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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에 당신을 만나 4화
1. 열아홉, 열하나 (4)
은형은 도제를 기다릴 거라 생각해서 미리 집 안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않고 그냥 나왔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보단 도제를 어떻게 부르지 고민하던 시간에 바로 나왔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어젯밤엔 분위기에 휩쓸려서 같이 등교하자 하긴 했지만 옆집 초등학생과 나란히 등교하는 고등학생은 자기네 학교에서 저밖에 없을 거라고 멍하니 생각하는 은형과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던 도제가 동시에 엘리베이터에 집중하게 된 것은 9층에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렸을 때였다.
문이 열리고 도제가 먼저 쪼르륵 들어갔다. 은형이 이미 몇 사람이 들어차있는 내부에 들어서서 도제 옆으로 갔다. 도제는 그런 은형을 올려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책가방 끈을 쥔 손을 꼬물거렸다.
등교와 출근이 맞물리는 바람에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두 번 더 멈추고 1층에 도착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사람들이 앞에 있는 바람에 은형이 못 나오고 주춤하는 사이, 어른들 사이로 빠져나간 도제가 바깥에서 양복을 입은 아저씨 둘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은형의 팔목을 잡았다.
“……?”
그제야 뒤에 있는 학생에게 자리를 비켜 준 아저씨들 사이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오. 도와준 거야?”
사실 잠깐 주춤한 것뿐이지 이 정돈 아침마다 일상이라 충분히 혼자서도 비집고 나왔을 은형이었으나 일부러 도제를 칭찬하려 했다. 그래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잡히지 않은 손도 들었다. 그런데 그런 기미가 보이자마자 도제가 은형의 팔목을 날려 던지듯 놓곤 두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어색하게 허공에서 멈춘 손을 다시 내린 은형이 머쓱하게 도제가 벌려 놓은 거리를 유지한 채 말했다.
“빨리 가자. 너 30분까지면 빠듯해.”
초등학생의 걸음은 느릴 수밖에 없다. 그걸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지만, 아무래도 필요 없었던 듯했다. 은형은 도제의 걸음이 아주 빠르다는 사실을 오늘 새로 알게 됐다. 오히려 초반에 느릿하게 걸어가는 은형의 발걸음에 도제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내 편의 봐주지 마.”
말투가 조금 버릇없게 느껴져도 담고 있는 내용을 파악해 보거나 혹은 평소 도제가 보여 주었던 행동들을 떠올리면 적어도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확신은 갖고 있었다. 오히려 은형은 도제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반 눈에 거슬리던 시기가 지난 지금은 이미 정이 들었는지 어지간한 일엔 화도 안 난다.
“황도야.”
“…….”
대답을 안 해도 아무렇지 않다. 익숙하다.
“황도가 좋아, 백도가 좋아?”
장난을 걸어도 쳐다도 안 본다. 어제처럼 웃거나 하다못해 짜증 내는 반응이라도 보이면 놀리면서 말을 이을 텐데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그래서 대답 얻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나는 황도가 좋은데.”
“복숭아 먹을 수 있어?”
“응? 먹지.”
그냥 한 말에 얻어 걸린 대화 물꼬였지만 생뚱맞은 질문에 은형이 도제를 보았다. 도제는 은형을 보던 시선을 옆으로 피하는 중이었다.
“아. 근데 통조림 말고 그냥 과일 먹으려면 껍질은 벗겨야 해.”
“…….”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도제는 말이 없었다. 그래도 첫날은 말을 많이 한 편이었다. 그날 이후로도 둘은 계속해서 같이 학교에 갔고, 중간에 도제의 친구를 만나거나 은형의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도제야, 형이야?”
“어.”
“잠깐. 옆집 형이야. 야, 너 그렇게 말하면 형제로 오해받잖아.”
이른 등교 시간 때문인지 도제의 친구를 만난 것은 딱 한 번 뿐이었다. 그나마도 그 아이가 등교중이 아닌 잠깐 집 앞에 서 있다가 지나가는 도제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 안 사실은 도제가 생각보다 말을 잘 한다는 점이었다. 단답이긴 한데 말도 잘 들어 주고 또 잘 받아 준다.
두 소년의 주고받는 대화가 매끄러워 둘만 남았을 때 은형은 무심코 제 생각을 내뱉고 말았다.
“너 왜 나한텐 안 그러냐?”
“……?”
‘내가 뭘?’ 하는 표정이라 어이가 없어진 은형이 평소보다 좀 더 큰 목소리를 냈다.
“아니, 할 말 없으면 대답이라도 해 주든가.”
거기까지 말한 은형은 스스로의 유치함에 조금 창피해졌다. 심지어 상대는 한참이나 어린 동생이다. 누가 말만 들으면 자신이 더 어린 쪽이라고 오해할 것 같은 발언이었다.
도제는 그런 은형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잠시 입술을 들썩였다. 창피함도 잠시, 은형은 도제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집중했다. 그렇지만 도제의 입술은 한일자로 굳게 다물린 채 열리지 않았다.
“또 답이 없네.”
아무리 익숙하다지만 이럴 땐 정말 답답했다. 은형은 이제 유치원을 다니는 어린 남동생만 둔 도제가 혹시 자신과 같은 고등학생을 상대하는 게 어려운 건가 싶기도 했다. 초등학생 때는 한 학년 선배라도 어른처럼 보인다. 그런데 중학생도 아니고 고등학생이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네 남동생?”
“옆집 애.”
“아, 진짜? 안녕. 너 되게 귀엽게 생겼다.”
답을 피하리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도제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응. 이름이 뭐야?”
“도제요.”
“……어?”
그의 앞에서는 늘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이 잘만 열렸다. 집 잃고 울던 애 데려다 파출소에 데려다 줬을 때도 도제에겐 고맙단 말 한 마디 못 들었던 은형이었다.
약간의 배신감마저 든 은형이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제는 너무나도 편안하게 은형의 친구와 대화한 뒤 초등학교 정문에 도착하자마자 은형을 빤히 보다가 둘에게 손을 흔들고는 사라졌다.
“어린 게 야무지다.”
둘이서 한 대화가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친구는 이따금 옆집 동생 잘 지내냐는 안부도 물었다. 그때마다 신경 끄라고 답하고 있었지만 정작 은형이 신경을 끄지 못했다.
친해졌나 싶으면 보이지 않는 선 밖에 서 있는 도제가 있다. 처음에는 누구에게나 이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자신에게만이다. 그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건 원래 그런 애라고 여겨서였지, 나에게만 그런 반응이라면 조금 입맛이 썼다.
어딘가 씁쓸한 기분에 은형은 문제집을 샤프로 콕콕 찍다가 머리를 털고 다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수능이 코앞이었다.
수능 전날, 은형은 컨디션 조절이란 이름 아래 일찍 끝내 준 학원에서 자율 학습을 11시까지 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의외로 무덤덤하다는 친구와 달리 은형은 속이 뒤집히는 느낌을 받았다. 잠도 안 올 것 같았다. 위가 따끔거린다.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인지 더 심하게 느껴졌다.
‘큰일이네.’
약국도 문을 닫았을 시간이라 어쩌나 하는 심정으로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부디 집에 제산제가 있길 바라며 집 앞까지 오니 익숙한 장소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황도제였다.
“……하아. 지금 몇 시냐.”
11시 40분을 막 넘어선 자정에 가까운 시각, 은형은 오랜만에 놀이터 미끄럼틀 끝자락에 앉아있는 도제를 발견했다. 도제는 이미 단지 입구에서부터 걸어오는 은형을 보고 있었다.
“형아.”
도제가 부르는 소리가 차가워진 밤공기 속에서 선명하게 들렸다. 은형이 미끄럼틀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어둠 속에서 새까맣게 보이는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저를 빤히 올려다본다. 그 얼굴이 말갛고 하얗다. 그런 도제를 내려다보며 은형이 입을 열었다.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들어가자.”
그렇게 말한 후 팔목을 잡아 일으키니 손에 닿는 온도가 상당히 차가운 게 필시 오래 기다렸음이 틀림없었다.
일어선 도제의 한쪽 손에는 부스럭 거리는 종이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형아.”
도제가 다시 한번 부른다. 두 번에 걸쳐 자신을 부르는 소년의 눈을 마주했다.
“이거 받아.”
“나 주는 거야?”
은형이 눈을 깜빡이며 묻자 도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받으면서도 뭔가 알쏭달쏭한 기분이다. 이게 무슨 기분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일단 도제에게서 건네받은 물건부터 그 자리에서 확인했다.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수능 대박이라는 띠지가 둘린 찹쌀떡이 들어있고 그 옆에는 약도 있었다.
“이건 무슨 약이야?”
“속 쓰릴 때 먹는 약.”
“어?”
지금 은형에게 딱 필요한 약이었다. 절로 놀란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은형이 도제를 쳐다봤다. 도제가 드물게 답했다.
“신경 많이 쓰면 배 아프잖아.”
‘어떻게 알았지?’
아마 도제도 그런 편인가 보다. 은형이 씨익 웃었다.
“고맙다.”
어린 녀석이 말도 적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잘 드러나진 않지만 나름 열심히 생각해 마련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그 선물은 은형에게 딱이었다.
“응.”
그날 은형은 도제의 두 번째 미소를 보았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도제는 웃는 얼굴이 잘 어울렸다. 미소가 예뻐 봄바람이 살랑 불어오는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11월, 초겨울에 든 생각치곤 생뚱맞았으나 은형은 확실히 봄바람을 느꼈다.
“노력한 만큼 잘 볼 거야. 실전에 강하니까.”
뭘 안다고 저리 말하는지 황당했지만 도제의 말에 은형은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렇게 말한 소년의 입가에 아직 실려 있는 미소가 은은했다.
1. 열아홉, 열하나 (4)
은형은 도제를 기다릴 거라 생각해서 미리 집 안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않고 그냥 나왔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보단 도제를 어떻게 부르지 고민하던 시간에 바로 나왔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어젯밤엔 분위기에 휩쓸려서 같이 등교하자 하긴 했지만 옆집 초등학생과 나란히 등교하는 고등학생은 자기네 학교에서 저밖에 없을 거라고 멍하니 생각하는 은형과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던 도제가 동시에 엘리베이터에 집중하게 된 것은 9층에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렸을 때였다.
문이 열리고 도제가 먼저 쪼르륵 들어갔다. 은형이 이미 몇 사람이 들어차있는 내부에 들어서서 도제 옆으로 갔다. 도제는 그런 은형을 올려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책가방 끈을 쥔 손을 꼬물거렸다.
등교와 출근이 맞물리는 바람에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두 번 더 멈추고 1층에 도착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사람들이 앞에 있는 바람에 은형이 못 나오고 주춤하는 사이, 어른들 사이로 빠져나간 도제가 바깥에서 양복을 입은 아저씨 둘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은형의 팔목을 잡았다.
“……?”
그제야 뒤에 있는 학생에게 자리를 비켜 준 아저씨들 사이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오. 도와준 거야?”
사실 잠깐 주춤한 것뿐이지 이 정돈 아침마다 일상이라 충분히 혼자서도 비집고 나왔을 은형이었으나 일부러 도제를 칭찬하려 했다. 그래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잡히지 않은 손도 들었다. 그런데 그런 기미가 보이자마자 도제가 은형의 팔목을 날려 던지듯 놓곤 두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어색하게 허공에서 멈춘 손을 다시 내린 은형이 머쓱하게 도제가 벌려 놓은 거리를 유지한 채 말했다.
“빨리 가자. 너 30분까지면 빠듯해.”
초등학생의 걸음은 느릴 수밖에 없다. 그걸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지만, 아무래도 필요 없었던 듯했다. 은형은 도제의 걸음이 아주 빠르다는 사실을 오늘 새로 알게 됐다. 오히려 초반에 느릿하게 걸어가는 은형의 발걸음에 도제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내 편의 봐주지 마.”
말투가 조금 버릇없게 느껴져도 담고 있는 내용을 파악해 보거나 혹은 평소 도제가 보여 주었던 행동들을 떠올리면 적어도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확신은 갖고 있었다. 오히려 은형은 도제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반 눈에 거슬리던 시기가 지난 지금은 이미 정이 들었는지 어지간한 일엔 화도 안 난다.
“황도야.”
“…….”
대답을 안 해도 아무렇지 않다. 익숙하다.
“황도가 좋아, 백도가 좋아?”
장난을 걸어도 쳐다도 안 본다. 어제처럼 웃거나 하다못해 짜증 내는 반응이라도 보이면 놀리면서 말을 이을 텐데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그래서 대답 얻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나는 황도가 좋은데.”
“복숭아 먹을 수 있어?”
“응? 먹지.”
그냥 한 말에 얻어 걸린 대화 물꼬였지만 생뚱맞은 질문에 은형이 도제를 보았다. 도제는 은형을 보던 시선을 옆으로 피하는 중이었다.
“아. 근데 통조림 말고 그냥 과일 먹으려면 껍질은 벗겨야 해.”
“…….”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도제는 말이 없었다. 그래도 첫날은 말을 많이 한 편이었다. 그날 이후로도 둘은 계속해서 같이 학교에 갔고, 중간에 도제의 친구를 만나거나 은형의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도제야, 형이야?”
“어.”
“잠깐. 옆집 형이야. 야, 너 그렇게 말하면 형제로 오해받잖아.”
이른 등교 시간 때문인지 도제의 친구를 만난 것은 딱 한 번 뿐이었다. 그나마도 그 아이가 등교중이 아닌 잠깐 집 앞에 서 있다가 지나가는 도제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로 안 사실은 도제가 생각보다 말을 잘 한다는 점이었다. 단답이긴 한데 말도 잘 들어 주고 또 잘 받아 준다.
두 소년의 주고받는 대화가 매끄러워 둘만 남았을 때 은형은 무심코 제 생각을 내뱉고 말았다.
“너 왜 나한텐 안 그러냐?”
“……?”
‘내가 뭘?’ 하는 표정이라 어이가 없어진 은형이 평소보다 좀 더 큰 목소리를 냈다.
“아니, 할 말 없으면 대답이라도 해 주든가.”
거기까지 말한 은형은 스스로의 유치함에 조금 창피해졌다. 심지어 상대는 한참이나 어린 동생이다. 누가 말만 들으면 자신이 더 어린 쪽이라고 오해할 것 같은 발언이었다.
도제는 그런 은형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잠시 입술을 들썩였다. 창피함도 잠시, 은형은 도제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집중했다. 그렇지만 도제의 입술은 한일자로 굳게 다물린 채 열리지 않았다.
“또 답이 없네.”
아무리 익숙하다지만 이럴 땐 정말 답답했다. 은형은 이제 유치원을 다니는 어린 남동생만 둔 도제가 혹시 자신과 같은 고등학생을 상대하는 게 어려운 건가 싶기도 했다. 초등학생 때는 한 학년 선배라도 어른처럼 보인다. 그런데 중학생도 아니고 고등학생이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네 남동생?”
“옆집 애.”
“아, 진짜? 안녕. 너 되게 귀엽게 생겼다.”
답을 피하리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도제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응. 이름이 뭐야?”
“도제요.”
“……어?”
그의 앞에서는 늘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이 잘만 열렸다. 집 잃고 울던 애 데려다 파출소에 데려다 줬을 때도 도제에겐 고맙단 말 한 마디 못 들었던 은형이었다.
약간의 배신감마저 든 은형이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제는 너무나도 편안하게 은형의 친구와 대화한 뒤 초등학교 정문에 도착하자마자 은형을 빤히 보다가 둘에게 손을 흔들고는 사라졌다.
“어린 게 야무지다.”
둘이서 한 대화가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친구는 이따금 옆집 동생 잘 지내냐는 안부도 물었다. 그때마다 신경 끄라고 답하고 있었지만 정작 은형이 신경을 끄지 못했다.
친해졌나 싶으면 보이지 않는 선 밖에 서 있는 도제가 있다. 처음에는 누구에게나 이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자신에게만이다. 그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건 원래 그런 애라고 여겨서였지, 나에게만 그런 반응이라면 조금 입맛이 썼다.
어딘가 씁쓸한 기분에 은형은 문제집을 샤프로 콕콕 찍다가 머리를 털고 다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수능이 코앞이었다.
수능 전날, 은형은 컨디션 조절이란 이름 아래 일찍 끝내 준 학원에서 자율 학습을 11시까지 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의외로 무덤덤하다는 친구와 달리 은형은 속이 뒤집히는 느낌을 받았다. 잠도 안 올 것 같았다. 위가 따끔거린다.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인지 더 심하게 느껴졌다.
‘큰일이네.’
약국도 문을 닫았을 시간이라 어쩌나 하는 심정으로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부디 집에 제산제가 있길 바라며 집 앞까지 오니 익숙한 장소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황도제였다.
“……하아. 지금 몇 시냐.”
11시 40분을 막 넘어선 자정에 가까운 시각, 은형은 오랜만에 놀이터 미끄럼틀 끝자락에 앉아있는 도제를 발견했다. 도제는 이미 단지 입구에서부터 걸어오는 은형을 보고 있었다.
“형아.”
도제가 부르는 소리가 차가워진 밤공기 속에서 선명하게 들렸다. 은형이 미끄럼틀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어둠 속에서 새까맣게 보이는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저를 빤히 올려다본다. 그 얼굴이 말갛고 하얗다. 그런 도제를 내려다보며 은형이 입을 열었다.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들어가자.”
그렇게 말한 후 팔목을 잡아 일으키니 손에 닿는 온도가 상당히 차가운 게 필시 오래 기다렸음이 틀림없었다.
일어선 도제의 한쪽 손에는 부스럭 거리는 종이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형아.”
도제가 다시 한번 부른다. 두 번에 걸쳐 자신을 부르는 소년의 눈을 마주했다.
“이거 받아.”
“나 주는 거야?”
은형이 눈을 깜빡이며 묻자 도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받으면서도 뭔가 알쏭달쏭한 기분이다. 이게 무슨 기분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일단 도제에게서 건네받은 물건부터 그 자리에서 확인했다.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수능 대박이라는 띠지가 둘린 찹쌀떡이 들어있고 그 옆에는 약도 있었다.
“이건 무슨 약이야?”
“속 쓰릴 때 먹는 약.”
“어?”
지금 은형에게 딱 필요한 약이었다. 절로 놀란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은형이 도제를 쳐다봤다. 도제가 드물게 답했다.
“신경 많이 쓰면 배 아프잖아.”
‘어떻게 알았지?’
아마 도제도 그런 편인가 보다. 은형이 씨익 웃었다.
“고맙다.”
어린 녀석이 말도 적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잘 드러나진 않지만 나름 열심히 생각해 마련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그 선물은 은형에게 딱이었다.
“응.”
그날 은형은 도제의 두 번째 미소를 보았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도제는 웃는 얼굴이 잘 어울렸다. 미소가 예뻐 봄바람이 살랑 불어오는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11월, 초겨울에 든 생각치곤 생뚱맞았으나 은형은 확실히 봄바람을 느꼈다.
“노력한 만큼 잘 볼 거야. 실전에 강하니까.”
뭘 안다고 저리 말하는지 황당했지만 도제의 말에 은형은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렇게 말한 소년의 입가에 아직 실려 있는 미소가 은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