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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존 1권(20화)
7장. 뒤를 쫓다(1)


백리웅은 뇌옥에 갇힌 지 사흘이 되던 날 세상 빛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바로 다음 날 풀려날 수도 있었지만, 반사영이 위지청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데 고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리연에 대한 처벌은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백리연이 세작이라는 사실이 내부에 퍼지면 적지 않은 혼란이 일어날 것이기에 당분간 그냥 두는 것이 좋다고 위지청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반사영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반사영은 무태를 비롯해 백리웅과 단유하에게 자신이 직접 소맹주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고 말했다. 물론 소맹주 위지청과의 거래에 대한 이야기나 몰래 잠입했다는 사실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한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백리웅이 언제라도 다시 백리연으로 위장하고 있는 녀석에게 덤벼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일이 골치 아파진다. 백리연으로 위장한 녀석은 어떻게든 위지청이 처리해 주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진짜 백리연은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그것까지는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위장하고 있는 녀석만이 알고 있는 일이다. 고문을 한다고 해서 그 녀석이 입을 열 확률도 적었다.
그의 출신이 어딘지는 몰라도 특수한 훈련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되기에 스스로 입을 연다는 것에는 크게 희망을 품지 않았다.
백리웅은 모든 사실을 듣고도 얼굴이 풀리지 않았다. 백리연을 미워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같은 백리 성을 이어받은 혈육이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끈끈한 무엇인가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몰래 미행이라도 하는 건 어떨까. 그 녀석은 자신의 정체가 웅이 형님에게 들켰다고는 해도 다른 이들이 믿어 주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단유하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그렇다고 해도, 저와 웅이 형님이 녀석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어쩐다냐.”
무태가 백리웅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지금 백리웅의 상태는 어느 때보다 더 심각했다. 늘 웃으며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그였기에 곁에 있는 세 사람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일단은…… 무태 형님.”
“왜.”
“백리연의 일정을 좀 확인해야 해요.”
“일정?”
“예. 특히 외부로 나가는 날이 언제인지 알아봐 주세요.”
“어렵지는 않은 일인데…… 그건 왜?”
“녀석이 진짜 백리연을 감금시키고 자신이 위장하였던 날은 백룡단 수뇌부들과 외출을 하던 때였으니까요. 아무래도 녀석이 뭔가 자유롭게 움직이려면 천검맹 내부보다는 외부에서 활동할 때가 편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럴듯한 반사영의 말에 무태와 단유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뒤를 누가 뒤따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녀석이 쉽게 움직일까.”
백리웅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이 세작인 걸 알고 있으니 언제 어떻게 도주를 감행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그러니 더욱 뒤를 밟아야겠죠. 녀석이 도망이라도 치는 날에 진짜 백리연은 영영 못 돌아오게 되니까요.”
반사영은 단유하를 쳐다봤다.
“유하 형님이 해 줄 일이 있습니다.”
“내가?”
“그나마 여기 있는 넷 중에서 백룡단 수뇌부들과 친분이 두터운 건 형님뿐입니다.”
“그렇긴 하지. 전대 단주이셨던 공문기 대협이 과거에는 본 문과 인연이 있지. 게다가 나와도 몇 번인가 마주친 적이 있어서 백룡단으로 입단하고 나서도 여러 번 대화를 나누곤 했는데…… 왜?”
“공문기로 위장을 하셔야 합니다.”
“뭐라고?”
“만약 그놈이 간부들과 모임을 갖는다면, 그때 공문기로 위장하고 있던 형님이 잘 감시를 해야 한단 소리죠. 볼일을 보러 간다고 나갔다가 일각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면 반드시 저희에게 알려 주셔야 해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그놈은 지금 굉장히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할 때죠. 만약 모임을 갖는 장소를 갑작스럽게 바꾸기라도 한다면 우리로서는 낭패예요.”
“흐음…….”
단유하는 자신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반사영이 단유하에게 이런 일을 시킨 건 그의 평소 습관 때문이었다. 그는 꽤나 관찰력이 좋았다. 상대를 모방하거나 특이한 부분을 흉내 내는 것에도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넷 중에서 가장 적임자였다.
“일단 이 모든 계획은 백리연의 일정을 파악한 뒤에나 가능한 일이에요.”
“…….”
“어째…… 뭔가 이상하다.”
“뭐가요.”
“제일 어린놈이 왜 대장처럼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데?”
“쯔쯧.”
무태를 보며 반사영이 혀를 찼다.
“꼭 무식한 양반들이 나이 따져 가면서 일합디다.”
“뭐, 뭐야?”
“난 사영 말대로 따를게.”
“뭐, 나도 반대는 아니야.”
백리웅과 단유하가 찬성표를 던지자, 무태의 얼굴이 마치 소태를 씹은 사람처럼 구겨졌다.

“사흘 뒤, 월궁루란다.”
“월궁루라…….”
무태가 물어 온 정보에는 사흘 뒤 월궁루에서 백룡단 수뇌부들이 모여 회식을 한다고 했다. 월궁루라면 반사영이 백리연으로 위장한 세작과 처음으로 맞닥트리던 장소였다.
다음 날은 모든 훈련이 없는 날이라 반사영과 무태는 월궁루를 찾았다. 낮에는 음식과 술을 팔고 있었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으며 반사영은 주변을 탐색했다. 아직도 이곳에 백리연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하에 그런 뇌옥이 있다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다.
―월궁루 주인이 누군지 알아요?
―글쎄다…… 월궁루가 생긴 지 불과 이삼 년밖에 되지 않아서.
―천화객과 사이는 좋은가요.
―그럴 리가. 천화객에서는 신경 안 쓰는 척하겠지만 월궁루의 성장이 생각보다 빨라서 아무래도 눈엣가시 같기는 할 거다.
―흐음.
세작으로 있는 녀석의 배후에 누가 존재하는지를 알아내는 것도 반드시 필요했다. 월궁루는 분명 그 관계 선상에서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월궁루의 주인이 누구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방법이 없을까요.
―월궁루의 주인을 알아낼?
―네.
―하나 있긴 하지.
무태는 징그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

지하는 어두컴컴했고, 먼지로 가득했다. 수십 개의 조그만 탁자를 사이에 두고 네 명씩 마작을 하고 있었다.
반사영은 무태를 따라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왔다. 대체 이곳에서 어떻게 월궁루의 실제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있는지 의문스럽기만 했다.
무태는 한참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누군가를 찾은 듯했다. 그는 성큼성큼 한쪽 구석진 곳으로 다가갔다.
탁자에서 마작을 하고 있는 네 명 중 가장 나이가 어려 보이는 인물이 돈을 땄는지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봤지! 내가 오늘날이라고 했잖아! 크흐흐흐!”
딴 돈을 작은 주머니에 쓸어 담는 그의 모습을 보는 다른 이들의 얼굴에는 지독한 분노가 어려 있었다.
“여어! 우리 건이 많이 딴 모양이구나?”
무태가 찾으려던 인물이 바로 그였던 모양이다. 무태는 전혀 따뜻한 미소가 아닌 얼굴을 하고서 젊은 청년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내가 열흘간 여기서 잃은 돈이 얼만데! 이 정도는 따야……!”
흥분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떠들어 대던 그는 자신에게 말을 건 대상이 누군지를 확인하더니 얼굴이 굳어 버렸다.
“우리…… 오랜만이지?”
“아…… 하하하! 무태 형님…….”
“첫인사는 요게 좋겠지?”
무태는 솥뚜껑만 한 주먹을 들어 보였다.
퍼억!

이름은 비건(蜚乾)이라고 했다.
나이는 이제 열아홉. 천애 고아인 그는 다섯 살 때부터 용호방에서 성장했다. 용호방에서는 부모가 없고, 오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먹여 주고, 재워 줬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재능이 있는 녀석들은 무술을 가르쳤고, 계집이나 무술에 재능이 없는 아이들은 일자리를 구해 주곤 했다. 아니면 비건처럼 눈치가 빠른 아이들은 낭인들을 따라다니면서 잔심부름을 하기도 했었다.
비건은 무태의 곁에서 삼 년간 함께 중원을 떠돌아다녔다. 하지만 어느 날 비건이 무태의 돈주머니를 갖고 도주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무태가 비건을 만나자마자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한 이유이기도 했다.
“아이고야…….”
비건은 시퍼렇게 멍든 눈 주위를 계란으로 마사지하고 있었다. 마치 눈 옆으로 커다란 혹 하나를 단 것 같았다.
“잘 지냈냐?”
“형님을 만나기 전까지는요.”
“아직 입은 살아 있네. 주먹 한 방으로 끝난 걸 다행으로 알아라.”
“이 정도로 끝난 건, 저한테 원하는 게 있다는 거겠죠?”
비건은 뜨거운 차를 후후 불었다.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단 말이야.”
“그걸로 먹고사는 데 당연하죠. 한데 제가 낙양에 있는 건 어찌 알았습니까?”
“내가 네놈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그냥 둔 게 아니다.”
“물론 귀찮으셨겠죠. 훔친 돈주머니 무게가 가벼웠으니.”
오히려 잘못을 저지른 비건의 얼굴에는 억울한 감정이 가득했다.
“내가 미쳤다고 전 재산을 너에게 맡겼겠냐.”
비건이 훔쳐 달아난 돈주머니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적은 금액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건은 무태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맞아 죽는다는 게 뭔지 경험해 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 하오문에 있다며.”
“……!”
‘하오문?’
반사영도 하오문이라는 곳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소매치기, 도둑, 매춘을 업으로 삼는 최하류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모여 만든 집단이다. 주로 하는 일은 정보를 파는 것이다.
그 정보의 급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기도 했다. 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정보들이 대부분이다. 비슷한 세력으로는 용호방이 있지만, 엄연히 그 태생부터가 다른 집단이다.
천하를 떠도는 낭인들이 모인 용호방은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잡다한 소식들이 전해지곤 했다. 하지만 하오문은 애초에 정보를 얻어 거래를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정보들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은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정확도면에서는 용호방을 훨씬 뛰어넘는다.
“누가 그럽니까. 제가 하오문에 있다고.”
“어쭈. 잡아떼시겠다?”
하오문 문도들은 자신이 그곳에 속해 있다고 일절 발설하고 다니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당장 이렇게 정보를 알아봐 달라는 청탁을 매일같이 받을 테니까 말이다.
비건은 힐끔 무태의 옆에 앉아 있는 반사영을 쳐다봤다.
“이 계집애 같은 놈은 누굽니까.”
“계집? 크하하하!”
반사영의 눈빛이 사늘해지는 것도 모른 채 무태는 목청이 찢어져라 웃음을 터트렸다.
“꼬맹이, 입조심해라.”
“어이구, 무서워라.”
반사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긴 시간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비건 같은 사람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쩌적.
반사영이 만지작거리던 찻잔이 순식간에 금이 가 버렸다. 비건의 눈이 살짝 당황하는 듯하다가 이내 이채로운 빛을 띠었다.
내공으로 물건을 산산조각 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류라고 불리는 이들도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반사영의 찻잔은 부서지지 않았다. 그저 금만 간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비건이 모르지 않았다.
이는 절정 고수들만이 가능한 기술이었다.
“생긴 거랑은 다르게 제법이네.”
겁 좀 주려고 한 행동임에도 비건은 전혀 주눅 들거나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