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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모든 문제는 어디서 시작?
황실의 파티는 이미 시작되어 한창 분위기가 들떠 올라 있었다. 귀족들과 그들의 자제들이 도란도란 모여 그룹을 만든 지 오래였고, 그들끼리 사소한 소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도 혼자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으음, 루카. 너는 이번 파티의 주인공이 누가 될 거 같아?”
“……모르겠습니다.”
황실의 적통 혈통인 푸른 청안을 가지고 있지만, 황후에게서 태어난 제1황자가 아니기에 황위 계승권을 갖지 못한 로우렌스 제국의 제2황자 아렌트 로우렌스는 그의 오래된 벗인 루카르테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렌트의 일방적인 대화였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고 약혼녀를 정하다니. 이 한심하고 바보 같은 발상을 한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듣는 귀가 많습니다. 말하는 걸 주의하시죠.”
“어차피 황위 계승권이 없는 제2황자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 벗어나 있는데 뭘.”
선한 인상, 다정한 웃음. 하지만 속내를 거침없이 말하는 본성. 웃으면서 상대를 깎아내리기도 하는 남자. 그런 황자를 상대하는 것은 대부분 귀족도 꺼렸다.
만약을 위해 아렌트 황자에게도 눈도장을 찍으려던 귀족들은 서릿발 같은 그의 태도로 인해 몇 번 시도했다가 대부분이 포기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그를 담담히 상대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괴물 공작이라고 불리는 루카르테 카시미르 공작이었다. 아렌트 황자의 오랜 벗이며 제2황자의 사람인.
“혼기가 찬 건 피차 마찬가지인데. 루카 너는 혼약할 생각도 없지?”
“그건 황자님 아닙니까? 귀족들의 자제들도 모두 거절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 남자로서 한 여인만을 사랑해 줄 수 있는 게 아닌데 혼약을 할 수는 없지. 불행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상대도 똑같으니까.”
시종이 가져다준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신 아렌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웃었다.
웃고는 있지만, 그 웃음을 짓기 위해 그간 어떤 시간들을 보냈는지 잘 알고 있는 루카르테는 긴말하지 않았다.
“……루카는 왜 혼약을 안 해?”
“괴물 공작이지 않습니까.”
“얼굴에 흉터가 난 게 무슨 대수라고. 몸의 흉터는 괜찮아도 얼굴은 안 된다? 헛소리.”
루카르테는 흔들리는 칵테일이 담긴 잔에 비추어지는 제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오른쪽 눈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긴 흉터. 옛 마물과의 전투로 생긴 흉터는 미를 중요시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큰 흠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권력과 명예도 가지고 있지만, 얼굴에 차마 눈 뜨고 보기에 어려운 흉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귀족의 여식들은 대부분이 그와의 혼약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흉하다는 것은 틀리지 않으니까요.”
“……바보냐, 넌.”
“바보가 아니라 현실에 순응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누군가와 혼약을 치르고 싶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손을 올려 흉터가 아문 자리를 만지면 손끝에 흉터의 거친 촉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공작의 상대가 되는 여인도 불쌍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너, 그 흉터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도 똑같은 소리를 할까?”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질문에 루카르테는 대답을 찾지 못하고 마른 입술을 축였다. 과연 그런 여인이 나타날까.
아렌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고민하던 루카르테의 시야에 파티장으로 들어오고 있는 엘리네시아가 보였다. 무엇이 신기한지 주변을 두리번 구경하는 그녀를 보며 루카르테는 운을 뗐다.
“……글쎄요.”
마시던 칵테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그는 어딘가 쓸쓸한 웃음을 지으며 아렌트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했다.
“그런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답하는 그 모습이 쓸쓸하고 외로워 보여 아렌트의 입가에 쓴 미소가 지어졌다.
“……어쩌면. 단 한 사람은 있을지도 모르지.”
아렌트의 위로가 담긴 말에 루카르테는 말없이 칵테일만 삼켰다.
그때, 파티장의 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아이샤르 백작님 입장하십니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졌다. 아이샤르 백작 가문. 그 이름이 유명한 이유는 다양했지만, 그중 가장 큰 공헌을 한 이는 바로 엘리네시아.
아이샤르 가문의 영애였다.
“……역시 다른 영애들과는 다른 외모란 말이지.”
그녀의 외모는 사교계에서도 유명한 화젯거리였다. 아름다운 외모,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기품.
“안 그래?”
고개를 돌리며 묻던 아렌트는 루카르테의 시선이 집요하게 엘리네시아에게 향한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기억으로는 루카르테와 엘리네시아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을 일은 전혀 없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회장에 엘리네시아가 입장한 이후부터 그의 시선은 오로지 그녀에게만 향해 있었다.
“아는 사이야?”
“……모르는 사이일 겁니다.”
“맞다도 아니다고 아니고. 일 거라고?”
애매모호한 답변이 아렌트의 흥미에 불을 지폈다. 평소 모든 일에 확실한 태도를 보이는 루카르테가 이런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 그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샤르 백작가의 영애. 엘리네시아 아이샤르.
제국 내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아이샤르 백작가가 제국을 위해 헌신한 가문들 중 하나로 유명하기도 했지만, 엘리네시아 아이샤르가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제국 내 대부분의 여자는 저리 가라고 할 정도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었다.
귀족들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다. 사치가 심하다, 허영심이 많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름다운 것을 곁에 두고 만지고 보는 것이 귀족들에게 있어 그들의 권력과 명예, 재산을 과시하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런 귀족들 사이에서도 특히 뛰어난 외모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여인이 바로 엘리네시아 아이샤르였기 때문에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제국 내에서는 유명인이었다.
그리고 황실 기사단 중 하나인 에스텔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에셀레드의 여동생이라는 호칭 또한 그들의 흥미를 가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카시미르 공작도 남자는 남자인 걸까? 그래서 눈앞에 빼어난 미모의 여인이 있으니 설레?”
근본 없는 갑작스러운 말에 루카르테는 별 한심한 소리를 다 들어 본다는 것처럼 아렌트를 보며 강한 일침을 날렸다.
“바보입니까?”
“말하는 건 여전히 가차 없네.”
“뭘 새삼스레 말하십니까? 황자님한테는 원래 가차 없었습니다.”
점점 회장 안에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공기가 갑갑해진 루카르테는 잠시 테라스로 나갔다 오려고 했다. 무언가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그를 끌고 가는 아렌트 황자만 아니었다면.
“어디 가시는 겁니까?”
“어떤 여인들을 봐도 관심이 없던 우리 카시미르 공작이 처음으로 흥미를 보이고 있는 것 같은 아이샤르 영애와 인사시켜 주려고 가는 거지.”
“……거절합니다.”
“거절은 거절한다.”
“제 의견은 어디 있습니까?”
아렌트는 하하, 시원한 소리를 내어 웃으며 루카르테의 등을 팡팡 쳤다.
“당연히 없지.”
전투와 고된 훈련으로 단련된 몸이 고작 몇 번 때린다고 아프지는 않겠지만 당연한 걸 묻는다는 식의 대답에 어쩐지 기분 나쁜 불쾌함을 느낀 루카르테는 아렌트 황자를 노려봤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시죠.”
“쓸데없는 짓인지 아닌지는 봐야 알겠지.”
“황자님……!”
끌고 가는 아렌트의 팔을 차마 쳐 낼 수는 없어 루카르테는 난감한 얼굴을 하며 그가 이끄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 * *
엘리네시아는 입장과 동시에 자연스레 많은 시선이 제게 닿는 것을 몸소 느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원작대로라면 제1황자 데페르 로우렌스의 약혼녀로 선택되는 사람은 엘리네시아 그녀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 엘리네시아의 몸 안에 있는 사람은 악녀 엘리네시아가 아니라 채시현이었다.
어차피 원작의 끝처럼 해피 엔딩만 될 수 있다면, 굳이 엘리네시아가 악녀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결말만 해피 엔딩이 될 수 있다면 굳이 죽을 필요가 있을까?
‘난 또 죽고 싶지는 않거든.’
원작의 엘리네시아에게는 미안하지만, 굳이 이야기의 흐름대로 따라가 죽고 싶지 않았다.
생각에 빠진 사이 엘리네시아의 뒤로 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라……??’
환하게 불이 밝혀진 건물 안에 그늘이 지거나 할 일은 없는데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의아했던 엘리네시아는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복?”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황실에서만 사용하는 금색의 자수로 무언가 문양이 새겨진 검은 제복이었다. 처음 보는 것 같지는 않은 눈에 익은 익숙한 문양이라 어디에서 본 건가 싶었던 그녀는 제복에 새겨진 문양을 세심하게 살폈다.
“……엘리? 엘리.”
“잠깐만요, 오라버니. 이 문양을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영애는 여러모로 호기심이 많으신 분인가 보네요.”
“네, 제가 좀 한 가지에 빠지면 주변을 잘 못 보는 편이라……. 응?”
옆에서 제게 웃음기를 머금은 어조로 걸어오는 말에 언제나처럼 자연스레 대답하던 엘리네시아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제게 말을 건 목소리가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에셀레드도, 레너드의 목소리도 아닌 또 다른, 귀를 매혹하는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들린 곳은 앞에 있는 제복을 입은 남성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부드러운 낯으로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남자였다.
그 얼굴은 눈에 아주 익숙한 외모를 가진 남자였고, 빨려 들어갈 듯한 푸른 청안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소설 속 등장인물이 딱 한 명 떠올랐다.
“……황자……님?”
소설 속 남자주인공 중 한 명이자 후에 정식 황실 계승권의 후계자가 될 제2황자 아렌트 로우렌스였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인사했더라……. 엘리네시아는 기억 속 소설의 내용을 속으로 읊으며 드레스 자락을 손에 가벼이 쥐며 아렌트에게 예를 갖추었다.
“화, 황자님께 엘비르 여신의 빛이 닿으시길.”
“영애에게 제국의 영광이 닿기를.”
아렌트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던 엘리네시아가 다시 고개를 들기 전에 바로 옆에 있는 또 한 사람의 발을 발견했다.
‘사람?’
그러고 보니 제복이 그냥 걸어 다닐 일은 절대 없을 텐데. 누군가가 입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 발의 주인이 바로 그 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일 터.
그리고 사람들이 꺼리는 아렌트 황자와 같이할 인물은 한 명뿐이었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엘리네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눈앞의 인물을 확인했다.
은발에 붉은 눈. 그리고 오른쪽 눈 위의 흉터. 원작의 서브 남자주인공. 바로 루카르테 카시미르였다. 상대를 확인한 엘리네시아는 드레스 자락을 가벼이 쥐며 인사를 건넸다.
“공작님께 제국의 영광이 닿으시길.”
“영애에게도 제국의 영광이 닿기를.”
엘리네시아는 지금 제가 자연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채시현이라는 사람은 성격도 밝은 편이었고, 시원한 편이라 남녀노소 두루두루 사람 관계가 넓었다. 하지만 그런 채시현이라는 사람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바로 한 가지에 생각이 빠지면 주변에 대한 신경이 무뎌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성격은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왔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았다.
‘내 바보 같은 성격이 지금은 정말 싫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황자에게 안 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지 않아도 뒤에서 경직되어 있을 아이샤르 가문의 두 남자가 떠올랐다.
“이렇게 영애랑 대화를 해 보는 것도 처음인 것 같네요.”
“황자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가벼운 담소나 나누려고 온 거니까요.”
‘황자가 눈앞에 있는데 어렵게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어딨어? 지금 이 사람들 뒤에서 굳은 거 안 느껴져?’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말로 하며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엘리네시아는 무엇보다 목숨이 소중한 사람이었다. 한 번 죽음을 겪어 본 이상 또 죽음을 겪는다는 불상사는 원하지 않았다.
“역시 영애도 카시미르 공작을 알고 있군요?”
“제국을 위해 헌신하시고, 제국을 지켜 주시는 분인데 모를 리가요.”
인사를 나눈 뒤부터 빤히 자신에게서 시선이 떠나지 않는 루카르테로 인해 엘리네시아 역시 그에게로 시선을 옮겨 눈을 마주하며 말을 이어 갔다.
“카시미르 공작님이 젊은 나이에 세우신 업적을 모르는 사람은 제국에 없지 않을까요?”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그의 오른쪽 눈에 난 흉터였다. 마물과의 전투로 깊게 남은 흉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저 상처가 생겼을 때는 얼마나 아팠을까.
간단한 수술이라 할지라도 많이 아팠을 텐데, 저렇게 피부가 여린 눈 주위에 난 상처는 더욱 아팠겠지. 그리고 그다음 눈에 담기는 것은 루카르테의 붉은 눈이었다.
천천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던 엘리네시아는 불꽃을 담은 보석이 담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불꽃이었다.
“……제 흉터가 신경 쓰이십니까?”
루카르테는 조금 전부터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엘리네시아로 인해 당황하고 있었다. 눈을 피하거나 할 줄 알았는데 한 번 마주한 눈은 피하지 않고 그를 더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흉터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는 여인은 없다고 생각하는 루카르테는 엘리네시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하며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한동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한참 뒤, 그녀의 입술이 달싹이며 그들 사이의 침묵을 깨뜨리는 한 마디가 들려왔다.
“공작님은 눈이 예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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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모든 문제는 어디서 시작?
황실의 파티는 이미 시작되어 한창 분위기가 들떠 올라 있었다. 귀족들과 그들의 자제들이 도란도란 모여 그룹을 만든 지 오래였고, 그들끼리 사소한 소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도 혼자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으음, 루카. 너는 이번 파티의 주인공이 누가 될 거 같아?”
“……모르겠습니다.”
황실의 적통 혈통인 푸른 청안을 가지고 있지만, 황후에게서 태어난 제1황자가 아니기에 황위 계승권을 갖지 못한 로우렌스 제국의 제2황자 아렌트 로우렌스는 그의 오래된 벗인 루카르테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렌트의 일방적인 대화였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고 약혼녀를 정하다니. 이 한심하고 바보 같은 발상을 한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듣는 귀가 많습니다. 말하는 걸 주의하시죠.”
“어차피 황위 계승권이 없는 제2황자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 벗어나 있는데 뭘.”
선한 인상, 다정한 웃음. 하지만 속내를 거침없이 말하는 본성. 웃으면서 상대를 깎아내리기도 하는 남자. 그런 황자를 상대하는 것은 대부분 귀족도 꺼렸다.
만약을 위해 아렌트 황자에게도 눈도장을 찍으려던 귀족들은 서릿발 같은 그의 태도로 인해 몇 번 시도했다가 대부분이 포기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그를 담담히 상대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괴물 공작이라고 불리는 루카르테 카시미르 공작이었다. 아렌트 황자의 오랜 벗이며 제2황자의 사람인.
“혼기가 찬 건 피차 마찬가지인데. 루카 너는 혼약할 생각도 없지?”
“그건 황자님 아닙니까? 귀족들의 자제들도 모두 거절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 남자로서 한 여인만을 사랑해 줄 수 있는 게 아닌데 혼약을 할 수는 없지. 불행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상대도 똑같으니까.”
시종이 가져다준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신 아렌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웃었다.
웃고는 있지만, 그 웃음을 짓기 위해 그간 어떤 시간들을 보냈는지 잘 알고 있는 루카르테는 긴말하지 않았다.
“……루카는 왜 혼약을 안 해?”
“괴물 공작이지 않습니까.”
“얼굴에 흉터가 난 게 무슨 대수라고. 몸의 흉터는 괜찮아도 얼굴은 안 된다? 헛소리.”
루카르테는 흔들리는 칵테일이 담긴 잔에 비추어지는 제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오른쪽 눈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긴 흉터. 옛 마물과의 전투로 생긴 흉터는 미를 중요시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큰 흠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권력과 명예도 가지고 있지만, 얼굴에 차마 눈 뜨고 보기에 어려운 흉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귀족의 여식들은 대부분이 그와의 혼약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흉하다는 것은 틀리지 않으니까요.”
“……바보냐, 넌.”
“바보가 아니라 현실에 순응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누군가와 혼약을 치르고 싶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손을 올려 흉터가 아문 자리를 만지면 손끝에 흉터의 거친 촉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공작의 상대가 되는 여인도 불쌍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너, 그 흉터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도 똑같은 소리를 할까?”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질문에 루카르테는 대답을 찾지 못하고 마른 입술을 축였다. 과연 그런 여인이 나타날까.
아렌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고민하던 루카르테의 시야에 파티장으로 들어오고 있는 엘리네시아가 보였다. 무엇이 신기한지 주변을 두리번 구경하는 그녀를 보며 루카르테는 운을 뗐다.
“……글쎄요.”
마시던 칵테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그는 어딘가 쓸쓸한 웃음을 지으며 아렌트의 질문에 대해 대답을 했다.
“그런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답하는 그 모습이 쓸쓸하고 외로워 보여 아렌트의 입가에 쓴 미소가 지어졌다.
“……어쩌면. 단 한 사람은 있을지도 모르지.”
아렌트의 위로가 담긴 말에 루카르테는 말없이 칵테일만 삼켰다.
그때, 파티장의 문이 다시 한번 열렸다.
“아이샤르 백작님 입장하십니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졌다. 아이샤르 백작 가문. 그 이름이 유명한 이유는 다양했지만, 그중 가장 큰 공헌을 한 이는 바로 엘리네시아.
아이샤르 가문의 영애였다.
“……역시 다른 영애들과는 다른 외모란 말이지.”
그녀의 외모는 사교계에서도 유명한 화젯거리였다. 아름다운 외모,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기품.
“안 그래?”
고개를 돌리며 묻던 아렌트는 루카르테의 시선이 집요하게 엘리네시아에게 향한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기억으로는 루카르테와 엘리네시아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을 일은 전혀 없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회장에 엘리네시아가 입장한 이후부터 그의 시선은 오로지 그녀에게만 향해 있었다.
“아는 사이야?”
“……모르는 사이일 겁니다.”
“맞다도 아니다고 아니고. 일 거라고?”
애매모호한 답변이 아렌트의 흥미에 불을 지폈다. 평소 모든 일에 확실한 태도를 보이는 루카르테가 이런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 그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샤르 백작가의 영애. 엘리네시아 아이샤르.
제국 내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아이샤르 백작가가 제국을 위해 헌신한 가문들 중 하나로 유명하기도 했지만, 엘리네시아 아이샤르가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제국 내 대부분의 여자는 저리 가라고 할 정도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었다.
귀족들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했다. 사치가 심하다, 허영심이 많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름다운 것을 곁에 두고 만지고 보는 것이 귀족들에게 있어 그들의 권력과 명예, 재산을 과시하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런 귀족들 사이에서도 특히 뛰어난 외모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여인이 바로 엘리네시아 아이샤르였기 때문에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제국 내에서는 유명인이었다.
그리고 황실 기사단 중 하나인 에스텔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에셀레드의 여동생이라는 호칭 또한 그들의 흥미를 가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카시미르 공작도 남자는 남자인 걸까? 그래서 눈앞에 빼어난 미모의 여인이 있으니 설레?”
근본 없는 갑작스러운 말에 루카르테는 별 한심한 소리를 다 들어 본다는 것처럼 아렌트를 보며 강한 일침을 날렸다.
“바보입니까?”
“말하는 건 여전히 가차 없네.”
“뭘 새삼스레 말하십니까? 황자님한테는 원래 가차 없었습니다.”
점점 회장 안에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공기가 갑갑해진 루카르테는 잠시 테라스로 나갔다 오려고 했다. 무언가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그를 끌고 가는 아렌트 황자만 아니었다면.
“어디 가시는 겁니까?”
“어떤 여인들을 봐도 관심이 없던 우리 카시미르 공작이 처음으로 흥미를 보이고 있는 것 같은 아이샤르 영애와 인사시켜 주려고 가는 거지.”
“……거절합니다.”
“거절은 거절한다.”
“제 의견은 어디 있습니까?”
아렌트는 하하, 시원한 소리를 내어 웃으며 루카르테의 등을 팡팡 쳤다.
“당연히 없지.”
전투와 고된 훈련으로 단련된 몸이 고작 몇 번 때린다고 아프지는 않겠지만 당연한 걸 묻는다는 식의 대답에 어쩐지 기분 나쁜 불쾌함을 느낀 루카르테는 아렌트 황자를 노려봤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시죠.”
“쓸데없는 짓인지 아닌지는 봐야 알겠지.”
“황자님……!”
끌고 가는 아렌트의 팔을 차마 쳐 낼 수는 없어 루카르테는 난감한 얼굴을 하며 그가 이끄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 * *
엘리네시아는 입장과 동시에 자연스레 많은 시선이 제게 닿는 것을 몸소 느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원작대로라면 제1황자 데페르 로우렌스의 약혼녀로 선택되는 사람은 엘리네시아 그녀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 엘리네시아의 몸 안에 있는 사람은 악녀 엘리네시아가 아니라 채시현이었다.
어차피 원작의 끝처럼 해피 엔딩만 될 수 있다면, 굳이 엘리네시아가 악녀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결말만 해피 엔딩이 될 수 있다면 굳이 죽을 필요가 있을까?
‘난 또 죽고 싶지는 않거든.’
원작의 엘리네시아에게는 미안하지만, 굳이 이야기의 흐름대로 따라가 죽고 싶지 않았다.
생각에 빠진 사이 엘리네시아의 뒤로 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라……??’
환하게 불이 밝혀진 건물 안에 그늘이 지거나 할 일은 없는데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의아했던 엘리네시아는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복?”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황실에서만 사용하는 금색의 자수로 무언가 문양이 새겨진 검은 제복이었다. 처음 보는 것 같지는 않은 눈에 익은 익숙한 문양이라 어디에서 본 건가 싶었던 그녀는 제복에 새겨진 문양을 세심하게 살폈다.
“……엘리? 엘리.”
“잠깐만요, 오라버니. 이 문양을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영애는 여러모로 호기심이 많으신 분인가 보네요.”
“네, 제가 좀 한 가지에 빠지면 주변을 잘 못 보는 편이라……. 응?”
옆에서 제게 웃음기를 머금은 어조로 걸어오는 말에 언제나처럼 자연스레 대답하던 엘리네시아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제게 말을 건 목소리가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에셀레드도, 레너드의 목소리도 아닌 또 다른, 귀를 매혹하는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들린 곳은 앞에 있는 제복을 입은 남성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부드러운 낯으로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남자였다.
그 얼굴은 눈에 아주 익숙한 외모를 가진 남자였고, 빨려 들어갈 듯한 푸른 청안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소설 속 등장인물이 딱 한 명 떠올랐다.
“……황자……님?”
소설 속 남자주인공 중 한 명이자 후에 정식 황실 계승권의 후계자가 될 제2황자 아렌트 로우렌스였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인사했더라……. 엘리네시아는 기억 속 소설의 내용을 속으로 읊으며 드레스 자락을 손에 가벼이 쥐며 아렌트에게 예를 갖추었다.
“화, 황자님께 엘비르 여신의 빛이 닿으시길.”
“영애에게 제국의 영광이 닿기를.”
아렌트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던 엘리네시아가 다시 고개를 들기 전에 바로 옆에 있는 또 한 사람의 발을 발견했다.
‘사람?’
그러고 보니 제복이 그냥 걸어 다닐 일은 절대 없을 텐데. 누군가가 입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 발의 주인이 바로 그 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일 터.
그리고 사람들이 꺼리는 아렌트 황자와 같이할 인물은 한 명뿐이었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엘리네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눈앞의 인물을 확인했다.
은발에 붉은 눈. 그리고 오른쪽 눈 위의 흉터. 원작의 서브 남자주인공. 바로 루카르테 카시미르였다. 상대를 확인한 엘리네시아는 드레스 자락을 가벼이 쥐며 인사를 건넸다.
“공작님께 제국의 영광이 닿으시길.”
“영애에게도 제국의 영광이 닿기를.”
엘리네시아는 지금 제가 자연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채시현이라는 사람은 성격도 밝은 편이었고, 시원한 편이라 남녀노소 두루두루 사람 관계가 넓었다. 하지만 그런 채시현이라는 사람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바로 한 가지에 생각이 빠지면 주변에 대한 신경이 무뎌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성격은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왔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았다.
‘내 바보 같은 성격이 지금은 정말 싫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황자에게 안 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지 않아도 뒤에서 경직되어 있을 아이샤르 가문의 두 남자가 떠올랐다.
“이렇게 영애랑 대화를 해 보는 것도 처음인 것 같네요.”
“황자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가벼운 담소나 나누려고 온 거니까요.”
‘황자가 눈앞에 있는데 어렵게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어딨어? 지금 이 사람들 뒤에서 굳은 거 안 느껴져?’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말로 하며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엘리네시아는 무엇보다 목숨이 소중한 사람이었다. 한 번 죽음을 겪어 본 이상 또 죽음을 겪는다는 불상사는 원하지 않았다.
“역시 영애도 카시미르 공작을 알고 있군요?”
“제국을 위해 헌신하시고, 제국을 지켜 주시는 분인데 모를 리가요.”
인사를 나눈 뒤부터 빤히 자신에게서 시선이 떠나지 않는 루카르테로 인해 엘리네시아 역시 그에게로 시선을 옮겨 눈을 마주하며 말을 이어 갔다.
“카시미르 공작님이 젊은 나이에 세우신 업적을 모르는 사람은 제국에 없지 않을까요?”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그의 오른쪽 눈에 난 흉터였다. 마물과의 전투로 깊게 남은 흉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저 상처가 생겼을 때는 얼마나 아팠을까.
간단한 수술이라 할지라도 많이 아팠을 텐데, 저렇게 피부가 여린 눈 주위에 난 상처는 더욱 아팠겠지. 그리고 그다음 눈에 담기는 것은 루카르테의 붉은 눈이었다.
천천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던 엘리네시아는 불꽃을 담은 보석이 담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불꽃이었다.
“……제 흉터가 신경 쓰이십니까?”
루카르테는 조금 전부터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엘리네시아로 인해 당황하고 있었다. 눈을 피하거나 할 줄 알았는데 한 번 마주한 눈은 피하지 않고 그를 더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흉터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는 여인은 없다고 생각하는 루카르테는 엘리네시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하며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한동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한참 뒤, 그녀의 입술이 달싹이며 그들 사이의 침묵을 깨뜨리는 한 마디가 들려왔다.
“공작님은 눈이 예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