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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존 1권(17화)
5장. 새로이 만난 사람들(3)


‘어디 있는 거냐. 이 자식은.’
무태가 가져온 정보가 확실하다면 월궁루 안 어딘가에 백리연이 있어야 했다.
반사영은 백리연의 기운을 감지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쥐새끼같이 숨어 있었구먼.’
반사영은 백리연을 찾아냈지만 의아함을 느꼈다. 백리연의 기운이 감지된 곳은 월궁루 지하였다. 지하가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는 몰랐지만, 일행들과 떨어지면서까지 지하에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본래 목적은 백리연이 월궁루 안에 있는지만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사영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지하 근처로 다가갔다. 그곳은 죄인들을 가둬 놓기 위해 만들어진 감옥이었다.
월궁루 내부에 이런 장소가 있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곳에서 백리연의 기운이 느껴진다.
백리연의 숨결이 굉장히 약했다. 둘 중 하나라는 소리다. 죽어 가고 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반사영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백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감옥 안에 백리연이라고 추정되는 인물이 있었다. 양 손목과 양 발목에 커다란 족쇄가 채워진 채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반사영은 정말 눈앞에 있는 자가 오늘까지만 해도 오만 방자하게 굴었던 백리연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풀어헤쳐진 머리 때문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에는 핏물과 피멍으로 가득했다. 사람이 아닌 고깃덩어리처럼 보였다.
그 처참한 모습에 반사영은 충격에 빠졌다.
“누구냐!”
쌔애액!
스산한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날카로운 검날이 반사영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백리연에게 정신이 팔려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반사영은 아픔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지독한 살기를 동반한 검공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백리연?’
자신을 공격한 인물은 분명 백리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자신이 알고 있던 백리연이 아니다.
반사영은 도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자신에게 공격을 가한 자는 겉모습만 백리연이라는 것이다.
사내의 검에서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의 검이 휘둘러졌고, 검기가 뿌려졌다.
콰콰쾅!
사내는 이 낮고 비좁은 공간이 무너져 내려도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한 거침없는 공격법이다.
반사영은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움직였다. 살기만으로도 상대를 짓누르는 자는 아버지를 죽인 놈 이후 처음이다.
그때보다는 나아졌지만 역시나 지금까지 봐 왔던 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아! 하아!”
일각 정도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 도저히 공격을 할 틈을 주지 않는 자다. 이대로 가다가는 제대로 검 한 번 휘둘러 보지 못하고 죽을 판이다.
그렇다고 계속 피하기만 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어떻게든 공격을 해야만 했다.
반사영은 검에 내공을 서서히 주입했다.
사내의 쏟아지는 검기를 피하며 벽을 박차고 뛰어올라 검을 대각선으로 내리그었다.
무영살검류.
폭뢰비!
반사영의 검 끝에서 검붉은 검기가 비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
사내는 위에서 내리꽂는 수십 개의 검기를 쳐 냈지만, 워낙 많아 전부 막지는 못했다.
반사영은 본인이 폭뢰비를 사용하고 그 위력에 놀란 적이 있었다. 아니, 무영살검류는 한 초, 한 초가 가히 살인적인 기술들이었다.
역시나 폭뢰비는 그중 가장 광포한 초식임에는 틀림없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사내는 엄청난 부상을 입었다.
팔 한쪽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주변은 수십 개의 화약이 터진 것처럼 바닥이 패이고, 벽이 움푹 패었다.
반사영은 정체 모를 사내와 대치하고 섰다. 반사영도, 사내도 자신의 목소리로 말을 걸지 않았다.
단지 노려볼 뿐이었다.
반사영은 이곳에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있는 입장이 아니기에 일단은 도망치기로 결정하고 입구로 몸을 날렸다.
반사영이 사라지자, 사내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무영살검류…… 폭뢰비!’
그는 걸레짝마냥 거덜 난 오른팔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왜 이리 늦은 거야, 인마!
월궁루를 빠져나오자마자 무태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야 돼요.
무태는 다소 지쳐 있는 반사영의 전음을 듣고는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감지하고 입을 다물었다.



6장. 거래(1)


―뭐야! 저 자식 멀쩡한데?
아침이 밝아 오자 백리연을 볼 수 없을 거라던 반사영의 말과는 달리 백리연은 멀쩡했다.
‘분명 팔 한쪽이 거덜 났을 텐데.’
반사영은 어제 자신과 검을 섞었던 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진짜 백리연을 감금시키고 본인이 백리연을 흉내 내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의도나 목적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하루 만에 상처가 아물 정도로 기가 막힌 묘약이 있어요?
―그야 널리고 널렸을 거다. 중원 땅이 하도 넓으니 그런 약쯤은 얼마든지 구했을 수도 있겠지. 가격이 비싸서 문제겠지만.
―일단 어제 일은 우리만 알고 있도록 하죠.
분명 진짜 백리연을 납치, 감금하고, 그 자리를 대신할 정도면 보통 치밀한 놈이 아닐 것이다. 백리연의 작은 습관은 물론 행동, 말투를 본인의 것으로 만들었으리라 봐도 무관하다.
사람에게는 선천지기라는 게 있다. 태어날 적부터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당사자만의 특유한 기운.
그걸 분별하고 감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반사영에게는 가능한 일이다. 월궁루에서 백리연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백리연은 그 선천지기가 달라져 있었다. 어제 자신과 검을 섞었던 녀석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건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무태에게는 어제의 일을 알려 줬기에 저 백리연이 가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백리세가의 가주가 온다 하더라도 반사영처럼 알아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걸 어찌한다.’
반사영은 책을 통해서만 무림이라는 세상을 배워 왔다.
그리고 그 책을 통해 천검맹과 오랜 시간 검을 겨누고 있는 집단 두 곳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사파의 거두 마도련(魔道聯)이고, 다른 하나는 천마교(天魔敎)다.
천마교는 백 년 전에 세상에서 지워졌다고 알려져 있었기에 천검맹 내부에 세작을 심어 놓을 곳은 마도련밖에 없었다.
지금은 과거에 이루어 놓은 걸 천검맹에게 다 빼앗겨 조용히 살고 있지만 언제라도 이빨을 드러내 보일 세력이었다.
하지만 반사영은 마도련이나 천마교가 아닌 내부에서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검맹 내에서 벌어지는 권력과 이권 싸움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 복잡해진다.
진짜 백리연이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쉽게 말할 수가 없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아침부터 얼굴이 왜 그러냐.”
백리웅이 반사영의 옆구리를 콕 찌르며 물었다.
“제 얼굴이 어떤데요.”
“세상 불만은 혼자 다 갖고 있잖아.”
“이게 누구 때문인지 아십니까?”
“누구 때문인데?”
“바로 다 형님 때문입니다!”
“뭐라고?”
백리웅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사라져 가는 반사영을 쳐다만 봤다.

백룡단 단원이 되고 나서부터 반사영은 천검맹 내부 사람들에게 반적풍이라는 이름을 아는지 캐묻고 다녔다. 백룡단 부단주들은 물론 주변에서 일하는 시비들에게도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들어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머무는 외각이 아닌 내각으로 들어가서 물어봐도 아는 이가 전무했다. 아버지의 무공은 강했다. 적어도 삼류 무인이 익힐 수 없는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건 반사영이 무연심공을 바탕으로 한 무영살검류를 익히고 나서부터 든 확신이었다. 이 정도 강자가 무명이라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둘 중 하나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나는 가명을 썼다는 것과 하나는 천검맹 내에서도 아버지의 존재를 모르는 조직에 몸을 담았다는 것이다.
반사영은 후자에 생각을 집중했다.
아버지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때부터 확신이 들었다. 철저히 비밀리에 움직이는 조직. 그런 곳은 천검맹 내에서 한 곳이 있다고 들었다.
천령군(天靈軍)!
그곳의 군장의 별호가 무영존이라는 것과 천검맹 맹주의 호위를 하기도 하며, 비밀 임무를 수행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 외에는 밝혀진 바 없는 조직이다.
그렇다고 백룡단 신참이라는 신분으로 천령군에 대해서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의 신분, 그리고 아버지가 왜 그렇게 죽었는지에 대해서 알아야만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에도 뭔가가 있음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던 듯했다.
그 모든 걸 알아내야지만이 복수가 가능하다. 대상도 없이 혼자서 복수 운운해 봐야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천검맹으로 들어온 것이고 말이다.
자신에게 서찰을 보낸 자는 분명 그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머리가 복잡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

백리연은 사흘 단위로 신참 단원들과 비무를 벌였다. 물론 본인이 반사영에게 당한 것을 갚아 주려는 속셈이 컸다.
엄연히 백룡단 단주가 된 백리연이다. 아무리 융통성 없는 반사영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리연을 떡 실신시킬 수가 없었다. 그냥저냥 참아 가며 백리연의 공격을 피하거나 맞받아치는 걸로 끝내야만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지금 자신과 목검을 겨누고 있는 이가 진짜 백리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기하단 말이야…… 분명 내 공격으로 팔이 너덜너덜해졌을 텐데.
반사영은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이자에게 자신이 그때 그 복면인이라는 걸 알리는 것은 그 시작에 불과했다.
―단주인 내게 반말을 하는 것이냐!
―호오? 제법 흉내를 내겠다는 건가? 그런데 말이야…… 진짜 백리연은 단원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전음으로 맞받아치지 않지.
―…….
―그냥…… 대놓고 쌍욕을 내뱉지.
반사영은 씩 웃으며 신형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코밑까지 다다른 그의 목검이 백리연의 어깨를 가격했다.
―정말 다시는 팔을 못 써도 좋다면 그냥 그렇게 넋 놓고 있어도 좋고.
백리연은 이를 악물었다.
사실 그도 그날 복면인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한데 백룡단 신참 단원으로 다시 대면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잡아떼는 방법밖에 없었다. 표정에서도, 행동에서도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상대는 확신을 할 것이다.
지금은 그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버티시겠다?
백리연의 행동과 습관은 알아도 그의 무공에 대해서 완전한 이해가 없을 거라고 반사영은 확신했다.
“저, 저 자식이 왜 저래?”
“단주님을 또 피떡으로 만들 모양인데?”
반사영과 백리연의 비무를 지켜보던 신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목검을 휘두르는 반사영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다.
악마처럼 훈련시키는 백리연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꼴을 보는 건 좋았다. 하지만 그 후에 다가올 후폭풍은 모두가 공동으로 부담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백리웅은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서 두 사람의 비무를 지켜봤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반사영이 저토록 흥분해서 비무를 하는 것과 당하고만 있는 백리연의 모습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이 많은 인물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있음에도 백리연의 표정은 침착했다. 백리웅이 알고 있는 백리연은 저렇게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판단한 부단주들이 비무를 멈추게 했다.
백리웅도 그 장면에서 확신이 들었다. 자신이 느낀 그 무엇인가가 확실한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말이다. 백리연은 역시나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게거품을 물고 자신들을 말리는 부단주들에게 입을 다물고 그냥 물러선다? 백리연을 오랜 시간 지켜본 백리웅으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다.
그렇게 그날의 훈련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