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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존 1권(19화)
6장. 거래(3)
“이번에는 또 뭔 헛소문인데요.”
“이건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데…… 맹주님이 폐관에 드신 이유가 소맹주님과 비무를 벌이다가 주화입마에 걸리셨다는 거야.”
반사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덩치만 남자답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문에나 흔들리는 귀가 얇은 남자라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아이씨! 넌 예의가 태어날 때부터 없는 놈이냐? 인기척 좀 하고 다녀라.”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단유하였다. 그는 자신이 뭘 그리 잘못했는지 알 길이 없다는 눈길로 무태를 쳐다봤다.
“요즘 수상하단 말이지.”
“뭐, 뭐가.”
“나랑 웅이 형님 빼고 둘이 바짝 붙어서 뭘 그리 만날 속닥거리는 건데.”
“너처럼 담 작은 놈은 몰라도 되는 이야기다.”
“설마 둘이 그렇고 그래?”
단유하는 실실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반사영과 무태의 눈에서 불똥이 동시에 튀어 올랐다.
“이런 똥물에 튀겨 죽일 놈 같으니!”
“이 멸치 같은 인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반사영은 흥분하면 형들에게도 반말을 내뱉곤 했다. 두 사람을 자극한 대가로 단유하는 손발이 묶인 채 한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근데 웅이 형님은 어디 가셨냐?”
“백리연을 만나고 좀 오신다던데.”
반사영과 무태는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런 젠장!”
***
백리웅은 백룡단주의 집무실을 찾았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는 백룡단 단원들 사이에는 이미 소문이 나 있었다. 그들이 이 장면을 봤다면 아주 걱정스러운 표정들을 지었을 것이다.
“어쩐 일이냐?”
“앉아도 될까.”
“앉아.”
백리연은 여전히 거만하고 오만한 표정으로 백리웅을 대했다.
“무슨 일이냐, 네가. 내 집무실을 다 찾아오고.”
“지난번 반사영의 일을 사과하고자 왔다.”
“그 시건방진 녀석을 끌고 왔어야지. 사과를 하려면.”
백리연은 특유의 비릿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백리웅은 그런 그의 모습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백리연의 모습은 자신이 알던 그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영은 내가 아끼는 동생이니…… 너그럽게 봐줘라.”
“하! 내가 백룡단주라는 자리에 있지만 않았으면 그놈은 벌써 구천을 헤매고 있을 거다.”
“그래, 아직 녀석이 세상 물정 모르고 어려서 자존심을 굽히지 않을 때가 종종 있으니까.”
“백룡단으로 입단한 것도 모자라 그런 족보도 없는 녀석과 어울리다니. 너희 아버지가 아시면 아주 좋아하시겠다.”
“…….”
“됐으니까 그만 가 봐.”
백리연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일어나 몸을 돌렸다.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다.”
“……!”
백리연의 등을 쳐다보는 백리웅의 시선이 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너…… 누구냐.”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다시 묻는다. 너 누구냐.”
백리웅의 기운이 날카롭게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살초를 뿌릴 기세다. 그의 아버지는 오 년 전 세상을 떠났다. 그걸 백리연이 모를 리가 없다.
어린 시절에 얼굴을 볼 때마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늘 앞장서서 손가락질하던 백리연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백리연이 가짜임을 백리웅은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신이 들었다면 거칠 것이 없어진다. 백리웅은 내공을 주먹으로 끌어모았다. 튕겨지듯 앞으로 쏘아져 나간 백리웅의 주먹이 백리연의 명치를 가격했다.
뻑!
정확히 급소를 가격당한 백리연이 바닥에 주저앉아 핏물을 토해 냈다.
“크으윽!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냐!”
“다시 한 번 묻는다. 백리연은 어디 있냐.”
평소 백리웅의 모습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의 눈빛이 엎드려서 피를 토해 내는 백리연을 죽일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본가에서도 자라지 못한 백리웅이었지만, 그의 무공 역시 천하를 내려다보는 백리세가의 것이다.
특히나 그의 장기는 권장지각에 있었다. 병기가 없다고 해서 제힘을 발휘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특히나 백리세가에서도 제일 손꼽히는 권법 중 하나인 추풍신권(秋風神拳)은 백리웅이 주특기로 쓰는 것이다.
백리웅은 말로 해서는 안 될 가짜 백리연을 내려다보며 다시금 내공을 끌어모았다.
이번에는 절대로 힘을 아끼지 않을 작정이었다.
여기서 더 이상 자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결과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백리연도 그걸 느꼈는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콰앙!
백리웅의 주먹에 응축되어 있던 기운이 한순간 폭발했다. 백리연이 몸을 조금이라도 늦게 움직였다면 산산조각 난 건 벽이 아니라 그의 육체였을 것이다.
백리연은 집무실에 두었던 검을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혈투는 채 시작도 못하고 끝이 나야만 했다. 단주의 집무실에서 엄청난 소음이 들리자 주변을 지키고 있던 단원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백리웅!”
무리에는 단주에서 부단주로 밀려난 공문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백리연과 백리웅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이미 백룡단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백리연이 시비를 걸고 망신을 줬다고 해서 백리웅이 반박하거나 대들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보통이 아니다.
“얼른 저 녀석을 제압해라!”
공문기의 명령에 백리웅은 순식간에 몸이 묶어야만 했다.
“저 녀석 진짜 백리연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붙잡아야 할 놈은 내가 아니라 저놈이라니까!”
“괜찮으십니까.”
백리연은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서 끌려가는 백리웅을 바라봤다.
“명백한 하극상이다. 저놈을 뇌옥에 가둬라.”
“명을 받듭니다.”
***
그날 백리웅은 숙소로 돌아오지 못했다. 하극상을 저지른 대가로 그는 죄인을 가두는 뇌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 일을 어쩌냐.”
무태와 단유하는 심각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 순딩이 같은 양반이 하극상이라니. 듣기로는 단주 집무실을 아주 박살을 낸 모양이던데.”
반사영과 무태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필히 백리웅은 대화를 나누면서 백리연이 가짜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라고 직감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달리 뚜렷한 해결 방안이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마음이 답답해질 뿐이다.
반사영은 이러고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가만히 앉아서 이렇게 가슴앓이하는 건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날 밤 반사영은 또다시 잠행복으로 갈아입고 외각에서 내각으로 넘어갔다.
위지청의 입가가 살며시 말려 올라갔다. 비웃음은 아니다. 그저 다시금 자신에게 나타난 반사영을 향한 무한한 호기심 때문이다.
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있으면 소맹주인 자신의 집무실을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나타나는 것일까.
게다가 오늘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잠입에 성공했다. 정말이지 은신술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천하의 어떤 살수조차도 해내지 못한 일을 반사영이 해낸 것이다.
‘후훗.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것인가.’
“그 복면은 좀 벗으시죠. 얼굴을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아, 네.”
마주 보고 앉은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반사영은 복면을 벗는다는 걸 잊고 있었다. 두 번째 만남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다시 뵙자고 할 작정이었습니다.”
“저를요?”
“네.”
“…….”
“이번에는 천령군의 이목을 완벽하게 속이고 들어오셨군요.”
“급하게 부탁을 드리고자 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또 저와 거래를 하실 일이 생긴 모양이군요.”
“뭐, 비슷합니다.”
“궁금하지만 제 용건을 먼저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이곳은 아시다시피 보이는 곳에서는 청의검대가 지키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천령군 이군이 자리를 지키고 있죠. 그런 그들의 이목을 완전하게 감추고 침입할 수 있는 존재가 몇이나 될까요.”
“글쎄요…….”
“제가 아는 한,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살수들이나 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일군이 지키고 있었다면 세 명으로 좁혀지겠지만 말입니다. 그대는 그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이고 말이죠.”
반사영은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 위지청의 말빨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서요?”
일부러 삐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자신이 부탁을 하러 온 입장이라는 것도 잊은 채 말이다.
“그대의 재능을 사고 싶어서 말입니다.”
“나의 재능을?”
“탁월한 은신술…… 지금 그대의 경지는 절정 무인들은 꿈조차 꾸지 못할 위치에 있습니다. 그대가 익힌 은신술이 무엇인지 내놓으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그대를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쪽 제의를 받아들이면 천령군에 속하는 겁니까?”
만약 천령군의 들어간다면 아버지에 대한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위지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령군은 아닙니다.”
“그럼 대체 나의 재능을 사서 뭘 하시려는 건데요.”
“새로운 조직을 창설할 계획입니다.”
“새로운…… 조직?”
“사람들은 천마교의 무리가 완전히 세상에서 지워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천검맹을 위협할 만한 집단으로는 마도련밖에는 없는 실정이죠. 그 마도련도 이십 년 전에 본 맹의 맹공으로 인해 기반을 잃은 지 오랩니다. 이게 현 중원 무림의 현실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그게 아니라는 건가요?”
“백 년 동안 천검맹은 두 세력을 적으로 뒀습니다. 그들은 지금 잠시 날개를 꺾고 잠들어 있는 상황이죠. 그들의 후예와 후손들은 여전히 천하 어디에선가 호시탐탐 복수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을 겁니다. 그대가 말한 세작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죠.”
반사영은 소름이 돋았다. 위지청의 말뜻을 정확하게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세작이 한두 명이라면 모를까 그 인원이 수십, 수백이라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게다가 그들은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을 터, 쉽사리 꼬리가 잡힐 리도 없다. 백리연으로 위장 한 녀석이 자신에게 걸리지 않았다면 백룡단주로서 천검맹 내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자신의 조직으로 보고할 것이다.
백룡단주는 거의 말단 직분이다. 만약 칠대무력조직이나 그 이상의 고위급 인물이 적의 세작이라면, 그건 지극히 상상도 하기 싫은 상황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현재 본 맹에서 저와 맹주님을 제외한 누구도 믿지 못할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 정도인가요?”
―맹주님은 가장 최측근으로 위장해 있던 적의 세작에게 공격을 당해 내상을 입으시고 심처에 드신 겁니다.
반사영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벌리고 닫을 줄 몰랐다. 생각보다 천검맹 내부에서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쪽이 말하는 새로운 조직이 뭡니까?”
“오로지 나! 위지청에게만 충성과 복종하는 충성스러운 수하! 그림자처럼 적이 심어 놓은 세작의 목을 베는 위지청의 날카로운 칼날이 필요합니다.”
반사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위지청에게서 범접치 못할 절대자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그런 힘이 서려 있었다.
그런 일에 자신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설레는 감정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속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고 있음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무인으로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한 남자로서 속 안에 존재하던 야망이 끓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바로 답을 달라는 건 아닙니다.”
“…….”
“좀 더 시간을 드리죠. 자, 이제 그대가 저에게 온 이유를 들어 볼까요.”
반사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백리웅은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죄가 없으니 뇌옥에서 빼내어 달라는 것과 백리연을 처리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대가 내민 조건을 수용한다면 내 제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건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