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무영존 1권(18화)
6장. 거래(2)


‘떡밥을 던졌으니 이제 물기만을 기다리면 되겠군.’
반사영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뭐야. 나보고 웃는 거냐?”
정면에 앉아 있는 단유하가 자신을 비웃는 줄로 착각해서 말했다.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반사영의 입술은 웃고 있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이 자식, 왜 나보고 비웃는 건데?”
“아, 글쎄, 아니라니까요.”
“어쭈? 계속 웃네.”
“크큭. 웃음이 나오는 걸 어쩝니까.”
단유하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우스워?”
“아…… 하하! 크크크큭.”
반사영은 아예 대놓고 배를 잡으며 웃었다.
“어디 아파?”
단유하는 갑자기 반사영이 이상행동을 보이자 불안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가 났는데, 어딘가 모르게 녀석의 상태가 좀 안 좋아 보이자 걱정이 됐다.
반사영은 단유하 때문에 웃음이 터진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세워 놓은 계획이 너무 기가 막힐 정도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그 작전에 당할 가짜 백리연의 표정을 생각하니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반사영은 또다시 잠행복을 입었다. 불과 사 개월 전만 해도 자신이 이런 어두침침한 옷을 입으며 즐거워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이 상황과 감정을 즐기고 있었다.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봐야 할 일이다.
복면을 쓰고 얼굴을 가림과 동시에 창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번에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 안으로 깊숙하게 침투해야만 했다. 외각에서 밖으로 왔다 갔다 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반사영은 내공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려 은형무를 펼쳤다. 어둠 속에 그의 몸은 완벽하게 스며들었다. 작은 소리, 작은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외각에서 내각의 담벼락을 은밀하게 넘었다. 그 어떤 누구도 반사영처럼 사전 계획 없이 천검맹 총타 담벼락을 넘는 이는 없었다.
이 정도의 잠행을 펼칠 만한 이들은 천하에서도 손가락 안에 드는 살수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지금 반사영이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하지만 반사영은 긴장보다는 즐기고 있었다. 애초에 이 잠행의 목적이 누군가를 해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인지 몰랐다.
하지만 초반에 걸리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반사영은 내각에 존재하는 건물들에 대한 지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귀중한 물건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대충 귀동냥으로 들어왔던 걸 토대로 움직여야 했다. 내각의 경비는 외각과는 차원이 달랐다.
외각은 백룡단이 맡고 있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물들은 많지 않았고, 그만큼 경비가 허술했다.
내각의 경비를 총책임하고 있는 곳은 청의검대(靑衣劍隊)였다. 이들은 모두가 일류 이상의 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른 무력 조직은 일정 수준에 무공으로 뽑지만 청의검대는 다르다.
신중하고, 차분하며, 작은 기척을 감지해 낼 줄 아는 이들을 선별하여 뽑는다. 특히나 밤이면 이들의 존재는 부각된다. 청룡이 그려진 무복을 입은 청의검대를 농락하며 반사영은 반 시진째 내각을 헤매고 다녔다.
‘정말 더럽게 넓구나. 쓸데없이 땅만 넓어서 사람을 짜증나게 하고 있어.’
내각에 위치한 건물들의 구조나 그곳에서 뭘 하는지를 파악하기가 힘이 들었다. 가장 깊숙한 곳에 있고, 크기도 가장 클 것이라고 추정되는 건물 몇 개를 돌아보던 반사영은 어느 한 곳을 응시했다.
그 건물도 청의검대 무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봤던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기를 갈무리하고 있는 걸 반사영은 느꼈다.
직감적으로 자신이 찾고 있는 인물이 저 건물에 머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사영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일각이라는 짧은 시간이 지난 뒤, 반사영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누군가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후후훗. 재미있군요.”
반사영의 앞에서 미소를 띠고 있는 자는 곽대우와 함께 몇 달 전 객잔에서 반사영을 지켜보던 사내였다.
“겁도 없이 천검맹 맹주의 집무실을 침범해 놓고…… 일부러 걸렸다?”
그는 현 천검맹 맹주 천검제(天劍帝) 위지강(慰遲强)의 유일한 혈육인 위지청(慰遲淸)이었다.
삼 년간 폐관 수련에 접어든 위지강을 대신해 임시 맹주직을 맡고 있기도 했다. 막 잠이 드려는 찰나, 그는 어처구니없는 침입자 한 명을 만나게 됐다.
노골적을 자신의 살기를 드러내는 살수는 이 세상에 없다. 한데 천장 위에서 피부를 찌를 듯한 살기로 인해 내부에 있던 천령군 무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지붕 밑에까지 침투해 들었다면 천령군 무인들의 기척에도 걸리지 않았을 정도의 고수라는 말이다.
그런데 당당하게 일부러 걸렸다는 반사영을 보며 위지청은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반사영은 자신이 이번 백룡단에 입단한 것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반사영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위지청은 반사영에 관한 정보들을 수시로 듣고 있었다. 위지청은 곽대우가 한 말을 떠올렸다.
전성기 시절의 반적풍을 넘어설 것이라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반사영의 재능이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반적풍이 익힌 무공이 훌륭한 건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천령군이 지키고 있는 이곳을 몰래 들어올 정도면 가히 절정 무인 수준이라고 봐도 무관했다.
위지청은 반사영이 뭐하러 이런 위험한 짓을 저질렀는지가 궁금했다.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거래? 하하하!”
감히 백룡단 신참이 임시 맹주인 자신과 거래라니.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지금 내 명령 한마디면 그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죽이실 작정이었으면 이렇게 독대를 하고 있지도 않았겠죠.”
“함부로…… 피를 묻힐 수 없는 곳이니까요, 이곳은.”
위지청의 말속에는 일종의 우월감이 서려 있었다.
“말씀해 보세요. 그 거래라는 거.”
반사영은 그간의 일들을 설명했다. 물론 그 세작이라는 인물이 백리연으로 위장하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 녀석 조만간 저를 암살하러 나타날 것입니다. 미리 천령군 무인을 제게 붙여 두었다가 녀석을 잡으시면 되는 일이죠.”
“간단하군요. 그러면 그쪽이 내건 조건은?”
반사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의 예상이 맞기를 바랐다.
“아버지 죽음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아버지?”
“예. 성함은 반적풍…… 천령군 소속이었죠.”
“천령군이라…….”
위지청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건드리며 말끝을 흐렸다. 뭔가를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그거라면 좀 힘들겠는데요.”
반사영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 누구도 위지청 앞에서 할 수 없는 표정을 반사영은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었다.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반사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위지청은 한껏 여유를 부렸다.
“천검맹 내로 스며든 세작을 잡아내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죠. 하지만…… 그깟 세작 따위 본 맹 내에서 얼마든지 잡아낼 수도 있는 일이기도 하죠. 백 년 동안 쥐새끼처럼 숨어든 그런 놈들을 잡아내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했고, 그로 인해 본 맹이 위태로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위지청의 말은 모두 맞는 내용이었다. 반사영은 위지청의 말에서 자신이 가지고 온 거래 내용이 그다지 큰 매력이 없는 것임을 느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대의 아버지라는 분이 천령군 소속이라는 확신이 없다는 것이군요.”
“……?”
“천령군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진 비밀 집단입니다. 출생은 물론 성별, 나이, 지닌바 무공에 대해서는 맹주님도 모르십니다. 그 말은 본인들의 가족들조차도 천령군 소속이라는 걸 비밀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지요. 천령군 소속 무인에 대해서 아는 이는 딱 한 명뿐이죠. 바로 천령군 군장.”
“그분을 만나게 해 주시면 되겠네요.”
위지청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짜증 비슷한 감정이 표출되었다. 웃음은 싹 가셨다. 지금 이 사내는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스멀스멀 위지청의 몸에서 짙은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위지청은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 더 이상의 거래를 한다는 것이 얼마만큼 위험한 건지를 말이다.
반사영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자 역시나 보통이 아니라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호랑이에게서 고양이가 태어나는 법은 없었다. 위지청은 천하를 호령하는 천검제의 유일무이한 혈육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 기운도 내뿜지 못한다면 임시로라도 맹주직을 유지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사영도 만만치 않은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위지청은 자신에게 대항하는 반사영에게 비릿한 미소를 보였다.
“이곳을 지키고 있는 천령군은 겨우 애송이에 불과하죠. 진짜배기들은 폐관에 접어드신 맹주님 곁에서 호위를 맡고 있습니다. 애송이들의 이목 정도 속였다고 해서 자신을 과신하면 죽음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이죠.”
더 이상의 반항은 용서할 수 없다는 압박에 반사영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거래를 통해서 아버지에 대한 걸 알고 싶었을 뿐이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숙소로 돌아와야만 했다.
반사영을 보낸 위지청은 곽대우를 불러들였다.
“보통내기가 아니더군요.”
반사영이 찾아온 목적을 전해 들은 곽대우는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연으로 위장하고 있는 녀석은 어찌할까요.”
이미 위지청과 곽대우는 천검맹 내부로 스며드는 세작들을 감시해 오고 있었다.
“일단은 그냥 두기로 하죠.”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계획을 좀 앞당겼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서두르시는 건 아닌지…….”
“지금 당장 훈련을 시켜도 괜찮을 정도인 듯하니까요.”
“하면 장소는.”
“혈해도(血海島).”
“그러면 지금까지 추린 인원으로 계획을 진행토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반사영에게는 제가 직접 다시 거래를 하도록 하죠.”
“백리연으로 위장하고 있는 세작이 만약 그들과 관련이 있다면, 반사영 근처에 두는 일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흠…….”
위지청은 다시 한 번 손가락으로 탁자 위를 톡톡 치기 시작했다.
“만약 반사영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백리연으로 위장했다면 반사영이 여기까지 잠입해서 반적풍을 찾을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렇군요.”

모든 게 자신의 계획대로 돌아갈 것이라 확신하던 반사영으로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맹주의 아들인 위지청이라는 사내, 생각보다 훨씬 고단수다.
무태에게 위지청은 어떤 사내냐고 물었더니, 천검맹 내에서도 꽤나 베일 속에 가려진 부분이 많은 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임시 맹주직을 맡고 있음에도 그는 중요한 공식 석상이 아니면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맹주님의 외아들이면 어렸을 적부터 총타에서 자라지 않았을까요?”
“아닐걸…… 본가에서 자랐다는 말도 있고, 본가에서조차도 성장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어.”
“본가에서 자라지 않았다는 소문은 헛소문이겠군요.”
“꼭 본가에서 자랐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지.”
“예?”
무태는 방 안에 둘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죽였다.
“소맹주의 나이가 올해 몇인지 아냐.”
“어려 보이던데요.”
“이제 겨우 스물넷이다.”
“그래서요?”
“들리는 얘기로는 이미 소맹주가 맹주님의 무위를 뛰어넘었다는 말이 있어.”
“그것도 헛소문이겠네요.”
“글쎄, 아니라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천검제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해도 벌써 그 나이에 그 정도 초고수라는 게.”
“그게 말이다…….”
무태는 목소리를 더욱 죽였다.
“혈해도라는 섬이 있어. 거기가 어디냐 하면…….”
“거긴 저도 알아요. 백 년 전에 지금의 천검맹 주축이 된 사대세가와 오대문파 수장들이 마지막으로 천마교 무리와 혈전을 벌였던 곳.”
“그래, 거기. 지금의 소맹주가 막 걸음마를 배울 무렵부터 그 혈해도에서 자랐다면 말이 달라지지.”
“거기서 뭘 했는데요.”
“어이구, 이 답답한 놈아! 사람 그림자도 없는 그곳에서 생과 사를 넘나드는 수련을 한 것이지. 그 어린 나이부터.”
반사영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뭣 하러 그 오지에서 가서 수련을 한단 말인가.
반사영의 의문은 자연스러웠다. 그가 무공이라는 수련을 한 건 불과 한 달뿐이다. 그것도 혼자서 서적을 가지고 한 것이 전부다. 그런데도 지금 수준은 일류를 넘어섰다. 천령군의 이목까지 속이고, 집무실까지 침입했다. 물론 아버지의 무공이 대단해서인 것과 내공을 전수받은 이유가 가장 크다.
자신도 그 정도로 일류가 되었는데, 명색이 천검제의 자식인 위지청이 그런 고생을 하면서까지 성장할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사영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처절하게 생과 사를 넘나드는 수련과 그렇지 않은 수련의 차이가 얼마만큼 큰지를 말이다.
“또 하나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