 소리가 미세하게 들리는 걸 보니 한참이나 멀리서 싸움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그 소리를 좇아 반사영은 부지런히 걸어갔다. 신법을 발휘할 수도 있었지만, 아직은 걷거나 뛰는 것이 편한 그였다.
일각 정도 걷자 소리가 점차 커져만 갔다.
“휘유우!”
반사영은 입을 떡 벌리고 언덕 아래 벌어진 참상을 내려다봤다.
집단과 집단을 이루는 무리가 병기를 들고 엉겨 붙어 싸우고 있었다. 그 광경은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참혹했다. 반사영의 눈에는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조차 모르고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
옷차림은 동물들의 가죽으로 걸쳐 입은 걸로 보아 이 산자락에서 주둔하는 산적들로 보였다. 반사영은 잔인하지만 눈을 뜨고 싸움을 지켜봤다.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을 세밀하고 자세하게 살폈다.
뭐든 도움이 될 것이 있으면 하나라도 더 배울 작정이었다.
하지만 반사영의 눈에 저들의 움직임은 너무나 형편없었다. 느리고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건 그의 오감이 극도로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보고 저들 무리에 껴서 싸우라고 한다면?
‘아직은 무리겠지.’
냉정하게 말해서 아직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상태로 천검맹으로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세상으로 나갈 준비가 덜 되어 있었다.
아버지에게 배운 기초만으로는 불가능했다. 크게 경험해 보지 않았지만, 무림이라는 곳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언제 어떤 사건에 휘말려 검을 들어야 할 상황이 올지 모르는 일이다.
발을 담그지 않았으면 모를까, 이미 무림이라는 세상으로 나아가려고 마음을 먹은 이상 어느 정도는 준비를 하는 것이 옳았다.
그 시험을 하기에 저들은 어쩌면 하늘이 준 기회일지도 몰랐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다. 저들의 움직임이 답답할 정도로 느리다는 게 자신감을 갖게 된 이유였다.
“후우!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하며 싸움이 끝나길 기다렸다. 연습 상대를 하기에 저들의 숫자는 많았기 때문이다.
일각 정도 시간이 흐르자, 두 세력 간의 싸움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모조리 죽일 때까지 끝나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긴장 어린 눈으로 지켜보느라 반사영은 시간이 가는지도 몰랐다.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다가 ‘그렇지. 그래, 그거야.’라고 하며 심하게 몰입해 가고 있었다.
그러길 여러 차례, 드디어 격전이 끝났다. 승리한 쪽에서는 함성을 내지르며 자기들끼리 자축하기 바빴다. 반사영은 자신이 나서야 할 차례가 왔음을 느꼈다.
한차례 격전을 치러 체력이 떨어진 자들을 연습 상대로 정했다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지만, 엄연히 저들은 힘없는 자들을 괴롭히는 산적 무리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죄책감 같은 건 싹 사라졌다.
“어이!”
빠르게 전리품을 챙기던 산적들의 손이 일시에 멈췄다.
“흠, 흠. 동작 그만.”
“뭐냐, 너는.”
남은 산적들의 수는 일곱이었다. 조금 가까이서 그들을 마주하고 서 있자니 머릿수가 주는 압박감이 생각보다 강해짐을 느꼈다.
“덤벼라.”
“……?”
누가 봐도 굉장히 어색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맞이한 산적들도, 만들어 낸 반사영도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반사영은 자신이 읽었던 무림서에서 본 그대로를 따라 했을 뿐이다. 반사영과 산적들은 한동안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덤비라니까, 이 자식들아!”
반사영은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리쳤다.
산적들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마치 뭘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그들은 반사영이 자신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소한 체구에 한 대 툭 치면 뼈가 부러질 만한 체형을 지닌 반사영은 산적들에게 좋은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제 발로 굴러 들어온 돈줄을 거부할 리가 없었다.
“막내야, 빨리 치워라.”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의 명령에 반사영과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섰다.
“알겠습니다, 형님.”
얼굴 가득 미소를 품은 사내는 병기도 들지 않고 맨몸으로 반사영에게 다가갔다.
“무기 안 들고 덤비게? 후회할 텐데?”
“또라이 새끼.”
“또라이? 설마 지금 나한테 한 말은 아니지?”
태어나 가장 모욕적인 말을 들은 반사영의 눈이 부릅떠졌다.
사내는 갑자기 나타나 이런 상황을 만든 게 굉장히 짜증나고 불쾌했다. 이제 막 승리의 전리품을 재빨리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눈치껏 몰래 값비싼 물건이 있으면 빼내야만 했다. 하지만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이 나타나 그 기회를 날려 버렸다.
“쉽게 끝낼 생각은 마라.”
그의 주먹이 쭉 뻗어져 반사영의 얼굴로 향했다.
쉬익!
공기를 가르며 나아간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당연한 일이다. 반사영이 아직 실전 경험이 전무하다고 하지만 맞아 주기에 산적의 주먹은 너무나 느렸다.
문제는 반격을 가해야 하는데, 몸이 제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적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긴장을 너무 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비쩍 마른 놈이 주먹을 이처럼 가볍게 피할 리가 없었으니까. 산적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전리품도 못 챙긴 마당에 이런 비실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그만한 망신살도 없는 일이다.
“이익!”
가까이 붙어 주먹과 팔꿈치를 연속으로 휘둘렀지만, 반사영은 미꾸라지처럼 피해 냈다.
“너무 느리다고.”
다시 한 번 같은 공격을 피해 낸 반사영은 정말이지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러 산적의 복부를 가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