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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존 1권(22화)
7장. 뒤를 쫓다(3)


단유하가 흔드는 깃발을 반사영, 무태, 백리웅이 봤다. 백리연이 움직였다는 뜻으로, 세 사람은 위치를 재빨리 바꿨다. 반사영은 월궁루 후문으로, 무태와 백리웅은 정문을 맡았다.
사실 정문으로 백리연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감시를 받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뭔가를 하기에 정문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백리웅을 정문에 있게 한 건 혹시나 백리연과 접선하는 인물이 백리세가의 사람일지도 몰라서이기 때문이었다.
괜히 후문에서 같이 있다가 그런 광경이라도 보지 않을까 해서다. 하지만 반사영의 예상은 산산이 박살이 났다. 일각이 지나도록 백리연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반사영은 잠행복을 벗고, 월궁루 안으로 들어섰다. 단유하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백리연을 찾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어요.”
“이런.”
월궁루를 아무리 뒤지고 찾아봐도 백리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태와 백리웅도 잠행복을 벗고, 월궁루로 들어왔다.
그 뒤로도 네 사람은 백리연의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

“아무래도 너무 경솔했네요.”
위지청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그의 앞에는 반사영이 앉아 있었다.
반사영은 세작의 뒤를 쫓았던 계획을 실행에 옮겼던 일, 그리고 그 세작이 자취를 감췄다는 걸 사실대로 보고했다.
그리고 월궁루의 주인이 백리천호라는 것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자신이 세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것도 모자라 세작을 놓쳤다. 덕분에 백리연을 찾아내는 일은 미궁 속으로 빠졌다. 백리연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다. 자신이 백리연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준 백리웅을 볼 면목이 없어서다.
“왜 제게 상의하지 않았죠?”
위지청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치 차가웠다. 마치 온 세상을 얼려 버릴 듯한 한기가 서려 있었다.
반사영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뭔가를 해내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그래서 백리연을 찾아내어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었다.
그래야만이 백리웅의 미소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월궁루의 주인이 백리천호라는 사실은 확실한가요?”
“하오문에서 얻은 정보입니다.”
“흐음. 제법이군요. 하오문을 이용할 생각을 다하고.”
위지청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도 반사영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월궁루 주인이 백리천호라면 모든 게 확실해졌네요.”
“네?”
“간단해요. 이제 백리연이 실종이 됐으니 조만간 백리세가에서 본 맹에 책임을 물어 올 것입니다.”
“책임이라뇨?”
“백리세가의 사람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으니 당연한 수순 아닌가요.”
“……!”
“애초부터 이럴 목적이었던 거죠.”
“설마!”
“맞아요. 백리천호는 본 위지세가에 굉장히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죠. 일부러 자신의 사람을 백리연으로 위장시켜 잠입시킨 뒤 불현듯 사라진다. 백리연은 백리천호의 친동생…… 그런 그가 실종된다면 그 책임은 백룡단이 지는 게 아니죠. 바로 나, 임시지만 맹주직을 일임하고 있는 위지청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죠.”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진짜 백리연이 해도 되는 일 아닙니까?”
“방금 제가 말한 단어 중에 실종이 있었죠?”
“……!”
“이 계획이 성립되고 나면 진짜 백리연은 세상에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백리천호도 백리연을 설득했겠죠. 가문을 위해서 희생하기를. 하지만 혈기 왕성한 나이에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평생을 없는 듯 살아야 한다면 더더욱.”
만약 위지청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든 의문점이 풀리게 된다. 동시에 그 잔혹함에 몸서리가 쳐질 정도다. 겨우 위지청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동생을 희생시키다니.
“은신술에 뛰어나다고, 무공이 절정 고수의 반열에 이르렀다고 지존이 되진 않습니다. 무림이라는 세상이 바로 이렇죠. 온갖 권모술수로 가득 차 있고, 나 외에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죠. 야망을 위해서라면 혈육도 매정하게 죽여 버리는 게 바로 무림입니다.”
너무나 안일하게 생각했다. 반사영은 너무나 단순하게 이 세상을 바라봤다. 좁은 시선으로 너무나 작은 것만 보며 자란 탓이다.
“백리연의 일을 제게 보고한 이유를 제 제안의 승낙으로 받아들여도 괜찮겠습니까?”
“제 아버지에 대해서 알아봐 주십시오. 그럼 받아들이겠습니다.”
“아직도 아버지가 천령군 소속이라고 믿고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아쉽게도 그건 맹주님이 폐관에서 나오셔야지 알 수가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야만이 천령군 군장께서도 세상으로 나오실 테니까요.”
“하지만…….”
반사영은 말끝을 흐렸다. 아쉬운 쪽은 자신이다. 저쪽에서는 설득력 있게 대처하는 반면, 자신은 그저 심증만을 갖고 있다. 그 누구도 아버지가 천령군 소속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다.
“아마 그대가 다시 천검맹으로 돌아올 때면 맹주님께서도 폐관에서 나오시지 않을까 합니다.”
“그게 무슨…….”
“이번 일을 겪어서 아시겠지만 무림이라는 곳이 그리 호락호락한 세상이 아니죠. 단순히 무공만이 강하다고 살아남을 수는 없죠. 그대가 제가 원하는 조직에서 활동을 하려면 그에 해당하는 훈련을 해야만이 가능합니다.”
그건 반사영도 인정했다. 하지만 훈련이라니? 대체 무슨 훈련을 받는단 말인가.
“조만간 사람들이 찾아갈 것입니다.”
위지청에게는 그 말밖에 듣지를 못한 채 집무실을 나와야만 했다.

날이 밝자 천검맹이 발칵 뒤집어졌다.
적랑대 부대주였다가 좌천되어 백룡단 단주로 있던 백리연이 실종됐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부터 낙양 전체를 뒤져 봐도 백리연의 행방은 묘연했다. 천검맹 내에 머물고 있는 칠대무력조직의 수장들과 구중천 핵심 인사들이 비상소집 됐다.
백리연이 누구던가. 사대세가 중 하나인 백리세가의 가주인 백리천호의 혈육이다. 그런 그가 백룡단 간부들의 회식이 열리는 날 밤 감쪽같이 사라졌다.
회의가 열렸던 그 안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갔는지는 새어 나오지 않았다.
백리연의 둘째 형인 백리광(百里廣)이 광분하여 어떻게든 동생을 찾아내라고 회의장에서 난동을 피웠다는 후문만이 전해졌을 뿐이다.
그때 자리해 있던 백룡단 부단주들이 일차적으로 조사를 받았다. 그 자리에는 분명 공문기가 자리해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백룡단 단원 중 하나인 단유하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잠이 든 기억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단유하를 비롯해 반사영, 무태, 백리웅은 단체로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조사를 받기 전 반사영이 세 사람에게 어떤 것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를 해 뒀다. 그건 위지청의 뜻이기도 했다.
네 사람이 한결같이 입을 다물자 지하 뇌옥에 갇힐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다 저 때문에.”
반사영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일은 자신 때문에 시작된 일이다. 세작이 백리연으로 위장했다는 것도 자신이 가장 먼저 알았다.
이번 계획도 완벽하다고 생각한 건 역시나 착각에 불과했다. 그로 인해 이런 불상사를 겪게 된 것이다. 위지청에게 말을 했더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냐.”
고개를 푹 숙인 반사영을 보며 백리웅은 쓰게 웃었다.
“모든 게 나를 위해서라는 걸 아는데, 네가 왜 미안해하는 것이야.”
“뭐, 훈련도 안 받고 좋네. 이런데 한 번쯤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무태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고개를 휙휙 둘러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반사영은 피식 웃었다. 작은 원망이라도 할 법도 한데 전혀 자신에게 내색을 하지 않는다. 그게 너무나 고마웠다.
일단은 위지청을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한 훈련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형님은 왜 백룡단에 들어왔수?”
남는 건 시간이고, 밤은 길었다. 네 사람은 지난 몇 달 동안같이 지내면서도 서로가 자라 온 환경에 대해서는 잘 묻지 않아 왔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딱히 할 일 없이 있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못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긴장도 줄어들 것 같았다.
반사영과 무태, 단유하는 백리웅이 직계가 아닌 방계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단 부대인 백룡단에 입단한 건 역시나 의아한 일이다.
“가장 밑바닥부터 시작하고 싶었지.”
백리웅이 성장하면서 받은 멸시는 세 사람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다. 백리세가의 현 가주인 백리천호에게는 작은숙부가 되는 사람이 바로 백리웅의 부친이었다.
그리 먼 친척은 아니지만 엄연히 방계로 구분된다.
직계와 방계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엄청난 거리가 있었다.
오직 직계만이 백리세가의 절기를 배울 수가 있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타고난 피가 방계라면 자격 조건이 주어지지 않는다.
백리세가의 제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익히는 기본적인 내공과 무공들만이 방계에게 허락된다. 물론 최상으로 익힌다면 그것만으로도 일류로 성장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백리웅은 아버지의 복수를 원했다.
“복수요?”
반사영이 깜짝 놀라 물었다.
“휴우.”
백리웅은 한숨을 토해 내더니 잠시 입을 다물었다.
백리웅의 부친과 백리천호의 부친이 다음 가주 자리를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장남이 아닌 백리웅의 부친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뒤집어졌다.
두 사람의 비무에서 백리웅의 부친이 패배한 것이다.
그 뒤로 피를 토해 내며 죽음을 맞이했다.
그 당시 백리웅은 어머니 뱃속에 있었다.
후에 백리웅의 모친은 본가에서 쫓겨났고, 다른 곳에서 아들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분명 아버지께서 공정한 대결이 아닌 사술에 당하신 거라고 하셨지.”
“독 말인가요?”
백리웅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그런 거지. 문파나 무가에서의 권력 싸움은 혈연, 지연이라고 해서 사정을 봐주지 않는 법이지.”
단유하의 말에 백리웅도, 무태도 공감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세 사람은 무림이라는 세상을 온몸으로 겪은 경험자들이다.
반사영은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가장 바닥부터 내 힘으로 성장하고 싶었어. 그래서 꼭 아버지의 죽음을 내 손으로 밝혀내고 싶었지.”
반사영은 백리웅이 자신과 다르지 않은 이유로 힘을 갖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번 사건으로 백리웅은 돌이킬 수 없는 오명을 쓰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백리세가의 사람이 백리연의 실종과 연관이 되어 있다니.
“넌 신검무를 펼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 왜 백룡단으로 온 거지?”
단유하는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부님께서 좀 더 세상을 배우라더군.”
“사부님이 누구신데.”
“태산검(泰山劍).”
“……!”
반사영과 무태의 입이 딱 벌어졌다.
멀쩡한 건 백리웅뿐이다.
“맙소사.”
“어…… 우리가 아는 태산검 구자량(具紫梁) 대협이 맞는 거냐?”
“사부님 앞에서 대협이라는 호칭을 썼다가는 반 죽지.”
태산검 구자량.
오십 년 전에 천하를 호령하던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그의 검 아래 죽어 나간 천마교와 마도련의 무인들만 기백이 넘을 것이다.
그는 현재 유성검문의 원로로 세상을 등진 채 조용히 살고 있었다.
단유하가 그의 제자였다니!
그가 신검무를 펼칠 수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백리웅만이 그가 태산검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태산검을 직접 만날 수 있었고, 그의 옆에 있던 어린 제자를 봤었다.
또한 백리웅에게만 신검무를 보여 주기도 했다.
그건 태산검이 백리웅의 부친을 평소에 어여삐 여겼기 때문이다. 그 아이의 자식에게 개안을 할 경험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