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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존 1권(23화)
7장. 뒤를 쫓다(4)
“사부님에게 제자가 있다는 사실은 유성검문에서도 아는 이들이 거의 없어. 사부님은 유성검문 장원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사시니까. 사람들은 그저 내가 사부님의 시종 노릇을 하며 기본적인 무공만을 배우는 거라고만 알 뿐이지.”
공식적으로 제자를 두었다고 발표하지 않은 이유는 단유하가 세상의 관심을 받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이 중에서 네가 가장 이해할 수가 없다.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용호방 낭인이 어째서 천검맹 안으로 들어올 생각을 했는지.”
“형님이 돌아가셨다.”
“친형님이?”
“그래.”
무태와 그의 형은 용호방 소속 낭인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해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천하를 떠돌면서 두 형제는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의 호위를 맡게 됐다.
천권문 문도의 딸이 시집을 가기 위해 낙양으로 향하는데, 곁에서 지켜 달라는 것이다.
이미 두 형제의 무위는 웬만한 무인들을 압도했다.
낙양으로 향하던 중 암살 시도가 있었다.
의뢰자의 딸은 지킬 수 있었지만, 무태의 형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암살자들은 마도련 소속이었다고 했다.
“그게 삼 년 전의 일이다. 그 뒤로 망나니처럼 살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곁에는 아무도 없더라. 그래서 제대로 살고 싶었지.”
“…….”
“복수를 하려고?”
“글쎄다. 겨우 백룡단원이 된 놈이 마도련을 향해 뭘 할 수 있겠냐.”
무태는 자조 섞인 미소를 머금었다. 반사영은 세 사람의 사연을 들으면서 더 죄책감에 시달렸다.
각자의 인생을 버리고 뭔가를 얻기 위해 온 백룡단이다. 하지만 백리연의 실종으로 인해 백룡단은 물론 목숨까지도 보장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됐다.
자신은 위지청과의 거래 때문에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컸다.
지금 당장 위지청에게 달려가서 세 사람을 구해 달라고 청을 하고 싶었다.
뇌옥에 갇힌 지 이틀째가 되던 날 네 사람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됐다. 백리연의 실종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그들을 백리세가에서 직접적으로 심문한다는 것이다.
백리세가의 입장은 단호했다. 또한 백리연의 실종에 대한 책임을 임시 맹주인 위지청에게 강력하게 물었다.
위지청의 말대로 백리천호는 어떻게든 위지세가의 힘을 약하게 하기 위해 이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조만간 이번 사건으로 인한 보상을 백리세가 쪽에서 제시할 것이다. 그걸 수용해 주지 않을 시 칠대무력조직에 속해서 중대한 임무를 맡은 자신들의 사람들을 모조리 빼내 올 것이 틀림없었다.
백리웅의 안색은 급격하게 죽어 갔다.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고,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백리세가의 본가로 간다는 말은 백리웅에게는 딱 두 가지 결말을 가져온다.
파문 혹은 죽음.
둘 다 백리웅에게는 최악의 결말이다.
“걱정 마. 사부님이 이미 소식을 들으시고 뭔가 대책을 마련하고 계실 테니.”
단유하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꿔 보고자 입을 열었다. 물론 그의 말대로 태산검이 나선다면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백리웅은 아니다. 이 사건이 좋게 마무리된다 하더라도 그는 가문에서 파문당하는 건 모면하기가 힘들 것이다.
네 사람은 뇌옥에서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대체 뭐하는 거야, 이 인간은!’
그때까지도 위지청은 아무런 연락을 해 오지 않았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자신을 버리는 것인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지금 위지청이 반사영과 세 사람을 옹호하고 나선다면 그의 입지가 불리해진다. 사라진 백리연이 가짜라는 걸 떠들어 봤자 물증이 없지 않은가.
“총타를 떠났습니다.”
네 사람을 태운 마차가 천검맹을 떠났다는 곽대우의 보고에 위지청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부터가 시작이겠군요.”
“반사영과 그들 모두를 데리고 갑니까?”
“물론이죠.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알아보니 제법 괜찮은 실력들을 갖고 있더군요.”
“백리세가의 일은 어찌 처리할까요.”
“그동안 준비해 놨던 걸 푸세요. 이번 일로 인해 본가에 적대시하려던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알게끔.”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백리세가에 도착하기 전에 그 사람들을 빼내야 합니다.”
“명을 받듭니다.”
8장. 납치되다(1)
덜커덩. 덜커덩.
마차는 하루 종일 뒤뚱거렸다. 잘 닦여진 도로가 아닌 산길을 달렸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듯 마차의 속도는 빨랐다. 이 정도 속도면 넉넉잡아 이틀이면 백리세가로 도착할 수가 있었다.
무태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상황이 왜 이렇게 돌아갔는지 답답할 뿐이다. 백리세가에서 심문을 받는 건 죽으러 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여기 마차에 있는 이들 중 무태와 단유하만큼은 안전했다. 목숨을 잃을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쉽게 풀려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온갖 고문으로 차라리 죽는 게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
“확 도망이라도 칠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네 명이 힘을 합치면 말이다. 하지만 그 뒷감당은 누구도 책임질 수 없었다.
도망을 치면 백리연이 실종된 일을 자신들이 벌인 짓이라 자백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 어찌 될까.
무림 공적으로 온 천하에 무림 세력들에게 뒤쫓기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잠자코 있어.”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던 백리웅이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어떻게든…… 내가 잘 해결해 보마.”
“형님…….”
이 중에서 가장 마음이 답답한 인물이 백리웅이다.
한참 동안의 침묵을 깬 건 반사영이다.
“합시다.”
무태와 단유하가 눈을 번쩍 떴다.
“자신 있어? 성공한다고 해서 우리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어.”
“알아요.”
“그래도 하자고?”
반사영은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았지만 왠지 이 선택이 맞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무태의 말처럼 도망을 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하지만 이대로 넋 놓고 백리세가로 끌려간다고 해도 뭔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위지청의 손길을 기대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그가 자신의 재능을 탐냈지만, 찾아보면 얼마든지 더 뛰어난 인재는 존재한다. 그에게는 그런 이들을 찾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내부의 적으로 판단된 백리세가에 집중을 해야 할 때다.
지금 자신들을 구해 주는 일에 작은 흔적이라도 남긴다면 위지청에게는 적지 않은 출혈이 될 것이다.
결국 백리세가로 끌려가기 싫다면 자신들의 힘으로 해내야만 한다.
“도망친 후에 사부님에게 연락을 하면 돼.”
“태산검께서 도와주실까?”
“내가 죽으면 그 노인네 남은 삶이 적적하실 게야.”
“아무리 태산검이시라 하셔도 상대는 백리세가입니다.”
“쯔쯧. 사부님이 두려워하시는 건 이 세상에 없어. 천검맹 맹주라 할지라도.”
문제는 태산검을 만나기 전에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느냐다. 백리세가에서 유성검문은 거리가 상당했다. 사람을 보내온다 하더라도 빠른 시일 안에 접촉하기란 불가능하다.
“너희들끼리 도망쳐라.”
맥이 탁 풀리는 목소리로 백리웅이 중얼거렸다.
“그게 뭔 소립니까! 같이 가야지.”
“쉬잇! 목소리가 너무 커요.”
반사영이 무태의 입을 성급하게 막았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우리를 호송하는 무인은 겨우 열 명이에요. 이 쇠사슬이야 푸는 건 일도 아니고. 점혈이야 반나절이면 풀 수 있어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만약 여기서 도망친다면 나의 어머니가 어찌 될지 모른다.”
“하아…….”
그랬다. 네 사람 중 지켜야 할 가족이 있는 건 백리웅뿐이다. 백리세가로 가서 백 번, 천 번 사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어머니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고 백리웅을 빼놓고 도망을 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대로 백리세가로 끌려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형님이 지금 도망친다고 해서 어머니께서 어떤 위협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꼭 그 때문만은 아니다. 어머니의 안위도 걱정이 되지만, 백리연이 그렇게 되도록 지켜 주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어떤 처벌도 달게 받아야 할 녀석에 불과해.”
반사영은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속이 물러 터져도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다. 반사영은 뭔가 더 설득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마차가 멈췄기 때문이다.
네 사람을 백리세가로 호송하는 이들은 청의검대 무인들이었다. 가는 중간에 백리세가 본가의 무인들에게 인계한다고 들었다.
마차가 멈춘 건 식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새 해는 저물어 있었다.
네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청의검대 무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끼니를 때웠다. 따뜻한 음식은 아니고 육포나 벽곡단이 전부다.
“어이, 형씨. 술이라도 좀 주쇼.”
무태가 웃으며 농담조로 말을 걸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들은 줄곧 냉랭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런 태도에 비해 그리 엄격한 제지는 가하지 않았다. 한낱 백룡단 신참들을 호송하는 임무다. 적당한 긴장감으로도 충분히 임무를 완수할 수준인 것이다.
게다가 조금만 더 가면 백리세가의 무인들에게 인계를 하니 별다른 어려운 일은 없었다.
“언제쯤 백리세가의 무인들을 만납니까?”
“왜 벌써부터 겁이 나 죽을 것 같으냐.”
이번 호송 임무를 책임진 자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나마 조금이나 직책이 있는 자라 별다른 긴장이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가면 얼마나 줘 터질지. 생각하면 돌아 버릴 지경입니다.”
“그러게 왜 그런 몹쓸 짓을 했느냔 말이야. 아무리 백리연이 밉다 해도 그렇지. 그래도 같은 핏줄인데 말이야.”
상급자의 시선이 백리웅에게로 날카롭게 쏘아져 나갔다.
“그런데 정말…… 죽였나?”
무태에게 한 질문이지만, 백리웅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아, 글쎄 우리는 그 인간 실종에 대해 아무런 상관이 없다니까요.”
“그걸 믿어 줄 사람은 없어. 주도면밀하게 백리연을 죽였다고 이미 주변에서는 확신을 하고 있지.”
“아, 글쎄 아니라니까 그러네.”
―형님.
무태가 수다를 떠는 사이 반사영은 백리웅에게 전음을 보냈다. 무태가 저러는 건 어서 백리웅을 설득하라는 뜻일 것이다.
―월궁루의 주인이 누군지 아십니까.
―…….
반사영은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다. 백리웅을 정신 차리게 할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해야만 했다.
―백리천호랍니다.
그 순간 백리웅의 눈빛이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오문에서 얻은 정보입니다. 월궁루의 실제 주인은 백리천호. 그리고 도망친 세작 놈과 진짜 백리연을 만난 곳도 월궁루입니다. 일개 홍등가에 위치한 월궁루 지하에 그런 뇌옥이 있다는 것이 납득이 가요?
―…….
백리웅은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한 얼굴이었다.
―백리천호는 월궁루를 짓고, 천화객을 위협하고 있어요. 그건 위지세가에 대한 선전포고죠. 백리연의 실종으로 인해 그들은 위지청에게 책임을 묻겠죠. 애초부터 백리연을 희생시킴으로써 위지세가의 입지를 흔들 작정으로 말이에요.
백리웅은 몰래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음을 잊은 듯 눈을 부릅떴다.
다행히 그걸 눈치챈 이들은 없었다.
“이제 끌려가면 고생길이 훤할 텐데, 마지막으로 술이나 좀 먹읍시다.”
“이 친구야, 여기 술이 어디 있겠나.”
“내가 잘못 맡은 건가? 저기 저분한테서 향이 그윽한 술 냄새가 났던 거 같은데.”
―천호 형님께서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다.
―세간에 이미 널리 퍼진 평을 형님만 모르고 계시고 있네요.
―…….
―백리세가는 언제나 이인자로서 지냈다고 그러더군요.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모든 영광을 위지세가에게만 양보할 수 있을까요.
―사영! 지금 내 앞에서 백리세가를 욕보이는 것이냐.
―지금이 기회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오지 않을 겁니다. 저희와 함께 가요.
―그럴 수는 없다.
‘이익!’
반사영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내일이면 백리세가의 무인들에게 넘겨진다. 그러면 영영 도망칠 기회는 사라질 것이다.
반사영은 더 이상 백리웅을 설득하는 걸 포기했다. 설득이 안 된다면 강제로 끌고라도 도망쳐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