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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존 1권(16화)
5장. 새로이 만난 사람들(2)
“너는 계집이 뭐라고 생각하냐.”
“삶의 희망!”
“계집은 사내에게 소금 같은 거다.”
“소금?”
“그래, 소금. 영양분은 없어도 음식에 맛을 내주거든!”
“음…… 으하하! 기가 막힌 표현이구나!”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좋아 죽겠다는 얼굴들을 하고서 웃음을 터트렸다. 반사영은 그래도 좀 멀쩡해 보이던 단유하가 저렇게 음담패설을 나누는 걸 보며 혀를 찼다. 역시 사람은 겉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걸 배웠다.
“그래, 너도 계집질 좀 했던 모양이지?”
“내 별호가 뭐였는지 알아?”
“응?”
“옥면검(玉面劍)! 산동에서 옥면검 단유하를 모르는 계집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네 상판이 옥면까지는 아닌데?”
무태는 냉정하게 평가했다.
“모름지기 남자는 내 이 허벅지처럼 굵고 단단해야 계집질 좀 한다는 소리를 듣는 거라고.”
“수준 떨어져서 같이 못 있겠네.”
“크흐흐. 뭐, 계집을 품어 봤어야 대화가 통하는 법이지.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게 이 형님들이랑 급이 같겠어? 술만 잘 마신다고 다 남자는 아니지.”
“어이구, 자랑이십니다.”
무태는 반사영이 자신들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기분이 좋아졌다. 어제 일에 대한 복수를 했다는 생각에 통쾌함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 지옥 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착잡한 심정이 들었다.
“후회하나?”
“그런 아닙니다. 단지 답답할 뿐이죠.”
“자네는 왜 백룡단에 들어왔나? 자네 성격에는 자유로운 용호방이 더 나았을 것인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무태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깨가 축 늘어진 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했다.
“꼴불견이 따로 없네.”
“뭐야?”
그 모습이 못마땅한 반사영이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덩치에 좀 맞게 굴어라.”
반사영은 여전히 반말을 고수했다.
백리웅은 그런 그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약속을 목숨처럼 중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융통성이 없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건 단유하와 무태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뭐……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세 사람이 동시에 벙 찐 얼굴을 하고서 반사영을 쳐다봤다.
“알 수 없는 놈이네.”
“어디 끝까지 가겠다. 이거지?”
단유하와 무태가 한마디씩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날 밤 예정되어 있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신입 백룡단원들은 긴급히 연무장으로 모이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단잠에 빠져 있던 신참 서른 명이 황급히 한자리에 모였다. 단사에는 공문기가 똥 씹은 얼굴을 하고서 서 있었다.
“아…… 이렇게 갑자기 모이라고 한 이유는 중차대한 발표를 하고자 함이다.”
공문기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건만.’
서글픈 감정이 들어 차마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그 모진 세월을…… 말단인 백룡단 단주가 되기 위해 버텼건만.’
단상과 신참들 사이는 꽤나 거리가 있었지만, 반사영은 백룡단 단주라는 자가 울먹거리는 모습이 확연하게 보였다.
“중대한 발표는…… 으흠…….”
묘한 신음 소리까지 내어 가면서도 공문기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저 자식 끌어내! 추워 죽겠는데 질질 끌고 지랄이야.”
이윽고 참지 못한 누군가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명령을 내렸다. 서른 명의 시선에 공문기가 단상에서 끌려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누군가가 올라섰다.
얼굴은 시퍼런 멍으로 가득했고, 팔은 붕대로 칭칭 감겨져 있었다. 게다가 다리도 불편한지 절뚝거렸다.
“이번에 새롭게 백룡단 단주가 된 백리연이다.”
“……!”
그의 말에 서른 명의 신참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적랑대 부대주 백리연의 악행은 그들도 익히 들어왔던 것이다. 그런 그가 백룡단 단주가 되다니.
씩 웃는 백리연의 시선은 단 한 명에게 꽂혀 있었다. 바로 반사영이다.
‘이노옴! 결코 평탄한 생활은 되지 않을 것이다!’
반사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 표독스러운 눈빛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백리연은 그다음으로 백리웅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기어코 세가 망신을 시키겠다고 백룡단으로 들어온 걸 후회하게 해 주마.’
열의를 다지는 그와 달리 반사영이나 백리웅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이번 신참 서른 명의 훈련은 단주인 내가 직접 맡을 것이다.”
단주의 체면상 지금까지 신참들의 훈련은 부단주들 중 한 명이 맡아서 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독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말하는 그의 앞에서 누구도 반박을 하고 나설 수도 없었다.
지난번 맹의 규율을 어기고 저지른 사고로 인해 백리연은 부대주 자리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엄연히 백리세가의 혈육인 그를 천검맹 외부로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백리연은 백룡단 단주 자리를 꿰차는 것으로 벌을 대신하겠다고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을 꺾은 일이었다.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내려오는 것만큼 자존심이 상하는 일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백리연은 세가로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자신을 이렇게 만든 놈들에게 복수를 하고자 백룡단 단주가 된 것이다.
지금은 저 두 놈이 태연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곧 뼈저리게 후회를 안겨다 줄 작정이었다.
“걱정 안 돼요?”
“걱정보다 놀라움이 더 커.”
“왜요?”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녀석인데…… 백룡단 단주가 되다니.”
반사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백리연을 처음 본 날 그가 백리웅에게 했던 행동들을 봤을 때 지독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당사자인 백리웅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데 지금의 백리웅은 어쩐지 백리연을 걱정하는 말투로 말을 하고 있었다.
“이래서 착한 사람들 주변에는 그런 뭣 같은 것들이 꼬이는 겁니다.”
“응?”
“형님 말입니다. 그렇게 당하시면서도 뒤에서는 그놈을 걱정하고 있으니, 백리연 같은 녀석들이 주변에서 시비를 거는 거라고요.”
“입……조심해.”
“……!”
“그래도 내게는 가족 같은 녀석이다. 그러니 함부로 말을 하지는 마라.”
“…….”
늘 사람 좋은 미소만 보이던 백리웅에게서 볼 수 없었던 강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반사영은 움찔하여 어떤 반박도 하지 못했다.
***
날이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곧 여름이 다가온다. 날이 덥다고, 혹은 날이 춥다고 해서 무인들의 훈련 강도가 조율되지는 않는다. 그것이 천검맹 무인들이라면 더욱더 빡세진다.
특히나 백룡단 단원들의 훈련 강도는 역사상 가장 지독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단주가 백리연으로 바뀌고 나서부터였다.
특히나 이제 입단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참들로서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모두에게 이처럼 빠듯한 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훈련은 익숙하지가 않았다.
“변태 새끼.”
반사영이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참들을 훈련시킬 적에 백리연의 표정은 즐겁게 웃고 있었다. 단원들이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는 걸 보면서 묘한 쾌락을 느끼는 것 같은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마, 입조심해. 안 그래도 너랑 웅 형님 때문에 훈련 강도가 이렇다고 단원들 사이에서 말이 많아.”
“하! 그게 왜 우리 때문입니까. 저놈 속이 콩알만 해서 그런 거지.”
“그럼 저 단주 놈에게 가서 시비를 걸겠냐. 만만한 게 우리지.”
무태는 가뜩이나 험상궂은 얼굴을 잔뜩 구겼다.
“너랑 웅 형님이랑 잘 어울리니 나랑 유하 녀석도 왕따다.”
“글쎄요…… 그건 형님 생각일 것 같은데요. 전 웅이 형님과 유하 형님 이렇게 하고만 친하게 지내니까요.”
“……?”
무태는 반사영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듯하다가 이해를 하고는 반사영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농담이었습니다.”
“그 말이 조금만 늦었다면 집어 던졌을 것이다.”
“하…… 하하! 요즘 들어 재미없는 농을 다하십니다.”
“진담이라는 걸 보여 줄까?”
“…….”
반사영은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나저나 단주 놈이 웅 형님에게 유독 심한 건 거슬린다.”
“것도 신참들이 모인 데서는 유독 심하죠.”
반사영과 무태는 나무 그늘 아래서 부채질을 하고 있는 백리연을 노려봤다.
“사영.”
“예.”
“한번 할까.”
“자신 있으시다면.”
반사영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너 내가 정말로 실력이 딸려서 백룡단에 입단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
“우리네 사람…… 백룡단에서 썩기에는 아까운 인물들이죠.”
이유는 모르지만 백리웅, 단유하, 무태는 어디 가서도 꿇리지 않을 무공을 지녔다. 반사영뿐만 아니라 네 사람 각자 서로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반사영과 무태는 서로 마주 보며 씩 웃었다. 첫 만남 이후 석 달 동안 함께 지내면서 처음으로 뜻이 통하는 날이었다.
백리웅과 단유하는 깊게 잠이 들어 있었다.
―슬슬 준비하죠.
―오냐.
스르륵.
반사영과 무태는 어디서 구했는지 잠행복을 갖춰 입었다.
―정보 확실하죠?
―당연하지. 그 자식 아주 술에 쩔어 산다더라. 매일같이 총타 밖으로 쏘다니면서. 에잉. 쯔쯧.
―후훗. 이번에는 아예 다리 하나는 분질러야겠습니다.
―팔은 내가 맡으마.
―양보하죠.
―좋다. 가자.
두 사람은 창문을 열고 은밀하게 방을 빠져나갔다. 백룡단 신참들이 머무는 건물은 총타 내에서도 내각이 아닌 외각에 위치했다. 거의 신경도 쓰지 않을 구석진 곳이었다.
주변을 지키고 있는 무인들의 수준도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다. 반사영과 무태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몰래 나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경공을 발휘해 빠른 속도로 목적지로 향했다.
그곳은 낙양에서도 밤이면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거리였다. 기녀들이 웃음과 몸을 파는 홍등가였다.
―저기 저곳에 매일 들른다더라.
‘월궁루?’
주변 건물들 중 크기 면에서 단연 최고였다.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너 혼자?
―녀석을 줘 패는 건 월궁루 밖으로 나와서도 가능하니까요. 일단 녀석이 있는지, 없는지 봐야겠죠.
―인마, 그래도 어찌 널 혼자 보내냐.
―이래 봬도 은신술만큼은 자신 있습니다.
반사영은 몸을 날려 월궁루 안으로 잠입했다. 이참에 시험해 보지 못했던 은형무의 진가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반사영은 은형무를 최대한 발휘했다.
사내들과 기녀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웃음소리가 월궁루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반사영은 그 안을 헤집고 다녔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이는 없었다.
묘한 쾌감이 온몸을 적셔 왔다.
월궁루 안에서 낯익은 기척을 잡아내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는 백룡단 부단주들이 옆구리에 기녀를 끼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한데 막상 반사영이 찾고자 하는 백리연은 그 자리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