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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존 1권(11화)
3장. 혼자만의 수련(4)
과적의 몸이 공중 부양할 기세로 떠올랐다.
입에 게거품을 문 과적이 자신의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섰다. 수하가 잘못 봤을 것이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적의 바람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진짜 그놈이다.
지난번보다 지저분해진 몰골을 한 그놈이 태평스럽게 자신의 산채에 떡하니 들어서 있었다.
“오래 머물지는 않겠소. 염치 불구하고 잠시 신세 좀 지겠소.”
반사영은 누군가에게 부탁해 본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고 있는 게 있었다. 남에게 부탁을 할 때는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을.
과적은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의 상황을 자신만 이해 못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림 고수를 위장한 사기꾼? 아니면 련주가 보낸 감시자?’
이런저런 가능성을 열어 두고 고민해 봤지만, 이 빌어 처먹을 놈의 정체는 물음표였다.
도대체 얼마만큼 낯짝이 두꺼우면 저리도 딱딱한 말투를 써 가면서 지난날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저 인간의 눈에는 자신의 옆구리에 쑤셔 박힌 붕대가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면 지금 수하들 앞에서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의도인 걸까.
생각할수록 머리만 터져 버릴 것 같다.
“그, 그렇게 하시죠.”
“고맙소. 제 방은 어디로?”
“저기, 저기를 쓰시면 됩니다.”
반사영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과적이 가리킨 아담한 오두막으로 걸어갔다.
“채주, 어쩌자고.”
“조용히 해라. 나도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니.”
산호채 산적들의 관심 어린 시선을 독차지하며 반사영은 당분간 머물 새로운 숙소로 들어섰다.
낯짝이 두꺼워 산호채로 당당히 들어온 건 아니다. 나름 굉장히 고민을 하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산호채로 들어온 이유는 딱 두 가지다. 하나는 바로 생존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도 전에 이름도 모를 산에서 객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까지고 나무에 달린 과일만 따 먹을 순 없었다. 그렇다고 직접 살아 있는 짐승을 잡아 손질을 하고, 구워 먹을 만큼 비위가 좋다거나 기술이 훌륭한 것도 아니다.
물론 마음먹고 하려면 하겠지만, 쉽지가 않았다.
사람까지 죽여 놓고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우스웠지만, 어쨌든 반사영으로서는 산호채를 방문한 건 최선의 선택이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자신이 이곳에서 여러 산적들과 비무 아닌 비무를 벌이며 스스로가 지닌 무공을 구체화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혼자 공상이나 허공에다 검을 휘두르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훈련을 할 수 있고, 잠자리와 먹을거리를 제공받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바로 산호채였다.
물론 자신이 하는 비무는 산적들의 무공 증진을 위한 일의 대가라 위장되어야만 했고 말이다. 산적질이나 하는 이들의 무공 증진 같은 걸 하기엔 아직 반사영의 양심은 멀쩡했다.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어느 정도 때가 됐다 싶으면 미련 없이 떠날 작정이었다.
해가 떨어지자 과적이 직접 요기 거리를 들고서 반사영을 찾아왔다.
“흠, 흠.”
“…….”
불과 며칠 전 첫 만남 때만 하더라도 검을 들고 서로를 죽이려고 했던 두 사람이 검을 놓은 채 마주하니 어색하기만 했다.
과적은 괜히 주변을 둘러보며 딴청을 피웠고, 반사영은 주린 배를 채울 음식이 눈앞에 있음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과적이 못마땅했다. 그렇다고 집주인에게 나가 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맛있소.”
과적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이런 말투는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지난번처럼 그냥 편하게 말씀하시죠. 서로 처음 본 사이도 아닌데.”
“쩝…… 그러죠.”
“말 나온 김에 뭐 하나만 물읍시다. 왜 우리 애들을 죽인 겁니까?”
“푸학!”
반사영은 갑자기 입안에서 우물거리던 음식을 밖으로 뿜었다.
과적의 옷에 그 이물질 중 태반이 묻었다.
하지만 과적에게는 옷보다 대답이 더 중요했다.
“그건…….”
어쩔 수 없이 반사영은 이 산에서 처음 산적들을 만나고 시비를 건 이유에 대해서 사실대로 토해 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과적은 멍한 얼굴로 한참 동안 할 말을 잃었다.
검기를 뿌려 대는 인간이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연습 대상이 필요하다?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 못할 일이다. 녹림총련에는 서른여섯 개의 산채가 존재한다. 산채에서도 가장 강한 자들이 채주의 자리에 앉는다.
그 서른여섯 명의 채주들 중 검기를 뿌릴 수준의 고수는 딱 두 명으로 알고 있었다. 녹림총련의 련주와 부련주.
그만큼 검기를 다룬다는 건 일류를 넘어야만이 가능한 일이다.
천하에는 그런 자들이 많이 있지만, 그 정도 되는 고수들이 일개 산적을 상대로 실전 연습을 할 리가 없었다.
기본적인 그릇의 차이가 크니 오히려 더 실력이 퇴보할 가능성도 없지 않는 일이다.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단지 제가 좀 흥분을 하는 바람에.”
과적은 화를 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분명 자신은 지금 분노해야 옳았다. 능력은 없지만 명색이 산호채의 채주다.
채주가 식구 같은 수하들을 죽인 놈을 앞에 두고 손수 식사를 챙겨다 주는 건 미친 짓거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자는 검기를 뿌리는 고수다.
약육강식.
그 진리는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적으로 대하기 두렵다면 벗이 되거나 동료가 되면 되는 일이다. 과적이 서른 살 먹도록 배운 진리였다.
벗이나 동료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은 없다. 그렇다면 철저하게 이용할 생각이었다.
“저희 애들을 상대로 경험도 쌓으면서 깨달음의 기회를 주시면 어떨까요.”
반사영이 할 말을 과적이 대신해 주고 있었다. 반사영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부족하지만 열심히 한번 해 보겠습니다.”
불과 사흘 뒤, 과적은 자신의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해야만 했다.
“커허억!”
“아이고, 나 죽는다!”
“제발 그만! 그만합시다!”
산호채 곳곳에서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매일같이 수련이라는 명목 아래 이루어지는 구타의 참상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과적의 얼굴은 세상에 낙이란 낙은 모조리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도대체 어딜 어떻게 봐서 저 짓거리가 수련의 일종이란 말인지, 과적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뭐하십니까?”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과적과 눈이 마주친 반사영이 목검을 까딱거렸다.
“나?”
설마 자신을 가리키는 것인가를 되물었지만, 누가 봐도 반사영이 들고 있는 목검의 끝은 과적에게서 꽂혀 있었다.
“지금 산호채에서 저와 비무를 하지 않은 분은 그쪽 말고는 없지 말입니다.”
“아, 아니, 난 좀 몸이 좋지 않아서.”
“어제도 그 말을 하셨던 거 같은데요.”
“몸이 좋지 않은 것보다 채주로서의 체면도 있고 하니까. 응?”
“뒤에 숨어 명령질만 하는 윗대가리를 믿고 목숨을 바칠 수하는 없습니다.”
“윗……대가리? 명령질?”
과적은 주변에서 전해지는 따가운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반사영을 받아들이고, 수하들의 능력 향상을 제안한 건 자신이었다. 수하들의 눈초리에서 그런 원망을 이미 며칠 전부터 지겹게 받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다 모두가 하는 비무를 자신만 안 했다가는 대놓고 수하들의 원망을 살 기세다.
수하들 앞에서 당할 망신도 망신이지만, 그런 위기를 맞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과적은 목검을 들었다.
“자, 갑니다!”
반사영과 과적의 비무가 시작됐다. 한차례 반사영에게 비무를 위장한 구타를 당한 다른 이들은 고소를 머금으며 두 사람의 비무를 지켜봤다.
물론 결과는 과적의 참패로 끝났다.
벌에 쏘인 것처럼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고, 코피가 흐르자 나뭇잎을 구겨 코를 틀어막았다. 불과 일각 만에 과적의 몰골은 처참하게 망가져 버렸다.
“언제까지 머물 생각인 거냐?”
“그야…….”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하려던 반사영은 말끝을 흐렸다. 천천히 머물면서 수하들의 무력 증진을 위해 힘써 달라는 부탁을 받은 당사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으니 당혹스러웠다.
“낙양으로 간다고 했나?”
“네.”
“천검맹으로 가려고?”
“어찌 아셨습니까?”
“무림인이 낙양으로 가는 이유 중 태반은 천검맹 때문이지. 하긴 조만간 천검맹 입맹 시험이 열리긴 하지.”
“입맹 시험이오?”
“입맹 시험을 보러 낙양으로 가는 게 아니었어?”
“그건…… 아니었어요.”
“그래? 그럼 상관없겠군.”
문득 반사영은 호기심이 생겼다.
“언제 열리는데요.”
“얼마 안 남았어. 한 한 달 정도?”
반사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입맹 시험이라면 다양한 사람들이 몰릴 것이다.
물론 여기서 수준 낮은 산적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유익할 거라는 건 자명한 일이다. 애초에 목적지가 천검맹이었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 아버지의 무공 체계에 대한 기본은 몸에 익었다.
이 시점이라면 조금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세상으로 나아가도 괜찮지 싶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천검맹 입맹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과적의 말을 들으니 서둘러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떠나려면 지금이 적기다. 더 이상 미적대는 건 어쩌면 시간 낭비일지도 몰랐다.
본래 계획은 무영살검류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서 산을 내려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무공이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흔히 깨달음이라는 건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검을 섞으면서 찾아온다고 했다. 이곳에서 머물면서 반사영도 깨달은 것이다.
혼자서도, 수준이 낮은 이들을 상대로 백날 검을 휘둘러도 그 깨달음이라는 건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로부터 사흘 뒤.
반사영은 낡은 지도 한 장과 당분간 먹을 식량을 가득 챙겨서 산호채를 나섰다.
“잘 가! 보고 싶을 거다!”
산호채의 산적들에게 배웅을 받으며 반사영은 해맑게 팔을 휘둘렀다. 첫 만남이 어떻든 짧은 시간이나마 같이 지내니 정이라는 게 든 모양이다.
저들은 동료의 목숨을 빼앗아 간 자신을 진정 아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반사영이 모습을 감추자, 그들은 통곡의 눈물을 쏟아 냈다. 특히나 과적은 수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수하들이 겪었을 고충을 눈으로, 몸으로 느끼고 나니 그 감정은 더욱 북받쳐 올랐다.
“으허허헝! 내 저놈을 다시 보는 날에는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을 것이다!”
통렬한 과적의 외침이 산호채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