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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존 1권(15화)
4장. 낙양(4)


입맹 시험은 백룡단원들이 주관했다.
한데 오늘 아침 백리연이 찾아와 자신이 백룡단 옷차림을 하고서 비무를 하겠다는 부탁을 해 왔다.
말이 부탁이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누군가 비위에 거슬리는 놈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한데 반대로 된통 얻어맞고 있으니 당하는 백리연도 어이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후에 있을 후폭풍이다.
백리연은 적랑대 부대주이기 전에 백리세가의 혈육이다. 만약 그가 저토록 걸레짝이 되어서 몸져누워 있는 게 소문이라도 나는 날에 담당자인 자신의 미래는 장담하지 못하게 된다.
“마, 말려라! 어서!”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공문기는 벼락같이 소리쳤다.
“대체 저놈은 정체가 뭐란 말이냐!”



5장. 새로이 만난 사람들(1)


삼 일간에 진행된 천검맹 입맹 시험이 끝이 났다. 이번 입맹 시험은 천검맹 내에서도 화젯거리를 많이 낳았다.
하나는 경공, 보법, 비무 세 분야 모두 통과한 녀석이 있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적랑대 부대주 백리연이 입맹 시험을 치르는 비무에 참여했다가 듣도 보도 못한 애송이에게 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인정사정없이 줘 터져 반나절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는 건 무료하던 천검맹 내에서 활력소가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구중천에서 한 축을 담당하는 백리세가의 입장에서는 망신살이가 아닐 수 없었다. 백리연과 같은 피가 흐르는 이들은 물론 백리세가의 제자들은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다.
천검맹에 규율을 어긴 백리연은 당분간 적랑대 부대주의 직위를 박탈당하고 근신 처분을 당해야만 했다.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요.”
“기고만장하던 녀석이 망신을 당한 건 좋은 일이지만…… 인정받지 못한다고는 해도 나 또한 백리 성을 이어받지 않았나.”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반사영은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백리웅의 얼굴이 이토록 어두워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아닐세. 어차피 백리연이 자초한 일이니 자네를 탓할 생각은 없네.”
“한데 언제까지 그런 요상한 말투를 쓰실 건데요?”
“응?”
“저는 형님을 형님이라고 부르는데, 형님은 저를 자네라고 부르시지 않습니까.”
“그, 그렇군.”
“앞으로는 조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동생이 부끄럽지 않게요.”
백리웅은 반사영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하겠…… 아니, 앞으로는 그러도록 하마.”
백리웅은 자신에게 귀여운 동생 하나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두 사람은 시험에 통과를 했고, 정식적으로 천검맹 무인이 되었다. 반사영, 백리웅과 같이 이번 시험에 통과한 이들은 총 서른 명이다.
대부분이 이름 없는 문파의 제자들이거나 낭인 생활을 해 오던 자들이었다. 백룡단이라는 거창한 조직명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 천검맹 내에서는 무시를 받기 위해 태어난 조직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칠대무력조직에 속해 있는 이들의 심부름을 하는 처지나 다름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백룡단 소속 무인들은 명망이 높은 세가나 문파, 무공사부나 인맥이 없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그런 뒷배경이 있었다면 백룡단이 아닌 칠대무력조직에 바로 속해졌을 테니까 말이다.
있는 놈들은 어떻게든 잘 먹고, 잘 사는 이치가 천검맹 내에서도 관례처럼 이어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무시를 받으면서도 백룡단 무인들은 천검맹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해했다. 안에서는 무시를 받을지언정 밖에서는 당당해질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보수도 어느 곳보다 괜찮았고, 생활하는 환경도 훌륭했다.
반사영과 백리웅에게는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시험을 보기 위해 임시로 머물렀던 그곳에서 하루 정도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돌아다니는 것도 자유였다.
반사영은 어린아이처럼 백리웅을 따라다니며 천검맹 내부를 구경했다. 처음 낙양으로 들어섰을 때만 해도 입을 딱 벌리고 구경에 정신 팔려 있던 반사영이었다.
천검맹 총타의 내부는 상상 이상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오른 건물의 위용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주눅이 들 정도였다.
그런 고층 건물들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입 좀 다물지. 침 떨어지니까.”
“아……하하!”
멋쩍게 웃으며 반사영은 연신 주변을 둘러보는 데 정신이 없었다,
“저렇게 큰 연못은 처음 봅니다.”
“솔직히 말할까?”
“네?”
“나도 처음 봐.”
두 사람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저에게 얻어맞은 자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 치료를 받고 있을 수도 있어. 그러니 안심하기에는 일러.”
워낙 넓은 곳이기에 두 사람이 구경을 다니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내일부터는 정해진 대로 움직여야 했기에 일찍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임시 숙소로 돌아오는데, 누군가와 마주쳤다.
“오랜만일세.”
백리웅이 사내를 알아보고 말을 건넸다.
반사영도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신검무를 펼쳤던 사내다. 긴 머리를 깔끔하게 묶은 그는 호리호리한 체형을 갖고 있었다.
“알아보셨군요.”
“당연하지. 그때는 자네가 너무 어려서 지금과는 다르지만, 신검무를 못 알아볼 리가 있나.”
백리웅과 사내는 서로 일면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 이 친구는 함께 입맹 시험을 본 반사영이네.”
“워낙 유명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적랑대 부대주를 박살 낸 것 때문이었다.
“단유하(段柳霞)입니다.”
“반사영입니다.”
“그날 비무는 감명 깊게 봤습니다.”
“저 또한 누구도 펼칠 수 없다는 신검무를 통해 개안을 한 기분이었습니다.”
단유하는 백리웅을 쳐다봤다. 이 젊은 녀석이 어떻게 신검무를 알아봤는지에 대한 무언의 질문이었다.
백리웅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책을 통해서 알고 있던데, 라고는 차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분명 이상한 놈 취급을 받을 게 분명했다.
“이보게들! 같이 좀 어울리세.”
그때 세 사람에게 거한의 사내가 다가왔다.
짧은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이 딱 산적 두목처럼 생긴 사내였다.
“무태(茂泰)라고 하네!”
처음 본 이들을 대하는 것치고는 무태라는 사내의 태도는 시원시원하고 거침이 없었다.
백리웅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씩 웃었고, 단유하는 무뚝뚝한 눈으로 무태를 쳐다봤다.
‘이런 사람치고 머리 좋은 사람은 못 봤는데…… 쩝.’
반사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입맛을 다셨다.
이때까지만 해도 네 사람은 자신들이 어떤 운명을 함께 맞이할지에 대해서 알 수 없었다.

***

새롭게 뽑힌 무인들에게 백룡단의 무복이 전해졌다. 백색 무복…… 이것은 백룡단뿐만이 아니라 천검맹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 옷을 입는 것만으로도 평범함 무인으로서는 꿈같은 일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 이번에 새롭게 편성된 이들을 불러 모아 놓고 단주인 공문기의 장대한 연설이 시작됐다.
구태의연하고 따분한 공문기의 말을 듣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하품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특히나 거한의 사내 무태의 하품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러게 작작 좀 마시지 그랬나.”
백리웅이 옆에서 혀를 차며 말했다.
“같이 계셔 놓고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저기 저 비실비실한 놈이…… 아오, 그냥!”
무태의 시선은 앞줄에 서 있는 반사영의 뒤통수에 꽂혀 있었다. 어제 처음 만난 네 사람은 몰래 천검맹 외부로 빠져나갔었다.
물론 정문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은밀하게 몰래 나갈 수 있었던 건 작은 개구멍 덕분이었다.
그런 곳이 있다고 알려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태였다. 처음 천검맹에 온 무태가 그곳을 어찌 알았을까.
현 백룡단 단원들 중 무태와 친분이 있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무태가 용호방(龍虎幇) 출신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용호방은 낭인들이 모여 만든 세력이었다.
과거 존재했던 구파일방의 개방처럼 지금의 용호방이 그런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중원 각지에 흩어져 있는 낭인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고, 그들이 주고받는 정보의 양도 엄청났다.
무태는 용호방에서 태어나 자랐고, 덕분에 인맥이 넓을 수밖에 없었다. 용호방 출신 중에 백룡단에서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자들도 상당했다.
“샌님같이 생긴 게…….”
여전히 반사영을 노려보는 무태는 어제의 일을 떠올리자 이가 갈린다. 어디 가서 술 잘 먹는 걸로는 꿀리지 않을 자신이 있던 그였다.
한데 그 자신감은 어제 반사영으로 인해 처참히 박살 났다. 내공을 이용하여 술독을 없애지 않고서 순수한 육체로 술을 받아들였다. 물론 승자는 반사영이었고, 무태는 의식을 잃고 오늘 아침에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분명 무슨 꼼수를 쓴 걸 거야.”
아직은 패배를 인정하기 싫은 그였다.
“어이, 무태야!”
공문기의 연설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진 순간, 반사영이 무태의 이름을 불렀다.
“지, 지금 나한테 한 소리냐?”
무태의 커다란 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졌다.
“변소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 설마 얼굴에 철판때기 깔고 능청스러운 연기를 하는 거냐, 무태야?”
백리웅과 단유하가 옆에서 끅끅거리며 웃음을 참아 내고 있었다. 정작 무태 본인만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갑자기 반사영이 반말을 찍찍 내뱉자, 얼굴만 벌겋게 달아오를 뿐이다.
“너…… 너 이 자식!”
“형님에게 너?”
“네가 왜 내 형님이라는 거냐!”
“쯔쯧. 이래서 술자리에서의 내기는 믿을 게 못 된다니까.”
“내기?”
“아주 연기를 잘하시네. 모르는 척하는 연기가 수준급인데.”
무태는 백리웅과 단유하를 쳐다봤다.
두 사람은 여전히 웃음을 참아 내기 어려운 얼굴들이었다.
“대체 뭐가 웃긴 거요! 설마 내가 어제 술 내기를……!”
그 순간 무태의 얼굴이 새까매졌다.
‘이런 젠장!’
이제야 생각이 났다. 샌님같이 생긴 반사영이 먼저 술 내기를 하자고 도발을 해 왔고,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할 의지가 강했던 무태 스스로가 한 내기!
“표정을 보아하니 생각이 난 것 같은데…… 정식으로 이제부터는 깍듯하게 대해라. 알았지?”
반사영은 진지한 얼굴로 무태의 어깨를 툭툭 치기까지 했다. 아무리 내기를 했기로서니, 그것도 술자리에서 한 내기를 진정 실행에 옮기다니.
백리웅은 혀를 내둘렀다.
나이는 어리지만 뭔가 꽉 막힌 구석이 있었다.
“심호흡 좀 해라. 얼굴 터지겠다.”
세 사람 중 동갑내기인 단유하의 말에 무태는 토해 내듯 숨을 내뱉었다.
“이 자식! 가만 안 둔다. 오늘 다시 승부를 보자고!”
멀어져 가는 세 사람의 등 뒤에 대고 무태가 소리쳤다.

백룡단으로 입단하고 나서 일 년이라는 수련 기간을 거쳐야만이 진짜 백룡단 무인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 기간 동안에 오랜 시간 내려오는 내공심법, 검법, 권법, 지법, 보법과 경공을 차례대로 배운다. 그 과정은 지루할 틈도 없이 빠르게 진행된다. 열에 하나는 그 과정이 힘들어 중도 포기를 했다.
이번 시험에 합격한 이들의 숫자는 도합 서른 명이다. 이들은 세 개의 대로 나뉘어 각각 정해진 시간표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세 개의 대에서도 다섯 명 내지는 네 명으로 이루어진 조의 조원들이 같은 방을 쓰게 되어 있었다.
반사영과 백리웅, 그리고 단유하와 무태가 공교롭게도 같은 조에 속했다. 고로 네 사람은 일 년간 같이 자고, 먹고를 반복해야만 했다.
“사내놈들끼리 일 년을 지내야 한다니. 염병할!”
무태는 덩치와 안 맞게 눈망울이 그렁그렁해져 있었다.
“마치 이런 과정이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말투로군.”
“알고 있었죠. 하지만 막상 닥치니 속에서 천불이 납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단유하가 무태를 거들고 나섰다.
“크하하하! 이거 누구처럼 완전 샌님인지 알았더니 통하는 구석이 있었구먼!”
반사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조용히 좀 하지, 무태.”
여전히 반말을 내뱉는 반사영의 말을 무태는 조용히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