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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아무튼 복 받은 놈. 내심 중얼거린 정원의 눈매가 사뭇 가늘어졌다.

옅은 갈색 꽁지머리는 여전했지만 명색이 조교라고 흰 셔츠에 반듯한 정장 차림이었다. 그조차도 의외로 잘 어울려서 얄미울 지경이었다.

약간 마른 듯 보여도 단단하고 늘씬한 골격이 화사하세 반듯하다. 올해도 그로 인해 설렐 신입생들이 눈에 선했다.

‘그럼 뭐하나. 그림의 떡인걸.’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예의바른 만큼, 그 이상 가까워지기 어려운 사람이 또 강현성이었다. 언뜻 스스럼없이 친절한 것 같아도 쉽게 곁을 내어 주지 않는다.

등록금 때문에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던 정원은 6년 만에 가까스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런 정원과 제대하고 막 복학한 현성이 같은 실기실을, 그것도 나란히 옆자리를 쓰게 된 것은 3학년 때였다.

그 전엔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덕분에 처음 얼마간은 사사건건 부딪치며 으르렁대기 바빴다. 극과 극으로 다른 환경과 성격 탓에 그야말로 한 학기를 몽땅 전쟁 치르듯 지낸 것이다.

하지만 자고로 옛말 그른 것 없다고, 미운정이 더 무서운 것은 고금불변의 진리였다. 지금에 와선 두 사람 모두 까칠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막역하게 지낼 만큼 너무나 익숙하고 편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정원이 불쑥 인상을 쓰며 편하게 투덜거렸다.

“현성아, 어디 괜찮은 일자리 없을까? 이 누나가 요즘 심각하시다.”

“잘나가는 과외 선생이 엄살은. 그 돈 벌어 다 어디 쓰려고?”

사실 정원은 학부 때부터 잘나가는 미술 과외 선생으로 유명했다. 남들은 취직 걱정이 한창이던 졸업 학기에도 그녀는 늘어나는 과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와 취직 걱정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농담 아니거든? 그 잘나가는 과외 선생 짤리셨다.”

현성이 그제야 눈썹을 휘며 정원을 돌아보았다.

“뭐? 어쩌다가.”

“나라고 뭐, 만년 잘나가겠니. 오래 하기도 했고, 어려워지면 일 순위로 정리하는 게 또 미술이잖아.”

“억척 은정원이 앓는 소리를 다 하고, 정말인가 보네.”

“내가 언제 그런 걸로 농담하디?”

“그렇게 심각해?”

“두어 팀 남았는데 그것도 아슬하네.”

말끝에 묻어나는 옅은 한숨을 놓칠 현성이 아니었다. 하지만 설핏 깊어지는 그의 눈빛에 정원은 새삼 가볍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누구는 팔자가 좋으셔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도 없지?”

“어허! 팔자가 좋아서 빌어먹기 딱 좋은 예술씩이나 하고 있겠냐.”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현성이 하고 싶은 일만 할 만큼 팔자 좋은 건,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지.”

“헐!”

현성은 불쑥 터져 나오려는 긴 한숨을 애써 삼키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게 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언제나 변함없이 항상 그랬다.

현성의 집안에 대해선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가 아무리 치열하게 작업을 해도 소위 부잣집 막내아들의 취미 생활 정도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그조차도 가볍게 무시할 만큼 실력이 받쳐 줬지만 애초에 현성은 그런 시선에 관심도 없었다. 가진 것도 능력인 시대가 아니던가.

타고난 성정도 그러려니와 예술가 특유의 개인주의 성향까지 더해져 현성은 타인에게 냉정할 만큼 무심했다. 사실 그의 조건과 외모 정도면 문제는커녕 그 또한 매력이 되었다.

하지만 정원은 누구와도 달랐다. 잘 포장된 차갑고 이기적인 그의 성격을 일일이 꼬집으며 거침없이 부딪쳤다. 넘치게 많이 가진 현성을 부러워하지도 않았고, 무언가 얻어내려 애쓰는 일도 없었다.

가진 것 하나 없으면서도 무식하도록 당당하고, 생긴 것과 다르게 겁 없고 씩씩한 것이 유일한 자랑이다. 그런 이유로 현성에겐 누구보다 어려운 사람이 또 정원이었다.

딱 거기까지. 단순, 명랑, 억척 은정원에게선 도무지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큰일이 닥쳐도, 당장 무너질 만큼 어렵고 힘들어도, 그녀는 항상 괜찮다고 말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마음이 쓰이는 것을 그녀는 알까.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를 보내고도 여전히 씩씩했고, 숨 막히도록 퍽퍽한 현실 속에서도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여자였다. 현성이 지금껏 보아온 은정원은.

솔직히 지금도 한마디면 될 일이었다. 더도 말고 딱 한마디면 당장에 해결해 줄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도 알고 그녀도 아는 사실이건만 정원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딴엔 편한 친구라고 엄살을 부리는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너무나 분명한 그 경계에 현성은 선뜻 손을 내밀지도 못했다. 가리는 것 없이 편한 성격처럼 보여도 그런 부분은 또 어찌나 까칠하신지 어설피 나섰다간 친구라는 위치도 위태로워진다.

내심 고개를 저은 현성이 농담처럼 포장한 속내를 비췄다.

“그러게 나한테 시집오라니까. 순도 백 퍼! 보증 수표가 여기 있는데 왜 사서 고생이야.”

정원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순간 무심하도록 투명하게 파고드는 그 눈동자에 현성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심 당황한 그가 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어허, 이 불량한 눈빛은 뭐지?”

“나, 그림 하는 남자 질색인 거 모르니? 그런데 강현성이는 그림 빼면 시체지, 아마?”

“내가 뭐 어디가 어때서? 사람을 그렇게 못 믿나?”

현성은 순간 울컥 짜증이 일었다. 매번 같은 대답인 것을 알면서도 항상 무언가를 기대하고 또 실망하는 자신이 싫어진다. 동그란 정원의 눈매가 샐쭉 가늘어졌다.

“믿을 걸 믿으라고 해. 멀쩡하니 능력 빠방한 여인네들이 몹쓸 환쟁이 만나 고생하는 걸, 내가 한두 번 본 줄 아니? 다들 뭐가 쓰이지 않고서야……. 현실감각 제로에, 꿈만 먹고 사는, 평생 철들 일 없는 인간들 뭐 볼 거 있다고. 쯧…….”

“그림 그리는 남자가 다 그렇다는 편견을 버려. 겪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냐.”

“넌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 봐야 아니?”

“어휴, 말하는 거 봐라. 누가 데려갈지 정말 걱정된다.”

“너한테 데려가라고 안 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셔.”

“남자가 있기는 하고? 더 늙기 전에 나한테 오라니까 그러네. 기회는 잡으라고 있는 거야. 놓치면 후회할 텐데…….”

“후회는 무슨 얼어 죽을! 그리고 내가 너를 몰라? 에비, 바람돌이 접근 금지!”

꿈쩍 않고 현성을 흘겨보는 정원의 눈매가 자못 매서웠다. 듣다 못한 현성이 버럭 인상을 썼다.

“얘가 또 생사람 잡네. 누가 바람돌이야? 나만큼 사생활 깔끔한 남자 봤냐.”

“오호라, 너~어무 깔끔하셔서 문제지요. 원래 진짜 바람둥이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법이란다. 내가 널 모르겠니. 선수가 왜 이러셔.”

처음엔 서로 으르렁대느라 바빠 친구가 되는데도 꽤나 시간이 걸렸던 두 사람이었다. 하여 정원은 말 그대로 깔끔한(?) 현성의 숱한 연애사에도 빠삭했다. 그조차도 일 년 남짓 조용하다는 것은 절대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현성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속으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으라, 이 미련 곰탱이!’

사정을 모르는 정원은 그의 진심을 실없는 농담으로만 생각했다. 그 모든 방황들을 한 번에 정리하게 만든 것도 다름 아닌 그녀인 것 또한 절대 모른다.

복장 터지는 그의 속도 모르고 정원이 싹둑 선을 그었다.

“결정적으로 난 연하는 싫거든? 애랑 무슨 연애를 하니?”

“연하 같은 소리 한다. 누가 앤지 모르겠네.”

“잊었나 본데, 내가 너보다 한 살 많단다.”

“한 사알?”

안 그래도 심사가 꼬인 현성이 걸음을 멈추고 정원을 삐죽 흘겨봤다.

“은정원 씨, 그새 까드셨나 본데 정확하게 다시 따져 봐?”

빠른 2월생인 그녀가 학번만 앞설 뿐, 민증 상 동갑내기인 두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들킨 후에도 정원은 호적에 늦게 올린 것이라고 부득부득 우겼지만 3월생인 현성과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됐다.

정원이 눈을 질끈 감으며 애처럼 날름 혀를 빼물었다.

“흥! 아무리 그래도 내가 선배인 건 변하지 않는다네.”

“으이그, 말해 봐야 내 입만 아프지. 꼴통.”

“또, 또 하늘같은 선배님한테 맞먹는다. 한 대 맞고 싶지!”

“아, 됐네요.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주먹을 쥐고 을러대던 정원이 금세 생글거리며 현성의 옆에 바싹 다가섰다.

“고기! 사람은 자고로 고기를 먹어 줘야 든든한 법. 간만에 보신 좀 하자.”

번쩍 치켜드는 가느다란 팔목이 햇살보다 더 해사하게 빛나 보였다. 향수도 쓰지 않는 그녀의 가는 머리칼에서 이름 모를 꽃향기가 물씬 피어났다.

포슬포슬 흩날리는 가늘고 긴 갈색 머리칼, 작은 얼굴에 동그란 눈, 작은 코, 작은 입술.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앳된 인상이었다. 본인은 163이라고 박박 우기지만 160을 간신히 넘기는 아담한 키에 투명하고 맑은 피부까지 더해져 전체적으로 가늘고 여려 보이는 외모였다.

물 빠진 청바지에 스니커즈, 회색 후드 티에 가벼운 배낭을 둘러맨 평범한 차림에도 반짝반짝 빛이 난다. 겉모습만큼은 소위 말하는 ‘청순가련’의 전형이랄까.

하지만 입을 여는 순간 그런 첫인상은 아주 간단하게 지워졌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냉소적이며,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고집스러운 억척녀 은정원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현성은 그런 의외성조차 명쾌해서 좋았다.

문제는 정원에게 현성은 친구 이상이 절대 아니라는 점이었다. 무식하도록 단순한 주제에 지극히 현실적이기까지 한 정원은 그와의 관계를 ‘친구’로 한정 짓고 혼자서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가 답답해 죽든 말든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사실 현성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성격에 손해 볼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원 앞에서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는 것을, 가식이나 억지가 아닌 자연스럽게 그리 되는 것을 그녀만 몰랐다.



밥이란 무조건 배부르게 먹어야 한다는 신조를 가진 정원은 우아하게 앉아 격식 따지는 것도 싫어했다. 앉은 자리에서 삼겹살 2-3인분은 거뜬히 해치우면서 서양 음식은 느끼하다며 먹는 족족 체하는 특이 체질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도 두 사람은 나란히 마주 앉아 대낮부터 고기를 굽고 있었다.

현성이 볼이 빵빵한 정원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삼 일은 굶은 줄 알겠다.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여전히 그 많은 음식이 대체 어디로 다 들어가는지 궁금했다.

“이참에 과외 그만두고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는 건 어때?”

“마음이야 굴뚝이지. 그런데 디자인도 아니고 서양화 전공으로 그게 쉽니? 나이가 어려. 스펙이 좋기를 해. 지금껏 해온 게 있는데 틀에 박힌 입시 강사를 하기도 애매하고, 동네 꼬맹이들 학원은 극악 페이에 일만 많고, 완전 지지해.”

특유의 장난기 어린 말투가 정말 심각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가벼웠다. 하지만 현성은 안다. 당장 숨이 넘어갈 정도로 힘들어도 그녀는 절대 내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깜박 속아 넘어간 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잠시 숨을 고른 정원이 이번엔 제법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현성이 뭔가 다른 말을 기대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왜?”

“로또를 사 볼까?”

내심 기대했던 현성이 버럭 인상을 썼다.

“은정원.”

“왜? 또 뭐?”

“인간아, 제발 생각 좀 하고 살자. 응?”

“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디 누나한테 인상을 쓰나, 확! 맞을라구.”

“으이그, 이 화상아.”

괜한 짜증에 현성이 팔을 뻗어 마주 앉은 그녀의 이마를 쿡 밀었다. 정원이 그제야 고개를 갸웃하며 현성을 빤히 보았다.

“뭐야, 비싼 밥 먹고 체할 일 있니? 왜 너 혼자 막 심각해?”

“내가 아니라, 그대가 심각하다며!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어떻게 되겠지 뭐.”

살랑살랑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고기를 집는 정원의 표정이 한없이 해맑았다. 단순하고 직설적인 성격답게 생각이며 감정이며 숨길 줄도 몰라서 그녀처럼 알기 쉬운 사람도 드물었다. 하지만 정작 큰일 앞에선 무섭도록 담담해지는 것이 또 은정원이었으니, 그 기막힌 차이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다.

풀어질 줄 모르는 현성의 안색에 그녀가 대뜸 정색을 했다.

“표정 풀지? 당장 어떻게 되는 거 아니거든?”

그리고 손에 든 쌈을 불쑥 내밀며 다시 비실비실 웃는다.

“자, 먹어. 배가 고프니까 쓸데없는 걱정이 느는 거야.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도 좋아진다?”

“으이그, 이 꼴통.”

“얼씨구? 누가 꼴통인지 모르겠네. 아까운 고기 다 타겠다. 얼른 먹어.”

커다란 쌈을 극구 현성의 입에 밀어 넣은 정원이 눈을 반짝이며 다시 고기를 집어 올렸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아무렴!’

그녀도 현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에 닥친 일을 어찌할까.

졸업하고도 애써 직장을 구하지 않은 것은, 그럴 여유도 없었거니와 과외로 버는 수입이 웬만한 월급보다 나아서였다. 갑자기 이렇게 사정이 나빠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오랜 투병 생활 끝에, 마지막 남은 작은 집을 팔아 아버지의 병원비를 충당하고 장례식까지 치르니 정원에게 남은 것이라곤 빈 통장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빈 통장보다, 당장 갈 곳이 없다는 사실보다, 아빠 선환의 빈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더 막막했다. 그럼에도 눈앞의 현실은 마음 편하게 기대어 울 만한 작은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