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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꽃 1권
1화
#프롤로그
1월 1일, 서울에서 멀지 않은 조용한 공원묘지.
새해 새날이 밝았지만 잔뜩 찌푸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을 뿌릴 듯 스산했다.
인기척 없이 고요한 묘지의 가파른 언덕을 열심히 오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까만 망고 비니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까만 패딩을 입고 빨간 목도리까지 둘둘 싸매 눈만 빠끔 보인다. 언뜻 빨간 목도리를 한 까만 눈사람 같았다.
중턱쯤 도달한 정원이 잠시 멈춰 서서 확 트인 전망을 돌아보며 심호흡을 했다.
“후아-”
매서운 날씨에도 하얀 입김과 함께 땀이 송송 솟는다.
길을 따라 늘어선 키 큰 나무와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이름 모를 정원수들이 썰렁한 겨울 묘원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묘지 특유의 음습함은커녕 말 그대로 잘 정돈된 공원을 오르는 기분이었다.
잠시 산 아래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던 정원이 그새 느슨해진 목도리를 다시 여미며 걸음을 옮겼다. 고지가 눈앞이다.
“아빠, 나 왔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낸 정원이 싱긋 웃었다. 은선환. 일생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다 외로이 눈을 감은 그녀의 아버지였다.
그를 흔적조차 없이 허무하게 보내고 싶지 않아 정원은 없는 형편에도 굳이 매장을 고집했다. 한줌 재로 만들어 작은 납골당에 모시면 그녀 또한 세상에 갈 곳 없이 붕 떠버릴 것 같았다. 이렇게라도 잠시 찾아와 기댈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잠시 숨을 고른 정원이 매고 있던 가방을 내려 준비해 온 것들을 꺼냈다. 몇 가지 과일과 술. 단출하다 못해 썰렁한 차림이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생글거렸다.
“아빠 딸 착하지? 이 추운데 우리 선환 씨 좋아하는 술까지 챙겨오고. 열 아들 안 부럽지?”
일회용 컵에 술을 따라 올린 정원이 넙죽 절을 했다. 그리고 무덤 주변을 돌며 남은 술을 넉넉하게 부었다. 격식도 없고, 순서도 없는 제멋대로 간단한 차례였지만 그녀는 구김살 없이 씩씩하게 말을 이었다.
“아빠, 조금만 기다려. 내가 독립하면 상다리 부러지게 제사상도 꼭 챙겨 줄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이제 2년. 정원은 일 년에 두 번, 기일과 추석에 묘를 찾았다. 기일도 기억하기 좋다는 이유로 양력 날짜를 그대로 썼다. 그래서 새해 첫날인 오늘이 아빠의 기일이었다.
변변히 제사를 모시지도 못하고, 자주 찾을 만큼 넉넉한 형편도 아니었지만 정원은 딱히 연연하지 않았다. 언제 어느 때고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살아생전 선환도 그랬고, 정원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상에 올린 사과를 덥석 베어 물고 주절주절 근황을 떠들던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응? 우와! 아빠, 눈 온다.”
팔락거리는 눈을 보고 반갑게 탄성을 지른 것도 잠시, 정원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헐, 길 미끄러워지기 전에 내려가야겠네.”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한 그녀가 밤과 대추를 잘게 부숴 풀숲에 뿌리며 씩씩하게 외쳤다.
“고수레!”
손을 털고 돌아서던 정원이 흠칫 몸을 굳혔다.
‘헛! 노, 놀래라.’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맣고 얼굴만 하얀 키 큰 남자였다.
‘일단, 귀신은 아닌 거 같고…….’
남자가 서 있는 곳은 길게 늘어선 무덤들의 중간쯤이었다. 새해 첫날 인적없는 공원묘지, 다른 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마침 시선이 마주친 남자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순간 왠지 모를 무안함에 정원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야, 자기가 먼저 쳐다봤으면서…….’
그런데 정작 정원은 남자에게서 쉽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유별나게 튀는 독특한 분위기가 시선을 끌었다. 여태 눈치 채지 못한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분위기 묘하네.’
남자가 서 있는 무덤 앞에는 처연해 보일 정도로 고운 카라꽃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까만 드레스셔츠에 무심하게 걸친 기다란 캐시미어 코트, 까만 정장바지, 까만 구두, 까만 머리칼. 아무런 감정도 묻어나지 않는 시리도록 까만 눈동자. 그리고 예리해 보이는 하얀 얼굴, 하얀 카라 꽃다발.
정초부터 술병을 들고 묘원을 찾은 그녀도 평범하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뭔가 더 특별한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마침 불어온 바람에 남자의 기다란 코트 자락이 무겁게 펄럭였다. 왠지 시린 느낌에 정원이 무심코 어깨를 움츠렸다.
“읏! 춥다.”
어께에 내려앉은 눈송이들을 대충 털어낸 그녀가 가방을 단단히 고쳐 멨다. 서둘러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남자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석상처럼 미동도 않던 그가 불현듯 성큼 멀어져 갔다. 기묘한 타이밍에 정원도 움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뭐에 홀린 것처럼 남자의 뒤를 따라 종종 걸었다.
남자는 그녀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휘적휘적 무심하게 앞서 나갔다. 예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정말 모른다고 믿을 정도였다.
생각 없이 남자의 뒤를 쫓던 정원이 무덤가에 서 있는 까만 세단을 발견하고 문득 하늘을 보았다. 드문드문 초라하게 흩날리던 진눈깨비가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가 설핏 인상을 쓰며 낮게 투덜거렸다.
“헐, 갑자기 뭐니. 삐끗하면 바로 사망이겠네.”
탐스러운 눈을 감상하기엔 눈앞에 경사로가 아찔하게 까마득했다. 아직 많이 쌓이지는 않았지만 그대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 삑!
번쩍번쩍 광이 나는 고급 외제 차가 리모컨 소리와 함께 조용히 시동이 걸렸다. 운전석으로 돌아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원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기……요?”
남자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뭐, 뭐야. 무슨 눈빛이…….’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빈 동공이 이유 없이 먹먹하다. 예기치 않은 감상에 순간 당황한 정원이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낯선 남자의 무심한 시선에 애써 용건을 떠올린 정원이 어렵게 말을 이었다.
“저…, 요 아래 도로까지만 태워 주시면 안 될까요?”
“…….”
“안 그래도 가파른데 갑자기 눈까지 와서 내려가려니 깜깜하네요. 삐끗 하면 사망 내지는 중상……. 그게 그러니까, 그렇다고요. 하.”
두서없이 말을 뱉던 정원이 이어지는 침묵에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이왕 뱉은 말 그녀가 다시금 남자를 똑바로 보았다.
“저……, 안 될까요?”
정원이 순간 멈칫했다. 사람이 말을 하는데 저 무반응은 뭐란 말인가.
스치듯 닿기만 해도 새파랗게 묻어날 것만 같은 선연한 무엇. 가까이 하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은 무채색의 심연. 단정하고 예리한 외모만큼 부담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칫!’
그깟 차, 치사해서 안 타고 만다. 순간 불퉁 솟은 오기에 정원은 그냥 걸어 내려가리라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나저나 대답할 것도 아니면서 사람을 왜 저리 뚫어져라 보는 것일까. 괜히 머쓱해진 정원이 가방을 추스르며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뭐, 할 수 없죠. 실례했습니다.”
그녀가 전의에 불타는 눈으로 까마득한 비탈길을 노려보았다. 위험천만 미끄럽겠지만 설마 죽기야 하겠는가.
“타요.”
성큼 걸음을 옮기려던 정원이 예상치 못한 음성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남자가 여전히 표정 없는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정원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낮은 음성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타시죠.”
그새 차에 오른 남자가 보조석 창을 열고 그녀를 보았다. 난데없는 전개에 당황한 정원이 떠밀리듯 차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두껍고 무거운 문이 스르륵 소리도 없이 열린다.
“고맙습니다.”
넙죽 인사를 한 그녀가 바짝 긴장한 채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소리도 없이 스르륵 움직이는 차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가득 내려앉았다.
‘우씨, 괜히 탔어.’
왠지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에 정원은 바로 후회를 했다. 딱히 위험해 보이는 사람도 아닌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일까. 씩씩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은정원답지 않은 일이었다. 내심 심호흡을 한 그녀가 조심스레 눈동자를 굴렸다.
문외한인 그녀가 보기에도 함부로 만지면 안 될 것 같은, 이름도 알 수 없는 고급 세단이었다. 열선이 들어간 시트가 금세 따뜻해지며 얼었던 몸을 노곤하게 녹여준다.
자동차 특유의 잡냄새도 없이 따뜻한 나무 향이 은은하게 배어났다. 방향제와는 확연히 다른 향기에 무심코 옆에 앉은 남자를 곁눈질했다.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한 좁은 시야에 운전대를 잡은 길고 하얀 손가락이 보였다.
정원은 문득 그 향기가 옆에 앉은 남자에게서 나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지레 놀라 동그란 눈을 깜박거렸다.
‘헐, 니가 멍멍이니? 냄새가 뭐? 제정신이 아니야.’
낯선 남자를 상대로 이 무슨 해괴한 호기심일까. 당황한 정원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낯설고도 불편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자꾸 입술이 마른다.
올라갈 땐 한참인 것 같았는데 어느새 묘원을 빠져나온 차는 버스 정류장 앞에 도착해 있었다. 후다닥 차에서 내린 정원이 꾸벅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돌리지도, 다시 입을 열지도 않았다. 커다란 차가 언제 멈췄었냐는 듯 빠르게 멀어져 갔다.
멍하니 멀어지는 차를 보고 있던 정원이 흐릿한 시야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점점 굵어지는 눈발이 세상을 온통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동화 속, 눈의 나라처럼 환상적인 풍경이었지만 정작 그녀의 눈가엔 짜증이 더럭 묻어났다.
“어쩜, 어디까지 가냐고 한 번 묻지를 않니? 어차피 서울 가는 방향인데 가까운 전철역이라도 내려 주면 좀 좋아? 아무튼 있는 놈이 더하다니까.”
사람 마음이 참 간사했다. 차에 타고 있을 땐 불편한 마음에 얼른 내리고 싶더니 인적 없는 국도에 덩그러니 서 있자니 이유도 없이 서러워진다. 정원이 코를 훌쩍거리며 몸을 잔뜩 옹송그렸다.
“우씨! 얼어 죽겠네. 버스는 언제 오는 거야.”
산바람과 함께 짓쳐드는 눈발에 그새 빨갛게 언 볼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목도리를 단단하게 여민 정원이 점퍼에 달린 후드까지 푹 눌러썼다.
“쳇! 겉모습만 명품에 그림이면 뭐하냐고. 인간미가 없잖아, 인간미가. 아니 이 추운 날, 눈도 이렇게 많이 오는데, 연약한 여인네 혼자 언제 올지도 모를 버스를 기다리게 하고 싶니? 흥! 가다가 펑크나 나라.”
정원은 이제 보이지도 않는 차를 향해 한참을 구시렁대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렸다. 그렇게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1. 어느 봄날
겨우내 웅크렸던 공기가 기지개를 켜고, 여린 새싹들이 화들짝 깨어나 아른아른 눈을 어지럽히는 봄날. 하지만 설레는 봄을 맞이하는 정원의 마음은 영 편치가 않았다.
“아주 죽어라, 죽어라 하는구나.”
따스한 햇살에 꽁꽁 언 경기도 풀리면 좋으련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내 구인란을 훑어보던 정원이 낮게 중얼거렸다.
“잔인한 4월이라. 길이 없네, 길이 없어.”
딱히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림밖에 그릴 줄 모르는 그녀가 이제 와 번듯한 직장을 구하기란 역시나 요원해 보였다. 별다른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영 입 안이 쓰다.
“이봐, 은정원 씨. 과사로 오라니까 여기서 뭐 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현성이 손에 든 서류를 팔랑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는 너는 왜 거기서 나와?”
“내가 일단은 조교란 말이지. 하하.”
강현성. 졸업하면서 그림을 접은 그녀와 달리 대학원에 진학해 작업을 하고 있는 절친한 후배이자 전도유망한 청년 화가. 이번 학기부터 연구 조교로 일하고 있었다. 점심을 사 주겠다는 그의 꼬임에 오랜만에 학교까지 찾아온 정원이었다.
머리 싸매고 앉아 걱정한다고 당장에 직장이 구해지는 것도 아닐지니. 정원이 물고 있던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가볍게 말을 꼬았다.
“강현성이 별걸 다해. 갑자기 웬 조교? 그런 건 진짜 필요한 사람한테 양보하지?”
“알면서 왜 이러셔. 나라고 별수 있나.”
“가지가지……, 애쓴다.”
현성은 유서 깊은 명문 사학재단 이사장의 막내아들이었다. 일반적인 수순 따위 무시해도 좋을 배경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현성은 오히려 보란 듯 착실하게 과정을 밟았다.
빵빵한 집안에, 넘치는 능력에, 모델 뺨칠 정도로 훤칠한 외모까지. 자칫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조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성은 의외로 적도 많지 않았다.
선이 분명한 이목구비를 더욱 빛나게 하는 환한 미소 뒤엔 그만한 자신감과 배짱이 있었다. 소위 말하는 엄친아 강현성은 쉽게 무리의 중심이 되었고, 당연하게 인정을 받아내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1화
#프롤로그
1월 1일, 서울에서 멀지 않은 조용한 공원묘지.
새해 새날이 밝았지만 잔뜩 찌푸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을 뿌릴 듯 스산했다.
인기척 없이 고요한 묘지의 가파른 언덕을 열심히 오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까만 망고 비니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까만 패딩을 입고 빨간 목도리까지 둘둘 싸매 눈만 빠끔 보인다. 언뜻 빨간 목도리를 한 까만 눈사람 같았다.
중턱쯤 도달한 정원이 잠시 멈춰 서서 확 트인 전망을 돌아보며 심호흡을 했다.
“후아-”
매서운 날씨에도 하얀 입김과 함께 땀이 송송 솟는다.
길을 따라 늘어선 키 큰 나무와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이름 모를 정원수들이 썰렁한 겨울 묘원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묘지 특유의 음습함은커녕 말 그대로 잘 정돈된 공원을 오르는 기분이었다.
잠시 산 아래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던 정원이 그새 느슨해진 목도리를 다시 여미며 걸음을 옮겼다. 고지가 눈앞이다.
“아빠, 나 왔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낸 정원이 싱긋 웃었다. 은선환. 일생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다 외로이 눈을 감은 그녀의 아버지였다.
그를 흔적조차 없이 허무하게 보내고 싶지 않아 정원은 없는 형편에도 굳이 매장을 고집했다. 한줌 재로 만들어 작은 납골당에 모시면 그녀 또한 세상에 갈 곳 없이 붕 떠버릴 것 같았다. 이렇게라도 잠시 찾아와 기댈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잠시 숨을 고른 정원이 매고 있던 가방을 내려 준비해 온 것들을 꺼냈다. 몇 가지 과일과 술. 단출하다 못해 썰렁한 차림이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생글거렸다.
“아빠 딸 착하지? 이 추운데 우리 선환 씨 좋아하는 술까지 챙겨오고. 열 아들 안 부럽지?”
일회용 컵에 술을 따라 올린 정원이 넙죽 절을 했다. 그리고 무덤 주변을 돌며 남은 술을 넉넉하게 부었다. 격식도 없고, 순서도 없는 제멋대로 간단한 차례였지만 그녀는 구김살 없이 씩씩하게 말을 이었다.
“아빠, 조금만 기다려. 내가 독립하면 상다리 부러지게 제사상도 꼭 챙겨 줄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이제 2년. 정원은 일 년에 두 번, 기일과 추석에 묘를 찾았다. 기일도 기억하기 좋다는 이유로 양력 날짜를 그대로 썼다. 그래서 새해 첫날인 오늘이 아빠의 기일이었다.
변변히 제사를 모시지도 못하고, 자주 찾을 만큼 넉넉한 형편도 아니었지만 정원은 딱히 연연하지 않았다. 언제 어느 때고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살아생전 선환도 그랬고, 정원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상에 올린 사과를 덥석 베어 물고 주절주절 근황을 떠들던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응? 우와! 아빠, 눈 온다.”
팔락거리는 눈을 보고 반갑게 탄성을 지른 것도 잠시, 정원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헐, 길 미끄러워지기 전에 내려가야겠네.”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한 그녀가 밤과 대추를 잘게 부숴 풀숲에 뿌리며 씩씩하게 외쳤다.
“고수레!”
손을 털고 돌아서던 정원이 흠칫 몸을 굳혔다.
‘헛! 노, 놀래라.’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맣고 얼굴만 하얀 키 큰 남자였다.
‘일단, 귀신은 아닌 거 같고…….’
남자가 서 있는 곳은 길게 늘어선 무덤들의 중간쯤이었다. 새해 첫날 인적없는 공원묘지, 다른 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마침 시선이 마주친 남자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순간 왠지 모를 무안함에 정원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야, 자기가 먼저 쳐다봤으면서…….’
그런데 정작 정원은 남자에게서 쉽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유별나게 튀는 독특한 분위기가 시선을 끌었다. 여태 눈치 채지 못한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분위기 묘하네.’
남자가 서 있는 무덤 앞에는 처연해 보일 정도로 고운 카라꽃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까만 드레스셔츠에 무심하게 걸친 기다란 캐시미어 코트, 까만 정장바지, 까만 구두, 까만 머리칼. 아무런 감정도 묻어나지 않는 시리도록 까만 눈동자. 그리고 예리해 보이는 하얀 얼굴, 하얀 카라 꽃다발.
정초부터 술병을 들고 묘원을 찾은 그녀도 평범하지는 않았지만 남자는 뭔가 더 특별한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마침 불어온 바람에 남자의 기다란 코트 자락이 무겁게 펄럭였다. 왠지 시린 느낌에 정원이 무심코 어깨를 움츠렸다.
“읏! 춥다.”
어께에 내려앉은 눈송이들을 대충 털어낸 그녀가 가방을 단단히 고쳐 멨다. 서둘러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남자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석상처럼 미동도 않던 그가 불현듯 성큼 멀어져 갔다. 기묘한 타이밍에 정원도 움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뭐에 홀린 것처럼 남자의 뒤를 따라 종종 걸었다.
남자는 그녀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휘적휘적 무심하게 앞서 나갔다. 예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정말 모른다고 믿을 정도였다.
생각 없이 남자의 뒤를 쫓던 정원이 무덤가에 서 있는 까만 세단을 발견하고 문득 하늘을 보았다. 드문드문 초라하게 흩날리던 진눈깨비가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가 설핏 인상을 쓰며 낮게 투덜거렸다.
“헐, 갑자기 뭐니. 삐끗하면 바로 사망이겠네.”
탐스러운 눈을 감상하기엔 눈앞에 경사로가 아찔하게 까마득했다. 아직 많이 쌓이지는 않았지만 그대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 삑!
번쩍번쩍 광이 나는 고급 외제 차가 리모컨 소리와 함께 조용히 시동이 걸렸다. 운전석으로 돌아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원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기……요?”
남자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뭐, 뭐야. 무슨 눈빛이…….’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빈 동공이 이유 없이 먹먹하다. 예기치 않은 감상에 순간 당황한 정원이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낯선 남자의 무심한 시선에 애써 용건을 떠올린 정원이 어렵게 말을 이었다.
“저…, 요 아래 도로까지만 태워 주시면 안 될까요?”
“…….”
“안 그래도 가파른데 갑자기 눈까지 와서 내려가려니 깜깜하네요. 삐끗 하면 사망 내지는 중상……. 그게 그러니까, 그렇다고요. 하.”
두서없이 말을 뱉던 정원이 이어지는 침묵에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이왕 뱉은 말 그녀가 다시금 남자를 똑바로 보았다.
“저……, 안 될까요?”
정원이 순간 멈칫했다. 사람이 말을 하는데 저 무반응은 뭐란 말인가.
스치듯 닿기만 해도 새파랗게 묻어날 것만 같은 선연한 무엇. 가까이 하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은 무채색의 심연. 단정하고 예리한 외모만큼 부담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칫!’
그깟 차, 치사해서 안 타고 만다. 순간 불퉁 솟은 오기에 정원은 그냥 걸어 내려가리라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나저나 대답할 것도 아니면서 사람을 왜 저리 뚫어져라 보는 것일까. 괜히 머쓱해진 정원이 가방을 추스르며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뭐, 할 수 없죠. 실례했습니다.”
그녀가 전의에 불타는 눈으로 까마득한 비탈길을 노려보았다. 위험천만 미끄럽겠지만 설마 죽기야 하겠는가.
“타요.”
성큼 걸음을 옮기려던 정원이 예상치 못한 음성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남자가 여전히 표정 없는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정원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낮은 음성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타시죠.”
그새 차에 오른 남자가 보조석 창을 열고 그녀를 보았다. 난데없는 전개에 당황한 정원이 떠밀리듯 차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두껍고 무거운 문이 스르륵 소리도 없이 열린다.
“고맙습니다.”
넙죽 인사를 한 그녀가 바짝 긴장한 채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소리도 없이 스르륵 움직이는 차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가득 내려앉았다.
‘우씨, 괜히 탔어.’
왠지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에 정원은 바로 후회를 했다. 딱히 위험해 보이는 사람도 아닌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일까. 씩씩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은정원답지 않은 일이었다. 내심 심호흡을 한 그녀가 조심스레 눈동자를 굴렸다.
문외한인 그녀가 보기에도 함부로 만지면 안 될 것 같은, 이름도 알 수 없는 고급 세단이었다. 열선이 들어간 시트가 금세 따뜻해지며 얼었던 몸을 노곤하게 녹여준다.
자동차 특유의 잡냄새도 없이 따뜻한 나무 향이 은은하게 배어났다. 방향제와는 확연히 다른 향기에 무심코 옆에 앉은 남자를 곁눈질했다.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한 좁은 시야에 운전대를 잡은 길고 하얀 손가락이 보였다.
정원은 문득 그 향기가 옆에 앉은 남자에게서 나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지레 놀라 동그란 눈을 깜박거렸다.
‘헐, 니가 멍멍이니? 냄새가 뭐? 제정신이 아니야.’
낯선 남자를 상대로 이 무슨 해괴한 호기심일까. 당황한 정원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낯설고도 불편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에 자꾸 입술이 마른다.
올라갈 땐 한참인 것 같았는데 어느새 묘원을 빠져나온 차는 버스 정류장 앞에 도착해 있었다. 후다닥 차에서 내린 정원이 꾸벅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돌리지도, 다시 입을 열지도 않았다. 커다란 차가 언제 멈췄었냐는 듯 빠르게 멀어져 갔다.
멍하니 멀어지는 차를 보고 있던 정원이 흐릿한 시야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점점 굵어지는 눈발이 세상을 온통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동화 속, 눈의 나라처럼 환상적인 풍경이었지만 정작 그녀의 눈가엔 짜증이 더럭 묻어났다.
“어쩜, 어디까지 가냐고 한 번 묻지를 않니? 어차피 서울 가는 방향인데 가까운 전철역이라도 내려 주면 좀 좋아? 아무튼 있는 놈이 더하다니까.”
사람 마음이 참 간사했다. 차에 타고 있을 땐 불편한 마음에 얼른 내리고 싶더니 인적 없는 국도에 덩그러니 서 있자니 이유도 없이 서러워진다. 정원이 코를 훌쩍거리며 몸을 잔뜩 옹송그렸다.
“우씨! 얼어 죽겠네. 버스는 언제 오는 거야.”
산바람과 함께 짓쳐드는 눈발에 그새 빨갛게 언 볼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목도리를 단단하게 여민 정원이 점퍼에 달린 후드까지 푹 눌러썼다.
“쳇! 겉모습만 명품에 그림이면 뭐하냐고. 인간미가 없잖아, 인간미가. 아니 이 추운 날, 눈도 이렇게 많이 오는데, 연약한 여인네 혼자 언제 올지도 모를 버스를 기다리게 하고 싶니? 흥! 가다가 펑크나 나라.”
정원은 이제 보이지도 않는 차를 향해 한참을 구시렁대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렸다. 그렇게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1. 어느 봄날
겨우내 웅크렸던 공기가 기지개를 켜고, 여린 새싹들이 화들짝 깨어나 아른아른 눈을 어지럽히는 봄날. 하지만 설레는 봄을 맞이하는 정원의 마음은 영 편치가 않았다.
“아주 죽어라, 죽어라 하는구나.”
따스한 햇살에 꽁꽁 언 경기도 풀리면 좋으련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내 구인란을 훑어보던 정원이 낮게 중얼거렸다.
“잔인한 4월이라. 길이 없네, 길이 없어.”
딱히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림밖에 그릴 줄 모르는 그녀가 이제 와 번듯한 직장을 구하기란 역시나 요원해 보였다. 별다른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영 입 안이 쓰다.
“이봐, 은정원 씨. 과사로 오라니까 여기서 뭐 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현성이 손에 든 서류를 팔랑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는 너는 왜 거기서 나와?”
“내가 일단은 조교란 말이지. 하하.”
강현성. 졸업하면서 그림을 접은 그녀와 달리 대학원에 진학해 작업을 하고 있는 절친한 후배이자 전도유망한 청년 화가. 이번 학기부터 연구 조교로 일하고 있었다. 점심을 사 주겠다는 그의 꼬임에 오랜만에 학교까지 찾아온 정원이었다.
머리 싸매고 앉아 걱정한다고 당장에 직장이 구해지는 것도 아닐지니. 정원이 물고 있던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가볍게 말을 꼬았다.
“강현성이 별걸 다해. 갑자기 웬 조교? 그런 건 진짜 필요한 사람한테 양보하지?”
“알면서 왜 이러셔. 나라고 별수 있나.”
“가지가지……, 애쓴다.”
현성은 유서 깊은 명문 사학재단 이사장의 막내아들이었다. 일반적인 수순 따위 무시해도 좋을 배경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현성은 오히려 보란 듯 착실하게 과정을 밟았다.
빵빵한 집안에, 넘치는 능력에, 모델 뺨칠 정도로 훤칠한 외모까지. 자칫 시기, 질투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조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성은 의외로 적도 많지 않았다.
선이 분명한 이목구비를 더욱 빛나게 하는 환한 미소 뒤엔 그만한 자신감과 배짱이 있었다. 소위 말하는 엄친아 강현성은 쉽게 무리의 중심이 되었고, 당연하게 인정을 받아내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