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무영존 1권(13화)
4장. 낙양(2)
“일단 숙소를 정하지 않았다면 나와 함께 가지.”
“…….”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네. 천검맹에서 요직에 계신 분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네. 만약 천검맹 무인들이 자네에게 해코지를 하려 한다면, 그분의 이름을 대고 내가 본 그대로의 자초지종을 설명해 줄 수 있네.”
하지만 반사영의 눈초리는 여전히 경계를 띠고 있었다. 사내는 마치 어린아이를 감언이설로 꼬드기는 파렴치한 납치범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사내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름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백리웅(百里雄)이네.”
“……?”
“내 이름 말일세.”
“아, 그렇군요. 전 반사영이라고 합니다.”
‘아, 그렇군요.’라는 반응이 나올 줄은 미처 몰랐던 백리웅이다. 자신에게는 백리세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백리세가는 천검맹의 구중천에서도 위지세가 다음으로 쳐 주는 가문이었다.
무림에 무지한 자라 할지라도 반사영 같은 반응을 보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화자찬을 떠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딱히 정해진 숙소는 없으니, 귀공을 따라가겠습니다.”
“그, 그래 주겠나? 그리고 귀공은 무슨…… 앞으로 형님이라 부르게.”
“하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백리웅은 문득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도움을 주고 싶었을 뿐이다. 한데 마치 반사영에게 자신이 도움을 주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행동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여튼 뭔가 이상한 녀석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예의가 아닌지는 알지만,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나?”
“예의가 아니면 하지 않는 것이 도리라 배웠습니다.”
“그, 그런가.”
“농이었습니다.”
“그리 재밌지는 않군.”
오늘 처음 봤지만 백리웅은 반사영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왠지 자신이 앞으로 이끌어 줘야 할 것 같은 묘한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다.
반사영은 말끔하게 씻은 뒤라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백리웅도 깜짝 놀랄 만한 외모였다. 엄청난 미공자는 아니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훨씬 고급스럽게 바뀌어 있었다.
“자네 사문이 어딘지 궁금한데 말이야.”
“없습니다, 그런 거.”
“없어? 그럼 사부님은?”
“그건…… 비밀로 하겠습니다.”
백리웅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무림인치고 아픔이나 비밀이 없는 과거를 지닌 자는 없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사문이 없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천화객에서 보여 준 반사영의 움직임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비록 천검맹 일반 무인들이라 하더라도 엄격한 수련을 통해 단련된 자들이다. 그런 이들을 그토록 빠른 시간 안에 제압을 한다는 건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저녁을 먹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백리라는 성을 이어받으셨으면서 천검맹 입맹 시험을 따로 치르는 이유가 있나요?”
“이런…… 자네!”
반사영은 씩 웃었다. 백리웅이 이름을 밝혔을 때 솔직히 놀란 건 사실이다. 이미 반사영은 오랜 시간 무림에 대해서 궁금해 왔고, 또한 책을 통해서 접해 왔던 경험이 있었다. 그런 그가 구중천에 중심 역할을 해 오는 백리세가를 모를 리가 없었다.
모르는 척했던 것은 백리웅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자신이 가진 것을 과시하는 사람이었다면 함께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만으로 백리웅을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반사영의 입장에서는 친분을 쌓아 둬서 나쁘지는 않을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럼 그렇지! 무림인치고는 백리세가를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이지.”
백리웅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반사영은 무림인이라는 그의 말에 조금 낯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백리웅의 말처럼 백리세가를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구중천 중 위지세가를 으뜸을 꼽는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무림 정세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이들은 백리세가를 잠룡으로 부른다.
그 성장 가능성과 속도는 이미 위지세가를 위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이번에 백리세가의 가주로 자리한 백리천호(百里天豪)는 사십 대의 젊고 패기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무공뿐만 아니라 야욕도 강해 언젠간 위지세가를 꺾고 천검맹 맹주 자리에 오를지 모를 일이다.
“대부분 구중천 수장들의 직계라면 그렇게들 하지.”
“직계가 아니라는 소리군요.”
백리웅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에 내놓은 자식인지라 늘 주목받지 못한 채 겉돌았지.”
“하지만 백리세가 본가에서 자라고 나셨다면 웬만한 절기들은 배우셨을 테니 입맹 시험은 무난하게 치르시겠네요.”
“후훗. 그렇지도 않네. 난, 본가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으니.”
백리웅은 화주를 시켜 잔에 따르더니 들이켰다. 본가에서 자라지 못했다면 그저 형식적으로나마 백리라는 성을 이어받은 것이리라. 반사영은 아마도 그의 성장 과정이 남들보다 훨씬 힘들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네, 천검맹 내에서 근무하는 관리가 되고 싶은 건가?”
“네.”
“자네 정도의 실력이면 무인으로서의 시험은 기본으로 통과하는데다가 잘하면 중요 무력 부대에서 활동을 할 수 있을 텐데.”
반사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림인으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거짓말을 한다는 건 꺼림칙한 일이지만,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개인적인 일을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상당한 무공을 지녔음에도 무림인으로 살고 싶지 않다? 이해할 수 없군.”
“…….”
“오늘 있었던 일…… 경솔했네. 자네의 사문을 물어본 건 그만한 일을 저질렀다면 믿는 구석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네.”
백리웅은 어느새 술 한 병을 비우고 다시 주문했다.
“사문이 변변치 못하다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출세하기는 힘들지. 천검맹은 사문을 중요시하는 곳 중 하나네. 자신들의 세가와 문파에서 배출한 자제나 제자들이 중요한 자리에 앉아 권력을 움켜쥐고 있지.”
“상관없습니다. 출세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왔으니 전 떳떳하니까요.”
백리웅은 반사영이 답답했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마치 예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더 마음이 쓰였다.
앞으로 반사영이 겪어야 할 미래가 보이기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자연스럽게 본래 주량을 넘어섰다.
내일 있을 천검맹 시험으로 인해 두 사람은 일찍 잠을 청했다. 백리웅은 반사영을 보호해 준다는 명목을 잊은 채 잠이 들어 버렸다.
하지만 반사영은 탁자 위에 놓인 서찰을 읽고 나서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 서찰에 적힌 내용을 반사영은 떠올렸다.
반적풍의 신분과 그가 왜 죽었는지를 알고 싶다면 반드시 천검맹 입맹 시험을 치르라는 내용이었다.
즉, 오늘 있었던 천검맹 무인들과의 싸움을 이 서찰을 보낸 이는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오늘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천검맹 입맹 시험을 보지 않고 도망칠지도 모른다고 상대는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반사영은 아버지가 그저 그런 삼류 무림인이었다고 생각해 왔다. 아버지의 무공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서 그런 생각들은 버려야만 했다.
천검맹 무림인들을 아주 가볍게 쓰러트린 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은 반사영이다. 그들의 움직임이 너무나 느렸고, 피하고 반격하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버지의 신분?’
도대체 아버지가 천검맹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지금의 반사영으로서는 짐작이 가질 않았다. 분명한 건 자신이 어린 시절 생각하던 그저 그런 삼류 무인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뿐이었다.
“어제 혹시 무슨 실수라도 하지 않았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백리웅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반사영에게 물었다. 본래 무림인들에게 술기운을 없애는 것쯤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어제는 취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섰다. 덕분에 어제의 일이 가물가물했다.
주사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찜찜한 마음이 들어 물어보는 것이다.
“실망입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백리웅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옷은 입으라고 있는 거지, 찢으라고 만든 것이 아닙니다. 특히나 계집의 옷이 아닌 사내의 옷을…….”
침통한 표정으로 반사영이 고개를 숙이자, 백리웅은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자네 옷을 찢으려 들었다고? 내가?”
반사영은 묵묵부답일 뿐이다. 그저 한숨을 내뱉고는 먼 산을 쳐다봤다. 그 옆에 있는 백리웅의 얼굴빛이 똥색이 되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미, 미안하네. 사과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남색을 즐긴다거나 뭐 그런 소수의 취향일 거라고 오해는 말아 주게나.”
“글쎄요. 아무리 술에 취했다고는 하나 도저히 제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백리웅을 골려 먹는 재미에 빠진 반사영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곤혹스러웠다. 백리웅은 반사영이 처음으로 사귄 무림인이다. 지금까지 그려 오던 잔혹하고 삭막한 무림인의 고정관념을 그가 깨트려 주고 있었다.
어수룩하고 순수한 모습이 반사영은 마음에 들었다. 반사영의 거짓말에 자신이 농락당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백리웅은 사과와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런 와중에 두 사람은 천검맹 총타에 점점 가까워졌다.
“저도 입맹 시험을 치를까 합니다.”
“정말인가?”
“네. 생각이 좀 바뀌었거든요.”
“어허,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하룻밤 만에 말을 바꾸다니. 나야말로 자네에게 실망했네.”
“하룻밤 만에 동생에게 연모하는 마음을 품은 형님보다야 낫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
백리웅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래저래 반사영에게 약점 하나는 크게 잡힌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런 더러운 짓을 저지른 자신을 책망할 수밖에 없었다.
천검맹에 다 와 갈수록 백리웅의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바로 반사영이 어제 저지른 일 때문이다.
천검맹 입맹을 원하는 자가 천검맹 무인을 건드렸다? 이것만큼 골치 아픈 일도 없었다. 어제와는 달리 외적으로 깔끔해져 있었지만, 안심할 수준도 못 되었다.
특히나 어제 반사영은 스스로 천검맹 입맹 시험에 관련된 말을 내뱉었다. 아마 어제 반사영에게 당한 자들과 상관들이 그를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을 것이다.
만약 일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커진다면 자신이 반사영을 지켜 줄 수 있을까? 막상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반사영에게 말했지만 자신은 본가에서 자리지도 못한 처지였다. 하지만 일단은 백리라는 성을 이용하여 어느 정도 선에서 마무리를 한다면 그렇게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라지 말라고.”
백리웅이 천검맹 총타를 방문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 이곳을 봤을 때 받았던 충격은 아직도 뇌리에 깊게 박혀 있었다. 곧 반사영도 그때의 자신과 같은 반응을 보일 게 틀림없었다.
“저게 다 뭡니까?”
“뭐긴 뭐냐. 사람이지. 것도 동네에서 난다 긴다 하는 무림인들.”
반사영이 놀란 건 당연했다. 천검맹 총타 정문에서부터 길게 늘어진 행렬의 길이만 족히 삼십 장이다. 촌구석에서만 자라 오던 반사영이 한 번에 저렇게 많은 인원이 줄을 서고 있는 광경을 봤을 리가 없었다. 가히 장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 사람들이 다…….”
“그렇지. 모두가 오늘 있을 입맹 시험을 보기 위해 상경한 자들이지.”
반사영의 반응이 재밌는지 백리웅은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워낙 시골에서 자라 온 것 때문인지 반응이 아주 격렬하군.”
백리웅은 반사영이 자신을 놀린 것에 대한 소심한 복수를 했다. 반사영에게 그런 백리웅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입을 벌리고, 그 광경에 좀 더 놀라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