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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일기 1권(13화)
4. 레지스(Regis)(5)
영원은 아버지의 서재의 가죽의자에 지친 몸을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
물론 언제나 느낀 것이었지만, 이 일기라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양날의 칼이랄까, 지금 당장은 자신에게 재물과 연줄, 그리고 신변을 보호해 주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남의 손에 들어간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장면이 연출될 수 있었다.
아직 위험도가 높아서 실험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일기는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도 자신에게서와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신변뿐만 아니라 세계의 경제가 멸망할 수 있는 큰일이 될 수도 있었다.
“후우…….”
유시후와의 면담이 끝나고 영원은 꽤나 큰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지만, 사실 레지스라는 조직을 생각하면 그 자신감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계 최고 강대국인 G7의 압박을 피하고, 오히려 그들의 경제에 암중에 영향을 주는 조직이었다. 미래일기로 레지스에 관한 것을 찾아보아도, 거대한 힘과 복잡한 무언가에 막혀서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그만큼 그들이 영원에게는 천적과도 같은 것이리라.
꾸륵.
아무리 고민이 되도 몸이 배가 고프다고 말하는 것은 숨길 수 없었는지 배에서 꾸륵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하교 후에 유시후가 내온 차와 다과를 제외하고는 무언가를 먹은 적이 없었다.
부엌으로 향한 영원은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렸다. 범블비를 잡기 위해 곳곳을 뛰어다니고 무전기로 연락하느라 진이 다 빠져서 지금부터 밥을 차리고 반찬을 꺼낼 기운도 없었던 것이었다.
스윽.
영원은 부엌의 바로 옆에 있는 자신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서재의 금고에 보관하지 못한 일기들이 캐비닛에 담겨 있었다.
필요 없는 이 시대의 내가 쓴 일기들과 나에게 지금 당장 필요 없는 과거의 일기들은 모두 대충 숨겨 두었다. 하지만 저 캐비닛 안에 있는 것은 언젠가 필요하게 될 내용들이 적힌, 아까부터 말한 자신의 양날의 검이 되는 것들이었다.
보글보글.
어느새 끓기 시작했는지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물에서 보글거리는 물방울 기포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근 들어 자주 사색에 잠긴다는 생각이 든 영원이었지만 가볍게 넘기며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후루룩.
“쩝쩝. 음……. 오랜만에 먹으니 또 맛있네…….”
매일 먹다시피 해서 그런지 라면은 꼴도 보기 싫었던 영원이었지만 또 오랜만에 먹으니 그런대로 맛있었다.
영원은 지친 몸임에도 불구하고 라면에 밥까지 말아서 꽤나 포식을 했다. 분명 힘들어서 반찬을 꺼내지 않았는데, 어느새 테이블 위에 반찬들이 놓여 있었다.
“음……. 잘 먹었다. 대충 정리해 놓고 또 일기를 확인해야지.”
퉁! 퉁!
영원은 불룩 튀어나온 배를 손으로 몇 번 쳐 보았다. 물소리가 나는 배를 보며 한 번 피식 웃은 영원은 소화할 겸 반찬 정리를 하였다.
그렇게 짧지만 행복한 식사 시간이 지나자 영원은 다시 서재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낡은 공책을 한번 진득한 눈빛으로 바라본 영원은 그대로 일기의 페이지를 넘겼다.
“어라?”
그새 내용이 바뀌었는지 아까 전에 확인한 것과 다소 내용이 달랐다. 아까 전에 펴져 있던 페이지에는 범블비가 어째서 자신을 습격한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지금은…….
“허…… 헉!”
순간 영원은 헛바람을 들이마시며 일기를 노려보았다. 일기에는 도저히 영원은 생각 못했을 거대한 사업이 적혀 있었다. 물론 고등학생은 법적으로 사업과 일을 못했다. 하지만 이 내용대로 행동하면 영원은 충분히 엄청난 돈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유시후 형님에게 전화해야…… 헛!”
순간 영원은 벌써 형님이라는 말이 입에 붙은 것에 놀라며 한 번 입을 확 막았지만, 그러려니 하며 재빨리 휴대폰의 다이얼을 눌렀다.
“형님한테 미안한 일도 했겠다. 그리고 형님이 그쪽 일에서 손을 뗐으니, 내가 조직을 운영할 수 있게 일을 줘야지. 후후후.”
영원은 일기의 내용을 내려다보며 한 번 웃었다. 일기의 제목에는 ‘4대강 사업 추진’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5. 사업(1)
사실 청룡파는 영원과의 만남 이후 꽤나 세력이 줄어들었다. 물론, 조직원들에게 잘해 주는 새로운 보스인 유시후와 그가 갖고 있었던 동양에서의 네트워크로 조금씩 회복 중이었지만, 불법으로부터 일절 손을 씻은 유시후여서 국내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이라고는 종로와 일산의 업소 몇 개와 나이트클럽 두세 개뿐이었다.
“끄응…….”
영원의 앞에서는 언제나 괜찮은 척하는 그였지만, 세력 다툼이나 지역 다툼, 그리고 마약 판매 등등의 불법적인 돈벌이가 사라지자 청룡파의 활동이 꽤나 부진해졌다. 말이 좋아 회복이었지, 곽현진이 저질러 둔 일들이 너무 커서 유시후로서는 어쩔 수 없이 골머리를 썩일 수밖에 없었다.
띠리링!
탈칵.
“누구쇼.”
머리가 지끈거리자 자신도 모르게 상대가 들으면 불쾌해질 수 있는 인사를 해 버렸다. 하지만 벌써 해 버린 인사, 철회할 수 도 없다.
―아, 유시후 형님. 저 영원입니다.
“응? 아, 영원이구나. 미안하다, 지금 뭘 생각하고 있어서 말이 좀 거칠었구나.”
마침 문제의 원인이자 근본 적인 문제의 해결책이었던 자의 전화가 걸려왔다.
유시후는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며 전화에 대답을 했다.
“집에 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연락을 했냐. 오늘 피곤했을 텐데 좀 쉬지.”
―아니요. 시후 형님에게 급히 말해 줄 이야기가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급히?”
유시후는 무언가 기쁜 듯이 이야기를 하는 영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원이 자신에게 기쁜 듯이 이야기를 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었다. 아니, 그러고 보니 하나 있었다.
“설마…… 사업 이야기니?”
―역시 형님이시네요. 그냥 사업 이야기도 아니고 꽤 큰 이야기예요. 그리고 이 일은 유시후 형님이 또 음지에서 움직여 주셔야 하는 일이에요.
기대가 틀리지 않았다.
영원이 말한 것은 역시나 사업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이 다른 기업인들처럼 사람을 속이는 쩨쩨한 것이 아니라 굳은 몸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이쪽 세계의 일이란다.
“그래, 무슨 일이냐. 손발이 근지럽구나.”
요즘에는 청룡파의 정찰조만이 움직이고 있는 실정이기에 비단 자신뿐만이 아니라 조직원들도 온몸이 근질거릴 것이었다.
조직원들도 청룡파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유시후의 앞에서는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도 지금쯤 심심해서 죽을 지경일 것이다.
―4대강 사업이 6월 달에 시작됩니다. 4대강 사업은 알고 계시죠?
“물론. 그…… 한국 4개의 강에 관광시설을 만들고, 강에다 길을 뚫는 거 아니냐?”
4대강 사업이란 이명훈 정부가 실행한 사업 중 하나이다.
그리고 영원은 그것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네, 대략 그런 것이에요.
“하지만 그걸로 우리가 어떻게 돈을 번단 말이냐. 혹시 정부랑 싸우는 거면 장난으로도 생각하지 말거라…….”
―당연히 아닙니다. 음……. 그럼 제대로 된 내용은 다음 주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형님이 해 주실 것은 다름 아닌 그 4대강 주변의 거대 조직들과 제가 회담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뭐?”
유시후는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오해되어 물어보려고 했지만, 결국 돌아올 답은 똑같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지금 자신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누군가. 웬만한 고등학생은, 아니 산전수전 모두 겪은 자신보다 더 강한 기세를 가진 소년이었다. 헛소리를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4대강 주변의 조직들을 모으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자신이야 이득이 된다면 자존심에 상처가 가지 않는 선에서 뭐든지 할 생각이 있는 합리주의자였지만, 그놈들, 그러니까 골수부터가 깡패 정신으로 되어 있는 조직들은 생각이 달랐다. 가끔 같은 지역의 몇몇 조직끼리는 동맹을 맺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서로를 견제하기만 했다.
깡패 조직이라는 것들은 필요 없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자신들이 마치 천하무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결코 힘을 합치지 않았다. 만약 합치더라도 그 합쳐진 조직 내에서는 엄청난 불화가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영원은 4대강 주변의 모든 거대 조직들과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툭 건네듯이 부탁을 했던 것이다. 그게 사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4대강 주변의 거대 조직들. 이쪽 세계에 발을 담그지 않은 사람이라면 쉬이 예상이 안 가겠지만, 4대강 주변의 거대 조직들이라고 하면 전국의 모든 음지에서 일하는 조직들이 모이는 것과 동급의 일이었다.
“음……. 그래 그건 알겠는데, 쉽지 않을 거야. 아무리 내가 이쪽에서 이름 좀 날리고 있지만, 그들은 절대로 공존하지 않고 서로를 무너트리려고 노력하는 녀석들이니까.”
자신이 그런 종류의 인간이다 보니 그런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어떤 종류의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을 섭외하고 회담을 갖은 것은 힘들 것이리라.
―그건 걱정 마세요. 어찌 됐든 제가 다음 주중에 시간이 비면 연락을 드릴게요. 그동안 꽤나 바쁠 것 같아서요.
“그래 그러도록 해라. 으음……. 그보다 빨리 알고 싶구나. 최대한 빨리 알려 주거라.”
―걱정 마세요. 그럼 쉬세요.
“그래, 너도 빨리 쉬어라.”
간단히 휴식을 취하라는 말로 전화를 끊은 유시후는 쉬지 않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 정보통. 너 4대강 주변에 있는 놈들에게 연락해서 언제 한번 만나자 그래. 아, 강남 4대 조직에도 연락해 놓고.”
“네? 보스. 하지만 그 주변에는 꽤 유명한 놈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강남에도 연락을 하라니…….”
“시키는 대로 해. 중요한 일이다. 잘하면 우리 청룡파가 꽤나 크게 될 수 있어.”
“앗! 예! 그럼 보스가 말하신 대로 제가 정보 라인 돌려서 알아내 보겠습니다!”
“잘해 봐.”
유시후는 그나마 연락망이 넓은 수하 중에 ‘정보통’이라고 불리는 놈에게 명령을 했다.
보통은 세력 다툼을 할 때도 귀찮아하며 죽치고 나가지 않던 놈이었는데, 지금은 몸이 근질거리는지 말을 듣자마자 뛰쳐나갔다. 벌써 새벽이 가까워 오는데 말이다.
“형님,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유시후가 정보통을 불러 무언가를 시킨 것을 본 유시후의 오른팔 ‘넙치’는 무언가 일이 일어난 것을 예감하고 그에게 다가왔다.
언제나 날카로운 눈매를 갖고 있는 넙치였지만, 최근 너무나도 조용한 조직 생활에 약간 풀려 있는 눈매였다.
“넙치야, 넌 애들 데리고 종로에 가서 우리 업소 중에 회담할 수 있을 만한 좋은 설비를 갖춘 곳 찾아와 봐. 넓기도 넓어야 되지만, 실내 장식도 고급스러운 곳 말이야.”
“네? 아, 아니, 알겠습니다. 형님.”
순간 아무런 설명 없이 명령을 하자 갸웃거린 넙치였지만, 이내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곧장 종로로 향했다.
물론 지금 회담 장소에 대해 알아내는 것은 너무 늦은 시각이라 불가능했다. 하지만 넙치는 오랜만에 몸을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으음……. 영원이가 하는 일이니 뭔가 이유가 있겠지만, 한강을 빼고도 3대 강이면 20개 이상의 조직에 한강까지 더하면 25은 훌쩍 뛰어넘을 텐데. 도대체 그 위험한 녀석들을 데리고 뭘 하려는 거지?”
보통 중소 조직은 500∼1,000명 정도의 인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가장 큰 조직으로 알려진 강남의 4대 조직은, 조직의 업소나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을 제외하고도 3,000명 정도가 된다. 물론 청룡파는 지금 대략 2,000∼4,000명의 조직원들을 거느리고 있는, 강북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유명한 조직이었다. 하지만 만약 영원의 말대로 4대강 주변의 거대 조직들의 수를 모두 합하면 3만은 되었다.
유시후의 생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 이들이 힘을 합하여 무엇인가를 도모한다면 나라와 전면전을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무엇인들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었다. 물론 모일 수 있겠느냐마는.
영원이 말을 꺼낸 것이다. 혹시 이루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영원이라면, 무엇인가 또 저지를 수 있겠지. 후후.”
유시후는 또 무언가 유쾌한 일이 생길 것이라 예상하며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