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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일기 1권(4화)
2. 미래일기(4)
막상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처음 보는 사이라 그리 말을 나눌 필요를 못 느꼈다. 결국 삭막한 분위기가 점점 영원과 그 소녀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이사 왔다고 했나? 입학식에 맞춰 온 거야?”
“그렇다고 생각해야겠지.”
“어디서 온 거야?”
“광주 쪽에서 온 거야.”
“광주라고? 그 먼 곳에서 서울로? 부모님이 직장을 옮기신 거야?”
“음…….”
침묵을 못 이겨 말을 꺼낸 영원이었지만, 혹시 질문이 무례한 것이었는지 걱정하게 되고 말았다. 여자를 만난 경험이 없는 자신이 생각해도 처음 보는 상대에게 이런 것을 물어보는 것은 조금 아니라고 생각된 것이다. 거기다 안 그래도 민감한 여자에게 말이다.
“부모님은 없어. 돌아가셨거든.”
하지만 역시나라고 해야 할까?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였다.
“아…… 이런. 미안, 내가 결례를 저질렀군.”
“아니, 괜찮아. 넌…… 교복을 보니 서정 고등학교야?”
역시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소녀는 급히 화제를 돌렸고, 그것에 눈치 챈 영원이었지만 그저 그녀가 하는 대로 따라갔다.
“그렇지, 서정 고등학교 3학년 6반 황영원이야.”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은 듯했다. 영원은 다시 한 번 무례가 되지 않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먼저 이름을 밝혔다.
“음! 이런 우연이! 나도 내일부터 서정 고등학교를 다니게 됐어. 물론 3학년이고. 이름은 한나연이라고 해.”
영원은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외모로는 도저히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워서 존대를 하지 않고 있었지만 혹시 나이가 더 많은 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있었던 참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통성명을 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영원과 나연은 벌써 야심한 시각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버스 종점에 도착했다. 매캐한 매연 냄새와 각종 술집들의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버스 종점 앞의 환경은 아까 전 어두웠던 공원과는 매우 비교되었다.
“음…… 이거 우리 동네의 앞면과 뒷면이군.”
“그렇네……. 그보다, 혹시 괜찮으면 거북 초등학교까지 부탁해도 될까?”
“거북초? 그럼, 괜찮아.”
거북 초등학교는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자신의 모교였다. 미래에서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리가 익숙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모교까지 잊어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종점의 위의 얕은 오르막길로 올라가기 시작한 우리는 오 분도 채 되지 않아 약간 낡은 초등학교를 볼 수 있었다. 비록 최근에는 강당이 건축 중이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 보기에는 꽤나 낡아 보이는 학교였다. 운동장의 연갈색의 빛깔은 저녁이어서 그런지 푸른색으로 변해 있었고, 간간이 운동장에서 조깅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우리 집은 이쪽이야.”
“그래? 같이 가 줄까?”
“으음……. 그래 주면 고맙지. 사실 이 주변도 잘 모르거든…….”
침음성을 흘리며 눈을 획 돌리는 나연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는 영원이었다.
그러고 나서 나연과 그녀의 집으로 향한 영원이었다. 하지만 나연의 기억력에 문제일까, 아니면 이 주변의 지리가 어려운 탓일까. 거북 초등학교에 도착한 지 20분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거북 초등학교의 바로 옆에 있는 나연의 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3층 건물……. 부럽군.”
도착하자마자 영원이 입 밖으로 낸 것은 이것이었다.
솔직히 영원의 집도 꽤나 좋았다. 50평에 지하실과 다락, 그리고 넓은 마당도 있는 집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만, 도저히 나연의 집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언제 지어졌는지, 초등학교 때는 본 기억이 없는 저택 같은 3층의 서양적 분위기를 풍기는 건물이 바로 나연의 집이었다. 마당이 좁기는 했지만 서양식으로 지어진 나연의 집은 충분에서 넘쳐날 정도로 커 보였다. 솔직히 말해, 부모님이 없다는 말에 빈곤할 것이라 생각하던 영원의 생각은 철저하게 막혀 버리게 돼 버렸다.
“우리 집도 크지만 이건 비교가 안 돼.”
“고마워. 부모님이 주신 유산이 꽤 있어서 말이야. 비록 지금 당장은 내가 쓰지 못하지만.”
“그렇군…….”
영원은 불이 꺼져서인지 약간 귀신이 나올 법한 느낌을 풍기는 저택을 보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이렇게 보면 귀신 저택 같지만, 분명 아침이나 해 질 녘에 보면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절경이 펼쳐질 것이리라.
“그래, 알았어. 그럼 학교에서 보도록 하자. 네가 우리 학교라니 학교 친구들의 반응이 재밌을 것 같아.”
“그래? 후훗. 그래 그럼, 월요일에 보게 되겠지. 그런데 혹시 폐가 되지 않는다면 내일도 도와줄 수 있을까?”
“내일?”
벌써 새벽 1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며 발걸음을 옮기려던 영원은 다시금 멈춰 서 나연을 바라보았다. 혹시 길 안내라도 부탁하는 것일까?
“이삿짐이 여간 많은 것이 아니라서 말이지…….”
“그래? 그 정도는 뭐. 남는 것이 시간이니까.”
“알았어. 그럼! 내일 아무 때나 집으로 와 줘!”
손을 흔들며 잘 가라는 나연의 배웅에 미소를 지으며 영원은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미래에 와서 처음으로 얻은 신기한 인연이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영원은 빠르게 집을 향해 걸어갔다.
집에 도착한 후 영원이 한 일은 곧장 아버지의 서재로 향하는 것이었다. 자주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였지만, 언제나 서재만은 소중히 다루셨던 분이어서 그런지 이사를 해도 서재는 언제나 집에 있었다.
끼익!
오랫동안 문을 열지 않았는지 나사가 끼릭 하는 묘한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서재는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책장에 둘러싸여 있는 방이다.
방 중앙에는 검갈색의 책장과 그것과 잘 어울리는 나뭇결이 느껴지는 향나무 책상이 있었고, 그곳의 앞에 앉기 위한 가죽의자가 있었다. 만년필과 연필 몇 자루, 그리고 오른쪽 자리에 서랍이 있는, 정말 불필요라는 단어가 필요 없는, 필요한 것들만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별로 방음이 되는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주위의 소리가 점점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왔다.
“아버지…….”
눈을 약간 감으며 고개로만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부터는 많이 볼 수 있겠지만 과거에 힘들 때는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아버지였다.
지금은 살아 있지만 당시에는 더 이상 볼 수 없었으니까, 언제나 그리워했고, 언제나 도와주길 원했던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의 몇 없는 발자취가 느껴지는 서재를 둘러보며 영원은 그리움에 잠긴 듯 눈을 살며시 감았다.
“합!”
팍팍!
숨을 한 번 크게 들여 마시며 볼을 두어 번 강하게 쳤다. 잡념에서 깨어나면서 가방 안에 들어 있는 한 권의 일기를 꺼냈다.
오늘 아침부터 다짐한 일이었지만, 영원은 지금부터 바뀌려고 한다.
아니, 바뀌어야만 했다.
다시는 회색빛으로 펼쳐져 있는 그 우울한 세계에 가고 싶지 않았다. 달랑 자신의 정신만이 미래에서 왔다면 어떠한 결심을 하든지 실패했으리라. 하지만 지금 자신에게는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고, 확실하고, 그리고 가장 강력한 물건을 갖고 있었다.
이 일기로써 자신은 변화할 수 있는 것이었다. 비록 난제도 많을 것이고, 난문도 많을 것이다. 수많은 적들이 생길지도 모르고, 뼈를 깎는 고통을 느껴야 할지도 몰랐다.
“벌써 최악의 상황을 경험해 왔던 나야. 그런 각오는 벌써 되어 있어.”
주먹을 터질듯이 강하게 쥐며 나무 책상 위에 올려놓은 일기를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영원은 일단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수백 권의 일기들을 챙겼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서재로 돌아갔다.
아까 전 나연과의 만남에서 갑작스러운 일기의 변화처럼, 아직 이 일기는 많은 사각지대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각지대와 가능성이 얼마나 넓을지는, 얼마나 클지는 아직 영원도 확실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그것을 알려고 했다. 아니, 알아야만 했다.
“일단 이 몇 백 권의 일기를 보관할 장소가 필요해.”
아무리 생각해도 일기의 보관이 우선이었다. 비단 타인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들키지 않아야 했다. 물론, 일기가 들키면 여러모로 귀찮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다른 이유는 자신의 주위의 사람들이 다치는 것이 싫어서였다.
지금부터 영원은 위험한 일도 많이 해야 할 것이고, 사업을 시작하면 여러 사업적 적들도 생길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주변의 사람들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게 된다. 게다가 만약 내 지인들이 이 일기에 대해 알게 된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알게 된 나의 주변의 사람들이 위험해질 것이 분명했다.
“이런……. 이 부근에 있을 텐데…….”
깊은 생각에서 깨어나 책장의 책을 하나하나 빼고 있는 영원이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깨끗하고 단정되게 정리되어 있었던 서재였지만, 영원이 찾는 것 때문에 벌써 어질러진 지 오래였다.
툭!
그렇게 책장의 책들을 모두 엎어 버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원은 손에 무엇인가가 걸리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쇠였지만 무엇인가 매끈한 손잡이를 연상하게 하는 것이었다.
“찾았다.”
그것은 한 가지 패턴으로 3가지 비밀번호를 지정할 수 있는 구식의 자물쇠가 걸려 있는 금고였다. 책장의 뒤에 시멘트벽을 살짝 파 놓고 그곳에 금고를 넣은 후 책들로 숨겨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영원이 금고를 찾은 이유는 단 한 가지.
“두 달분만 빼놓고 넣어야겠군.”
바로 일명 ‘미래일기’를 숨기기 위함이었다. 이 낡은 금고는, 말할 것도 없지만, 아버지의 것이었다. 금고라고 하더라도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비밀장부나 금괴가 들어 있지 않고 아버지의 개인 수첩과 약간의 비상금, 그리고 어머니 몰래 숨겨서 모아 놓은 금붙이들. 보통 가정이라면 그냥 옷장 깊숙이 숨겨 놓을 것을 아버지는 왜인지 금고를 사용하였다. 뭐, 어찌 됐든 그것은 지금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
끼릭 끼릭.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다 보니 자물쇠를 돌리는 것에 꽤나 애를 먹었다. 약간 녹이 슬었는지 돌릴 때마다 거무칙칙한 재 같은 것이 떨어져 나왔다. 언제 한번 기름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영원은 계속 레버를 돌렸다.
그렇게 몇 번 비밀번호가 틀리고 3번째 됐던 때, 영원은 드디어 묵직한 쇳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됐다.”
자물쇠의 비밀번호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간단했다. 아버지, 어머니, 그다음 나의 생일 순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3번 틀렸던 이유도 그 패턴을 알기 위해서였다. 뭐, 집에 있는 것이 손에 꼽힐 정도로 적은 아버지였지만, 이런 것을 보면 언제나 가족을 아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털컹!
공기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분명 형광등을 켜 놓았을 텐데 금고 안은 마치 빛의 침입을 용서 못하는 듯이 어두웠다. 휴대폰으로 빛을 밝히고서야 간신히 내용물을 볼 수 있었다.
일기의 양이 금고의 부피보다는 훨씬 더 커서 일기를 모두 집어넣기 위해 가지가지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결국 포기하고 가능한 만큼만을 집어넣었다. 아직 남은 것이 꽤나 있었지만 그건 차후에 생각해 봐야 할 일이었다.
끼익! 쿵!
금고를 닫은 후 다시 어질러진 책을 순서를 생각하지 않고 대충 치웠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밤이 늦었다. 부지런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영원은 남은 일기들을 두 손으로 잡은 채 일어났다.
“자, 이제 시작해 볼까?”
책상 위에 일기들을 내려놓은 후 영원은 자리에 앉았다. 이번 달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는 일기를 꺼낸 영원은 책의 옆면을 살며시 놓으며 필요한 페이지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