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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일기 1권(10화)
4. 레지스(Regis)(2)


“자자! 이 공식은 무조건 시험에 나온다! 별표!”
거의 모든 학교에서 선생님들, 혹은 교생들이 입에 올려 보았을, 수십 년 전통의 말을 내뱉으며 한 늙은 남성이 칠판을 툭툭 건드렸다. 하지만 순진한 학생들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선생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노다지라도 되는 것처럼 정확하게 필기를 하면서 핏빛의 붉은 색연필로 별표를 좍 그렸다.
“하아암…….”
하지만 그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영원만이 의자를 넘어질듯 안 넘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균형을 맞추며 하품을 내뱉고 있었다. 모두들 수업을 경청하며 한 번 영원을 째려보았지만, 뭐라 말해 주기도 귀찮은지라 다시 고개를 획 돌리며 마치 신흥종교에 빠진 신자처럼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어차피 시험문제는 모두 알고 있어. 거기다 고등학교 레벨의 수업 따위…….’
이제 곧 기말고사가 다가왔다. 하지만 영원은 별로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미래에, 즉 20년 후에는 한국의 교육 등급이 심하게 높아진다. 외국에서 고등학생이 배울 내용을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이 배울 정도로 말이다.
학생들이 그렇게 되다 보니 직업을 갖고 있는 중년층들도 어쩔 수 없이 수험생과도 같이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고등학교 수업은 쉽다는 레벨이 아닌 원래 알고 있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거기다 지금 자신은 그 무엇보다 일기가 있지 않은가. 시험문제 따위는 벌써 모두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모르는 반 친구들로서는 그가 미친놈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황영원……. 드디어 미쳤나?’
‘저 녀석…… 실업계나 갈 것이지 왜 인문계로 와서 난리야…….’
‘휴우……. 최근에 활발해져서 좀 달라졌나 했더니 더 심해졌군.’
수능시험과 입시준비 때문에 공부에 찌들 대로 찌든 아이들은 영원의 미쳤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행동에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그들도 영원처럼 놀고 싶었다. 그가 너무나도 부러웠다. 하지만 미래를 위해서 도저히 그럴 수 없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몰랐다. 영원이 지금부터 고3까지의 모든 시험의 답과 문제를 알고 있다는 것을.
‘뭐, 굳이 시험을 잘 볼 필요도 못 느끼겠고.’
그렇다고 아는 문제를 일부러 틀리는 취미는 없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모두 알고 있는 것이었고, 시험문제는 공책에 적혀 있었다. 물론, 국어처럼 지문이 긴 것은 문제만 적혀 있었지만, 그것이 없어도 영원은 충분히 1등급을 받을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
“후후후.”
선생님의 말을 하나라도 더 듣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아이들 사이로 기분 나쁜 웃음이 흘러나왔다.

지이잉!!!
서정 고등학교로부터 200m 정도 떨어져 있는 상가의 옥상.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검은색 옷으로 치장하고 있는 한 남성이 서정 고등학교를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200m를 육안으로 관찰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남성의 손에는 자동으로 길이가 조절되며 특이한 기계음을 자아내는 러시아제 군용 자동 전자 망원경이 들려 있었다.
“별로 특이할 건 없군.”
그렇게 관찰하기를 부동자세로 몇 시간, 한 치의 움직임 없이 오직 부동자세로 망원경을 들고 서 있었던 남성이 그의 손에 들린 망원경을 땅에 내려놓은 가방에 넣었다. 몸을 몇 번 움직이던 그는 서정 고등학교를 한 번 바라보다 더 이상의 관찰이 무의미함을 예상하며 마지막으로 관찰을 중지할 것을 결정했다.
지지직!
그렇게 굳은 몸을 몇 번 움직이던 그는 목에 손을 살짝 얹었다. 그러자 약간의 잡음이 공기와 섞이기 시작했다.
“본부, 응답 바람.”
그의 왼쪽 허리춤에 매달아 두었던 조그마한 수신기가 전자음을 자아내며 약간 울렸다. 그 울림이 목에 걸려 있는 수신기로 연결되었다.
“여기는 범블비(Bumblebee). 일기로 보이는 물건은 일체 발견되지 않음. 이대로 소년을 추적해 의뢰를 수행하겠음.”
―범블비의 판단에 의뢰를 양도한다.
목 주위에 걸린 수신기에서 범블비만이 들을 수 있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정말 일말의 감정이라고는 없게 들리는 그런 무감정적인 목소리였다. 그 무기질적인 음성은 언뜻 듣기에는 분명 여성 특유의 미성이었지만, 단 하나의 감정도 용납되지 않은 듯 감정이 고갈되어 버린 목소리에서는 성별을 특정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안부를 물어보거나, 약간의 장난도 치지 않은 채로 그들은 수신을 끝냈다.
“라져.”
지직!
그 인간미라는 것이 결여되어 버린 무전기 너머의 목소리에 긍정을 고하며 범블비는 발걸음을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곳에 들려야 할 일말의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제 붉은 노을이 점점 오랜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저녁노을. 구름에 수를 놓는 그 모습은 절경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하지만 영원은 단 일 초의 사색에 빠지지 않은 채로 교문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표정이 그리 경직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눈빛에서는 무언가 비장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툭!
영원이 자신의 집으로 가는 약간 어두침침한 골목길로 들어서자 검은색 신형이 자신을 막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검은색 천으로 감추고 있는 그였지만 영원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예비하고 있었다.
“훗.”
그렇게 영원은 키가 매우 큰 흑색의 남성을 올려다보며 기분이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미소를 지었다.
“범블비 씨?”
“……?!”
갑작스럽게 영원의 입에서 자신의 조직의 코드명이 나오자 남성은 그 무기질적인 표정을 단숨에 일그러트리고 말았다.
그의 이름은 범블비. 그의 직업은 다름 아닌 킬러였고, 그의 이름은 의뢰주와 자신이 속한 조직의 수뇌부밖에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한낱 이 평화로운 나라의 소년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니. 범블비는 약간의 충격을 느끼고 말았다.
“날 어떻게 알고 있지?”
이제 해가 져 버려서 영원의 얼굴은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지만, 영원은 아직도 기분 나쁜 미소를 거두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남의 물건을 강탈하는 사람에게 말할 이유는 없군요!”
“날 아는 이상, 죽어 줘야겠다. 원망하진 말아 다오.”
철컥!
범블비는 단숨에 감정을 추스르며 차가운 검은색 총구를 영원에게 들이밀었다. 사실 의뢰를 받은 것만 해결하고 이 소년은 굳이 죽이지 않을 예정이었지만, 일이 틀어져 버렸다. 그는 위험인물이라고 자신의 킬러로서의 오랜 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런, 범블비 씨. 꽤나 유능한 전투원인 주제에 주위를 살피는 방법은 모르나 보죠?”
죽음이라는 공포가 눈앞까지 드리워졌건만 하나 동요 없이 총구를 바라보는 영원에게는 경직은커녕 안정감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것도 아닌 미소가 흘러나왔다.
“덥쳐!”
“뭣?!”
갑작스러운 고함 소리와 함께 그의 전후좌우. 하물며 위에서까지도 수십 명의 험악한 인상의 우람한 체격을 가진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아무리 불시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범블비는 놀랍도록 숙련되어 있는 전투원이었다.
경악의 외침을 터트렸지만 단 0.1초도 안 되는 사이에 뇌를 차갑게 식히고 다시 총구를 자신이 죽여야만 하는 타깃에게로 향하게 하였다.
“후훗.”
하지만 그의 타깃, 즉 영원의 신형은 벌써 옆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영원은 곧장 몸을 틀고 옆으로 뛴 것이었다.
사실 범블비와 영원의 격차는 매우 컸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물리적인 범위 내에서였다. 범블비는 세계에서도 뛰어난 힘을 갖고 있는 전투원이었지만, 영원은 그 힘의 종류에서 물리적인 범블비의 힘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정보’라는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제길!”
상대를 얕보아서 몸을 드러내 버린 것에서 비롯된 너무나도 초보적인 실수, 하지만 아직 임무 실패라고 말할 정도로 일이 커진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범블비는 지금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지금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자들의 훈련 상태는 최악이었다. 포위망에 허점이 보였고, 자신의 옆으로는 자물쇠가 녹슨 문이 하나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빠른 상황 판단이 끝나자 범블비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범블비는 체중을 실어서 발로 자물쇠가 녹슨 문을 박차고, 그 안으로 마치 치타의 움직임과도 같이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자신에게 달려들어 오던 포위망은 부서졌고, 범블비는 부서진 문을 빠르게 닫으며 닫힌 문과 바닥에 쇠로 만들어진 막대기를 하나 걸쳐 놓았다. 이것이 단 3초. 단 3초 만에 이루어진 일에 포위망을 구축하던 영원 쪽의 사람들은 범블비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영원은 마치 예상을 했다는 듯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우락부락한 남성들에게 말을 걸었다.
“자, 청룡파 형님들은 여기까지 해 주십시오. 모두 아까 전 말씀드린 대로 시내 쪽의 분들이랑 합류해 주세요.”
“알았다.”
그렇다. 영원이 지금 다루고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청룡파에서 주먹 좀 쓴다던 유시후가 호언장담한 부하들이었다. 사실 이들이 이곳에 온 것은 다름 아닌 영원과 유시후와의 일종의 거래 때문이었다.
유시후의 목숨을 살려 주고 기울어 가던 청룡파를 다시 살려 준 것에 영원이 요구했던 것은 바로 청룡파의 무력적인 힘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그들이 영원의 말만으로 움직일 리 없다는 것을 영원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쓴 것은 유시후의 명령과 자신의 넘쳐나는 재력. 돈을 조금 사용해서 그들을 고용하는 방식으로 청룡파 조직원들을 부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물론 유시후는 흔쾌히 허락했고, 청룡파 조직원들은 몇 백만 원대의 의뢰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좋았다.
이리되었든 저리되었든, 지금 영원은 ‘미래일기’와 유시후의 조직원들의 힘으로 자신에게 온 의문의 킬러로부터 죽임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억압할 수 있게 되었다.
“범블비 씨, 당신은 나에게 잡히는 미래예요. 포기하세요.”
묘한 기운을 내뿜으며 영원이 다시금 미소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