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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에 당신을 만나 5화
1. 열아홉, 열하나 (5)
은형에게선 참을 수 없는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둘은 마주 웃었다. 하지만 은형이 점점 환하게 웃을수록 도제의 미소는 천천히 사그라졌다. 그렇다고 무표정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어딘가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기는 표정이었다.
환하게 웃으며 도제의 머리를 쓰다듬은 은형이 재차 ‘고맙다’ 말했을 때, 도제는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 들어갔다. 쾅! 밤중 아파트 복도에 문소리가 크게 울려 퍼져도 은형은 들떠서인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방에 들어오자 내일 당장 수능인 아들을 위해 부모님이 한차례씩 응원을 하며 다독였고, 아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는 어머니의 경우 긴장했을 때 효과가 좋은 허브차를 한 잔 내주었다. 그러면서 약을 건넸는데, 도제가 준비해온 것과 같은 약이었다.
“너 또 위 아프다고 더 스트레스받지 말고 약 꼭 먹어. 알았지?”
“응. 알았어.”
약을 받아 든 뒤 은형은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약을 쥔 아들의 손을 따라가던 엄마의 눈길이 책상 위 낯선 쇼핑백에 다다랐다.
“아까 갖고 들어오던데. 뭐야?”
“선물.”
옆집 꼬마가 줬다고 하려니 평소에 가족과 도제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고 지냈었다. 은형이 도제와의 접점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것은 거의 4개월 전 처음 마주쳤을 때 울고 있는 도제를 경찰서에 데리고 갔을 때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옆집에서 먼저 말해 왔기 때문에 은형이 먼저 말을 꺼낸 것도 아니었다.
은형에겐 새삼스럽지만 이제와 말을 꺼내자니 귀찮아져 그냥 선물이라고만 말하고 씻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엄마가 옆에서 뭐가 그리 궁금한지 선물에 대해 물어왔다.
“반 친구가 줬어? 학원 친구?”
“아는 애 있어.”
“어머. 여자?”
“……스트레스 주지 말고 나가.”
엄마가 깔깔 웃으면서 방을 떠났다.
“알았어. 너 좀 풀어 주려고 한 말이야. 선물 그거, 찹쌀떡인 거 같은데 조심해서 먹어.”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 은형은 찹쌀떡을 꺼내다가 도로 집어넣고 말았다. 사실 은형은 극도로 긴장을 하면 먹은 대로 게워 낸다. 괜히 아까운 떡을 토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가 은형은 아까보단 훨씬 속이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찌르는 듯한 고통도 없고 욱씬거리지도 않았다.
아마 저를 위해 신경 써 준 사람들 덕일지도 모른다. 은형은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따뜻한 물로 씻은 뒤 침대 위에 누웠다. 다음 날 일어나서도 정신이 산뜻했다.
덕분인지 수능은 평소 이상의 컨디션으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수능이 끝난 뒤 가족들과 외식을 하고 집에 돌아와 은형은 도제가 있을 옆집 앞을 서성였다. 인터폰으로 부르자니 가족들이 물어볼 것 같아 일단 밖으로 나온 상황이었다.
우리 사이가 무슨 비밀이라고. 그냥 옆집 애 한 명 만나는 것뿐인데.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은형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왔다 갔다 하는 와중 현관문이 열렸다.
“어…….”
“어머. 안녕하세요?”
파출소에서 봤었던 도제의 할머니였다. 은형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발소리가 계속 나서 나와 봤어요.”
서성이던 인기척이 안까지 들렸던 모양이었다. 중문이 있어서 원래는 잘 들리지 않았을 테지만, 마침 내일 신고 나갈 신발을 고르던 중이었던 도제 할머니의 귀에는 바깥에서 나는 소리가 아주 잘 들리고 말았다.
“그러셨구나. 도제는 뭐 해요?”
고맙단 말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까 외식하고 왔는데도 집에 돌아와 남겨 두었던 찹쌀떡을 먹어치웠다. 그 얘기도 해 주고 싶었다.
“도제 자요. 피곤했나. 하루 종일 밖에 있다 와서는.”
“그래요?”
“오늘 쉬는 날이라고 친구들이랑 신나게 놀았나 봐요.”
할머니의 온화한 표정에 은형은 인사를 하고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학교에 간 그는 완전히 풀어진 열아홉 살들이 교실 안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만 보다가 일찍 하교했다. 중간에 친구들과 좀 놀다 간 탓에 오후 5시가 돼서야 아파트 입구에 들어섰고, 놀이터를 지나다 도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
도제는 그네를 타고 있었다. 사실 탄다기보다는 거의 앉아서 흔들리고 있는 정도에 가까웠다.
“야, 황도!”
반가운 마음에 크게 소리치자 도제가 쳐다봤다. 그러곤 오늘은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벌떡 그네에서 내려서더니 은형에게 곧장 걸어왔다. 은형은 도제의 반응에 확실히 우리가 친해지긴 했구나, 하고 약간의 감동을 느꼈다.
두 걸음 남기고 멈춰 선 도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우리 집 왔었다며?”
“응? 아, 그거? 너네 집 간 건 아니고…… 그냥.”
“그냥?”
도제의 턱이 조금 더 올라가 은형을 향했다.
“네가 준 것들 잘 먹었다고.”
은형이 도제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도제는 이번엔 손길을 쳐 내지 않았다.
“……고마워서.”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던 도제는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은형의 손목을 슬쩍 잡고 내렸다. 그러곤 얌전히 손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
다시 입을 다문 도제였지만 은형은 아무렇지 않았다. 자신에게만 표현이 서투면 어떤가 싶다. 수능 잘 보라고 떡이랑 약도 받았는데.
아직 도제는 은형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은형은 손에서 손목을 빼는 척하다가 풀린 도제의 손을 맞잡았다. 도제의 어깨가 놀란 듯 올라가며 뒷걸음질 치기에 세게 잡고 끌어 당겼다.
“귀엽네, 이거.”
그대로 얼굴을 양손을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도제의 당황스러워 크게 뜬 눈의 검은자위가 얼굴을 따라 달달 흔들렸다.
“뭐 하는 거야!”
제법 큰 소리를 내며 손을 떼어 내는 도제 앞에서 은형이 실실 웃었다.
“너 귀여워서 그러지.”
입도 제대로 다물지 못하고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른 도제가 인사 한 마디 없이 등을 돌려 빠르게 걸어 나갔다. 은형은 싱글벙글 웃으며 가방을 고쳐 매고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황도야.”
“…….”
“형 이제 시간 많은데. 앞으로 자주 놀아 줄게.”
“…….”
여전히 답은 없었지만 힐끗 쳐다봐온다. 은형이 씨익 웃었다. 눈을 깔고 곰곰이 무언가 생각을 끝낸 도제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등을 돌려 뒤에 있던 은형과 마주했다.
“그래도 괜찮겠어?”
은형은 순간 도제의 질문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랑 있어도 괜찮아?”
괜찮냐니. 여태까지 마치 도제가 아니라 은형 쪽에서 낯을 가리고 거리를 둔 것처럼 얘기를 하고 있다.
“나랑 있으면 싫지 않아?”
이 말까지 듣고 나자 정말 의아함만이 은형을 감쌌다.
“내가 널 왜 싫어해?”
정말로 이유를 몰라 묻자 도제는 꾹, 힘이 들어간 게 보일 정도로 입매에 힘을 줬다. 그러고는 다시 몸을 돌려 앞장 서 걸었다. 은형은 거리가 더 벌어질세라 아예 옆으로 빠르게 다가가 물었다.
“내가 너 싫어하는 줄 알았어?”
도제가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왜 그런 오해를 했지?”
은형의 혼잣말에 가까운 말을 끝으로 둘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은형이 가만히 서 있는 소년의 얼굴을 허리를 굽혀 쳐다봤다. 도제가 왼손으로 목도리를 위로 잡아끌어 얼굴을 가렸다.
“나 너 안 싫어해.”
“……그럼 좋아해?”
그렇게 묻는 도제의 눈동자가 촉촉하다. 어쩐지 간절해 보이는 눈빛에 ‘그럼, 좋지.’ 하고 답하려 했다. 하지만 도제와 눈을 마주하는 은형의 입에선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적막이 흘렀다.
엘리베이터가 9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는 띵, 소리가 난 뒤에야 굳은 몸이 풀어졌다.
“아…….”
은형은 지금이라도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네가 좋다’란 말이 죽어도 나오지 않았다. 도제는 그런 은형을 한 번, 바닥을 한 번 보곤 먼저 복도로 나갔다.
“야, 야. 잠깐. 네가 싫은 건 아닌데…….”
‘좋지도 않지?’
돌아서 쳐다보는 소년의 모습에게서 그런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도제는 평안한 얼굴로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다.
“형아.”
심지어 그를 부르는 목소리도 부드럽다. 도어 록 소리와 함께 909호의 문이 열렸다.
“난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깐 얘기하지 말자.”
그러더니 흥, 코웃음을 친다.
“애도 아니고 좋다, 싫다 그런 말에 연연 안 해.”
언뜻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은형의 마음이 못내 좋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길게 늘어놓는 말들이 외려 구구절절 괜찮다는 핑계를 대는 걸로 보였다. 또 빈말로라도 할 수 있는 좋아한다는 말이 왜 이렇게 나오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분위기라도 쇄신하려고 장난처럼 말을 받아쳤다.
“네가 애지 그럼 아니냐.”
도제는 이번엔 피식, 어딘가 자조적으로 웃는 옆모습만 보여 주곤 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냥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데 말하다 보니 애한테 상처만 준 것 같아 속이 쓰려왔다. 도제 말대로 다시 입 밖에 꺼내지 않는 걸로 족해야 하는 것인지, 혹은 나중에라도 너 좋다고 말해야 하는 것인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중에 말해 봤자 진짜로 변명하는 꼴로밖엔 보이지 않을 게 자명했다.
“아…… 나 왜 이러지.”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지 속이 아파졌다. 갑자기 들이닥친 스트레스에 위가 쪼그라들어 은형은 배를 움켜쥐고 문을 열었다.
1. 열아홉, 열하나 (5)
은형에게선 참을 수 없는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둘은 마주 웃었다. 하지만 은형이 점점 환하게 웃을수록 도제의 미소는 천천히 사그라졌다. 그렇다고 무표정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어딘가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기는 표정이었다.
환하게 웃으며 도제의 머리를 쓰다듬은 은형이 재차 ‘고맙다’ 말했을 때, 도제는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 들어갔다. 쾅! 밤중 아파트 복도에 문소리가 크게 울려 퍼져도 은형은 들떠서인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방에 들어오자 내일 당장 수능인 아들을 위해 부모님이 한차례씩 응원을 하며 다독였고, 아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는 어머니의 경우 긴장했을 때 효과가 좋은 허브차를 한 잔 내주었다. 그러면서 약을 건넸는데, 도제가 준비해온 것과 같은 약이었다.
“너 또 위 아프다고 더 스트레스받지 말고 약 꼭 먹어. 알았지?”
“응. 알았어.”
약을 받아 든 뒤 은형은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약을 쥔 아들의 손을 따라가던 엄마의 눈길이 책상 위 낯선 쇼핑백에 다다랐다.
“아까 갖고 들어오던데. 뭐야?”
“선물.”
옆집 꼬마가 줬다고 하려니 평소에 가족과 도제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고 지냈었다. 은형이 도제와의 접점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것은 거의 4개월 전 처음 마주쳤을 때 울고 있는 도제를 경찰서에 데리고 갔을 때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옆집에서 먼저 말해 왔기 때문에 은형이 먼저 말을 꺼낸 것도 아니었다.
은형에겐 새삼스럽지만 이제와 말을 꺼내자니 귀찮아져 그냥 선물이라고만 말하고 씻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엄마가 옆에서 뭐가 그리 궁금한지 선물에 대해 물어왔다.
“반 친구가 줬어? 학원 친구?”
“아는 애 있어.”
“어머. 여자?”
“……스트레스 주지 말고 나가.”
엄마가 깔깔 웃으면서 방을 떠났다.
“알았어. 너 좀 풀어 주려고 한 말이야. 선물 그거, 찹쌀떡인 거 같은데 조심해서 먹어.”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 은형은 찹쌀떡을 꺼내다가 도로 집어넣고 말았다. 사실 은형은 극도로 긴장을 하면 먹은 대로 게워 낸다. 괜히 아까운 떡을 토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다가 은형은 아까보단 훨씬 속이 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찌르는 듯한 고통도 없고 욱씬거리지도 않았다.
아마 저를 위해 신경 써 준 사람들 덕일지도 모른다. 은형은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따뜻한 물로 씻은 뒤 침대 위에 누웠다. 다음 날 일어나서도 정신이 산뜻했다.
덕분인지 수능은 평소 이상의 컨디션으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수능이 끝난 뒤 가족들과 외식을 하고 집에 돌아와 은형은 도제가 있을 옆집 앞을 서성였다. 인터폰으로 부르자니 가족들이 물어볼 것 같아 일단 밖으로 나온 상황이었다.
우리 사이가 무슨 비밀이라고. 그냥 옆집 애 한 명 만나는 것뿐인데.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은형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왔다 갔다 하는 와중 현관문이 열렸다.
“어…….”
“어머. 안녕하세요?”
파출소에서 봤었던 도제의 할머니였다. 은형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발소리가 계속 나서 나와 봤어요.”
서성이던 인기척이 안까지 들렸던 모양이었다. 중문이 있어서 원래는 잘 들리지 않았을 테지만, 마침 내일 신고 나갈 신발을 고르던 중이었던 도제 할머니의 귀에는 바깥에서 나는 소리가 아주 잘 들리고 말았다.
“그러셨구나. 도제는 뭐 해요?”
고맙단 말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까 외식하고 왔는데도 집에 돌아와 남겨 두었던 찹쌀떡을 먹어치웠다. 그 얘기도 해 주고 싶었다.
“도제 자요. 피곤했나. 하루 종일 밖에 있다 와서는.”
“그래요?”
“오늘 쉬는 날이라고 친구들이랑 신나게 놀았나 봐요.”
할머니의 온화한 표정에 은형은 인사를 하고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학교에 간 그는 완전히 풀어진 열아홉 살들이 교실 안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만 보다가 일찍 하교했다. 중간에 친구들과 좀 놀다 간 탓에 오후 5시가 돼서야 아파트 입구에 들어섰고, 놀이터를 지나다 도제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
도제는 그네를 타고 있었다. 사실 탄다기보다는 거의 앉아서 흔들리고 있는 정도에 가까웠다.
“야, 황도!”
반가운 마음에 크게 소리치자 도제가 쳐다봤다. 그러곤 오늘은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벌떡 그네에서 내려서더니 은형에게 곧장 걸어왔다. 은형은 도제의 반응에 확실히 우리가 친해지긴 했구나, 하고 약간의 감동을 느꼈다.
두 걸음 남기고 멈춰 선 도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우리 집 왔었다며?”
“응? 아, 그거? 너네 집 간 건 아니고…… 그냥.”
“그냥?”
도제의 턱이 조금 더 올라가 은형을 향했다.
“네가 준 것들 잘 먹었다고.”
은형이 도제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도제는 이번엔 손길을 쳐 내지 않았다.
“……고마워서.”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던 도제는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은형의 손목을 슬쩍 잡고 내렸다. 그러곤 얌전히 손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
다시 입을 다문 도제였지만 은형은 아무렇지 않았다. 자신에게만 표현이 서투면 어떤가 싶다. 수능 잘 보라고 떡이랑 약도 받았는데.
아직 도제는 은형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은형은 손에서 손목을 빼는 척하다가 풀린 도제의 손을 맞잡았다. 도제의 어깨가 놀란 듯 올라가며 뒷걸음질 치기에 세게 잡고 끌어 당겼다.
“귀엽네, 이거.”
그대로 얼굴을 양손을 잡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도제의 당황스러워 크게 뜬 눈의 검은자위가 얼굴을 따라 달달 흔들렸다.
“뭐 하는 거야!”
제법 큰 소리를 내며 손을 떼어 내는 도제 앞에서 은형이 실실 웃었다.
“너 귀여워서 그러지.”
입도 제대로 다물지 못하고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른 도제가 인사 한 마디 없이 등을 돌려 빠르게 걸어 나갔다. 은형은 싱글벙글 웃으며 가방을 고쳐 매고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황도야.”
“…….”
“형 이제 시간 많은데. 앞으로 자주 놀아 줄게.”
“…….”
여전히 답은 없었지만 힐끗 쳐다봐온다. 은형이 씨익 웃었다. 눈을 깔고 곰곰이 무언가 생각을 끝낸 도제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등을 돌려 뒤에 있던 은형과 마주했다.
“그래도 괜찮겠어?”
은형은 순간 도제의 질문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랑 있어도 괜찮아?”
괜찮냐니. 여태까지 마치 도제가 아니라 은형 쪽에서 낯을 가리고 거리를 둔 것처럼 얘기를 하고 있다.
“나랑 있으면 싫지 않아?”
이 말까지 듣고 나자 정말 의아함만이 은형을 감쌌다.
“내가 널 왜 싫어해?”
정말로 이유를 몰라 묻자 도제는 꾹, 힘이 들어간 게 보일 정도로 입매에 힘을 줬다. 그러고는 다시 몸을 돌려 앞장 서 걸었다. 은형은 거리가 더 벌어질세라 아예 옆으로 빠르게 다가가 물었다.
“내가 너 싫어하는 줄 알았어?”
도제가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왜 그런 오해를 했지?”
은형의 혼잣말에 가까운 말을 끝으로 둘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은형이 가만히 서 있는 소년의 얼굴을 허리를 굽혀 쳐다봤다. 도제가 왼손으로 목도리를 위로 잡아끌어 얼굴을 가렸다.
“나 너 안 싫어해.”
“……그럼 좋아해?”
그렇게 묻는 도제의 눈동자가 촉촉하다. 어쩐지 간절해 보이는 눈빛에 ‘그럼, 좋지.’ 하고 답하려 했다. 하지만 도제와 눈을 마주하는 은형의 입에선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적막이 흘렀다.
엘리베이터가 9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는 띵, 소리가 난 뒤에야 굳은 몸이 풀어졌다.
“아…….”
은형은 지금이라도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네가 좋다’란 말이 죽어도 나오지 않았다. 도제는 그런 은형을 한 번, 바닥을 한 번 보곤 먼저 복도로 나갔다.
“야, 야. 잠깐. 네가 싫은 건 아닌데…….”
‘좋지도 않지?’
돌아서 쳐다보는 소년의 모습에게서 그런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도제는 평안한 얼굴로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다.
“형아.”
심지어 그를 부르는 목소리도 부드럽다. 도어 록 소리와 함께 909호의 문이 열렸다.
“난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깐 얘기하지 말자.”
그러더니 흥, 코웃음을 친다.
“애도 아니고 좋다, 싫다 그런 말에 연연 안 해.”
언뜻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은형의 마음이 못내 좋지 않았다. 평소보다 더 길게 늘어놓는 말들이 외려 구구절절 괜찮다는 핑계를 대는 걸로 보였다. 또 빈말로라도 할 수 있는 좋아한다는 말이 왜 이렇게 나오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분위기라도 쇄신하려고 장난처럼 말을 받아쳤다.
“네가 애지 그럼 아니냐.”
도제는 이번엔 피식, 어딘가 자조적으로 웃는 옆모습만 보여 주곤 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냥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데 말하다 보니 애한테 상처만 준 것 같아 속이 쓰려왔다. 도제 말대로 다시 입 밖에 꺼내지 않는 걸로 족해야 하는 것인지, 혹은 나중에라도 너 좋다고 말해야 하는 것인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중에 말해 봤자 진짜로 변명하는 꼴로밖엔 보이지 않을 게 자명했다.
“아…… 나 왜 이러지.”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지 속이 아파졌다. 갑자기 들이닥친 스트레스에 위가 쪼그라들어 은형은 배를 움켜쥐고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