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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에 당신을 만나 6화

1. 열아홉, 열하나 (6)





그 후 다음번에 도제와 마주쳤을 땐 괜히 우물쭈물 눈치를 보게 됐다. 하지만 오히려 도제 쪽에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평소와 똑같이 굴어서 둘 다 조용히 그네만 나란히 타다 들어왔다.

“너 옆집 애랑 그네 타더라?”

예비 고3인 여동생의 말에 은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 연령하고는.”

이죽거리는 여동생을 두고 은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로 둘은 마주쳐도 도제의 경우 원래보다도 더 말을 안 하게 됐고, 은형은 어영부영 말만 걸다가 결국 여기저기 대학 원서를 넣고 면접 준비를 하면서 따로 짬을 내기가 힘들 정도로 바빠졌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기숙사로 떠났다.

기숙사로 향하면서 잠시 909호 앞에 멈췄다 해도 그것만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그게 벌써 4년 전 일이었다. 은형은 현역으로 군대 복무를 마친 뒤 복학하기 전까지 오랜만에 집에 눌러 붙어 있을 예정이었다. 7월 초순, 에어컨을 틀어 놓은 거실에서 멍하니 차가운 바닥에 누워 뒹굴고 있었다.

‘너무 평화로운 거 아닌가.’

당장이라도 저 문을 열고 생활복을 입은 무리들이 땀에 쩐 냄새를 풍기며 들어올 것 같았다. 그때 현관문이 열렸고 은형은 괜히 흠칫 문을 쳐다봤다. 시꺼먼 남자들 대신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에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동생이 들어왔다.

“땀 흘린 몸으로 거실 바닥에 눕지 마!”

들어오자마자 잔소리를 퍼붓는 여동생은 점점 엄마의 말투를 닮아 갔다.

“씻고 누웠어. 그리고 에어컨 켠 거 안 보이냐.”

“아휴. 아니면 웃통을 까고 있지나 말든가. 더럽게.”

“바닥에 먼지 없어.”

“아니, 네 몸.”

“뭐?”

더럽다니. 은형이 어이없는 얼굴로 방으로 들어간 여동생의 흔적을 좇았다. 그런 뒤에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씻고 밖에 나갔다 온 것도 아니고 땀 하나 흘린 적 없으니 더러울 거 없는 몸이다. 그런데 갑자기 더럽단 말을 들어서 짜증이 난 은형이 씻으러 나오는 여동생이 보는 앞에서 일부러 더 거실 바닥에 등을 문질렀다.

“왜 저래.”

여동생의 차가운 반응도 반응이지만 실속 없이 본인 등만 아파 와 은형은 금방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휴. 찌질이 냄새. 방에 들어가.”

“아, 땀 냄새. 얼른 욕실로 가세요.”

여동생의 말에 발끈해서 내던진 말이지만, 내뱉으면서도 자신이 유치하단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여동생도 느꼈다.

둘은 나름 각자 어른이 됐다고 스스로 여기고 있었기에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병장으로서 군역을 마치고 온 은형이나 이제 대학 3학년이 된 여동생이나 각자의 바운더리에선 나름 어른스럽단 평과 함께 선배 대접을 받았던 터라, 형제자매와 있을 때 나타나는 유치함에 치가 떨렸다.

“너랑 있음 유치해지는 기분이다.”

여동생이 은형이 할 말을 먼저 선수 쳤다. 그게 또 진 것 같아 뭐라 하려다 말았다.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자신이 손윗사람이니 적당히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끄러. 씻으러나 가라고.”

“옷이나 입고 누워 있어라.”

오빠를 오빠라고 부르지 않는 여동생과 그 오빠. 연년생 남매의 대화는 그날 그걸로 끝이었다.

늦은 오후가 돼서야 은형은 슬리퍼를 끌고 과자를 사러 아파트 단지 내 마트를 향했다.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가 1층을 알렸고 문이 열리는 그 순간, 은형은 어떤 학생과 마주쳤다. 단정하게 입고 있는 교복은 은형의 출신 중학교였다.

은형이 먼저 엘리베이터를 나오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어떤 중학생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선이 고운 듯하면서도 슬슬 남자의 태가 나오기 시작하는 소년은 어딘가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은형은 이 중학생이 상당히 낯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박음질해 놓은 명찰로 눈이 갔다.

[황도제]

“……황도?”

이름을 불렸는데도 도제는 가벼운 묵례만 한 뒤 아무런 인사말 없이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바보 같은 소리를 낸 쪽은 은형이었다.

“어, 어?”

하지만 도제는 쿨하게 닫힘 버튼을 눌렀다. 닫히는 문 사이로 은형의 당황한 모습이 보였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도제는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두 번 깜빡였다. 그러곤 조용히 미소 지었다.

반면 잡을 틈도 없이 사라진 도제의 잔상에 어이없어진 은형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하네.”

몇 년 만의 재회였다.







2. 소년의 성장 속도 (1)





날이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바깥의 온도는 낮아지는 일 없이 치솟고만 있었고 은형은 점점 녹아내리는 기분을 맛봐야 했다. 잘 사용하던 에어컨은 하도 썼던 탓인지 고장이 나 버렸다. 문제는 지금이 한창 수리기사들의 성수기라 도저히 고치러 올 만한 인력이 남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더위 속에 녹아내려야 하는지 감당이 되지 않아 은형은 결국 집 밖으로 피신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뙤약볕 아래서 흐물거리던 은형이 마침 눈에 띈 아무 은행에 들어갔다. 자리를 옮겨 가며 주변의 눈을 피하려 노력했으나 괜히 은행 직원이나 청원 경찰의 눈치가 보여 한 시간 뒤에는 제 발 저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디 가지…….’

잠시 고민하다가 근처 대형 편의점을 찾았다. 아파트 대단지 앞인 데다가 초, 중, 고가 일렬로 있어서인지 꽤 컸다. 그러나 여름 방학 기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편의점 안을 서성이다가 어떤 청소년 무리가 시끌벅적하게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고등학생들이 여름 방학 보충 학습 중간에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보아하니 사복을 입은 중학생 무리였다.

은형은 금세 관심을 거두고 음료수 가판대 앞을 서성였다. 그러다 옆에 누군가가 와서 서는 걸 알고, 은형은 자신과 달리 진짜로 음료수를 마시고 싶어 하는 손님이라고만 여겨 살짝 옆으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곧 냉장고 유리문이 열리고 늘씬한 팔뚝과 손이 은형의 시야에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준 손의 주인은 수려한 옆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조우한 반가운 얼굴이기도 했다.

이웃집 황도제였다.

“…….”

그런데 어째 섣불리 이름을 부르기가 어려웠다.

며칠 전 엘리베이터 앞에서 ‘황도’라고 부르긴 했지만, 무심코 부른 것인 데다가 그렇게 부른 지 벌써 4년이 지났다. 게다가 그사이 둘은 만난 적도 없었다. 못 만난 이유로는 시간대가 안 맞은 탓도 있으나 다른 것보다도 은형이 기숙사다, 군대다 집에 있던 적이 거의 없어서였다. 어색해질 만도 했다.

그런 은형의 시선을 느꼈을 법도 한데 도제는 전혀 반응하지 않고 자신이 고른 복숭아 맛 탄산음료를 냉장고 밖으로 꺼냈다. 그러더니 눈만 잠깐 옆으로 돌려 은형을 봤다.

“뭐 사게?”

말이 없는 그 대신 도제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은형이 조금 놀랐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듯 편안하게 답했다.

“음. 시원한 거.”

그 대답에 도제는 별로 큰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사 줄게. 골라.”

“……네가?”

사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기분이 묘했다. 성인이 되면서 통장에 돈도 좀 모아 놨는데 옆집 초등학생, 아니, 이제 중학생인 동생에게 사 줄지는 못할망정 얻어먹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 같았다.

“됐어.”

뒤이어 내가 살게, 하고 말하려던 은형은 자신도 모르게 뒤에 포진해 있는 도제의 친구들의 머릿수를 세고 말았다.

‘하나, 둘, 셋…… 여덟 명. 뭐 이렇게 많이 몰려 다녀.’

그래도 못 사 줄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사 줄게. 네 친구들 것도 내가 살…….”

“쓸 데 없이 왜 돈을 써?”

“뭐?”

분명 옛날보단 말은 늘었지만, 내용은 둘째 치고 말의 형식은 약간 더 재수가 없어진 기분이었다. 머리가 커서 그런 걸까.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도제가 은형에게 들릴 정도로만 소리를 냈다.

“사 준다고 하면 염치도 없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 놈들이야.”

조용히 친구들을 디스하는 모습이 웃겨서 은형이 실실 웃었다.

“그러냐.”

그럼 말지, 뭐.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어색함이 풀린 은형이 미소 띤 얼굴로 최대한 친절하게 물었다.

“어디 놀러가?”

“이제 숙제 끝나서 집에 가는 중이야.”

그런 것치곤 저쪽에서 PC방을 가니, 오락실을 가니 놀 곳을 고르는 도제 친구들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오는 중이었다.

“더 안 놀고?”

“더워서 짜증 나. 아무도 없는 집에 가서 시원하게 혼자 있게.”

“에어컨 되나 보다.”

덧붙인 은형이 마지막 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부럽다.”

그 중얼거림에 도제가 빤히 은형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다시 닫는다. 그런 도제의 입을 지켜보던 은형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부럽다.”

은형의 말은 무언가의 의미를 담고 있었고, 처음에는 몰랐던 도제는 그 뜻을 눈치를 챈 것 같았다. 그러나 좀체 은형이 원하는 답을 스스로 내놓지를 않았다.

“에어컨 부럽다고.”

사람이 절박하면 일단 뻔뻔해지나 보다. 은형은 도제가 눈썹을 찌푸리든 말든 딜을 걸었다.

“아이스크림 통으로 사 줄게. 너네 집에 잠깐만 있자.”

기어코 도제에게 허락을 받아 낸 은형은 커다란 통 아이스크림 대신 편의점에서 할인하고 있는 아이스크림 바를 열 개 정도 사서 들고 갔다.



908호 옆 909호 문이 열렸다. 아까 들었던 이야기로 집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진즉 알고 있었으나 은형은 들어가면서 어정쩡하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