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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때에 비하면 이쯤이야.’

하나뿐인 가족이었던 선환을 보내고 정원은 큰아버지 집에 얹혀사는 중이었다. 큰집 또한 형편이 어려워 생활비를 보태야 했지만 당장 갈 곳이 없는 그녀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여기까진 현성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제대한 사촌 동생 정수에게 조만간 방을 내줘야 하는 상황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속 깊은 사촌 동생은 학비를 마련한다는 이유로 숙식 제공되는 곳에서 알바 중이었다. 하지만 정원은 다음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방을 내주리라 내심 마음먹고 있었다.

그에게 부탁하면 번듯한 학교에 교사 자리 하나쯤 쉽다는 것 정도는 정원도 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대로 편한 친구까지가 좋았다. 부담이 되고 싶지도 않았고, 갚지 못할 신세를 지는 것은 더더욱 사양이었다.

친한 친구일수록 더 분명히 지켜야 하는 선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방적인 관계는 언제고 무너지기 마련이다.

정원의 고집을 익히 아는 현성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뭐 좋은 방법 없나.’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도 칼 같은 정원 덕분에 현성은 매번 혼자 조바심이 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아, 맞다! 그게 있었지.”

순간 떠오른 생각에 현성이 활짝 웃으며 정원을 보았다.

“정원아, 카페 매니저 한번 해 볼래?”

“카페 매니저?”

“진짜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시간도 괜찮고, 일도 어려운 것 없고. 은정원이 잘나가던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페이도 나쁘지 않은데, 어때?”

빠르게 이어지는 설명에 정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자리가 어떻게 나한테까지 와? 경력 같은 거 필요하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내가 애들만 가르쳐 봤지, 그 흔한 알바 경험도 없잖아. 카페 일이 뭔지도 잘 모르는데 괜찮을까?”

“괜찮아. 그런 건 몰라도 돼. 아무 상관없어.”

“헐, 얘 봐라. 어떻게 상관이 없니? 세상 일이 다 너 맘 같은 줄 알아?”

“어허, 내가 언제 없는 소리 하는 거 봤어? 괜찮으니까 괜찮다고 하지. 경력은 상관없고, 꾸준히 성실하게 오래 일해 줄 사람을 구하는데 이래저래 딱 이잖아.”

“나야 오래 일할 수 있으면 더 좋지. 그런데 진짜 내가 할 수 있는 일 맞아?”

“그럼 할 수 없는 일을 하라 그러겠어?”

카페 매니저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만 정원으로선 물불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자신만만한 현성의 태도로 보아 꽤나 확실한 일 같기도 했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순간 과하게 반짝거렸다.

“진짜, 정말이야?”

“어허, 무슨 반응이 이래? 내가 그렇게 신용이 없나?”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조건도 괜찮은 일이 난데없이 뚝 떨어지니까…….”

“그래서? 싫어?”

“아니! 나야 완전 감사하지.”

혹여 다른 말이 나올까 정원이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설명에 남아 있던 의구심을 깨끗이 지워냈다.

학교 근처 카페라니 부담도 없었고, 적지 않은 월급에 근무 조건도 까다롭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 행운에 정원이 활짝 웃으며 현성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강현성이 역시 쓸모가 많다니까.”

“말하는 거 봐라. 쓸모오?”

“어허, 칭찬이야, 칭찬. 대충 넘어가지?”

정원이 된장찌개에 밥을 맛있게 비우는 사이 현성은 재빨리 전화로 약속을 잡았다. 말 떨어진 김에 거절할 틈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건 현성에게도 기회였다. 정원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 굳이 이런저런 사정까지 설명하려면 말이 길어진다. 우선은 눈앞에 선물처럼 떨어진 기회부터 잡아야 했다.

새로운 시작으로 설레는 어느 봄날, 괜스레 마음이 급해지는 현성이었다.



#2. 그대를 위한 꽃다발


<그대를 위한 꽃다발>

누가 지었는지 카페 이름 참 고전(?)스럽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낮은 울타리 너머 잔디와 잡초가 사이좋게 자라고 있는 너른 마당이었다. 그 너머 카페라고 생각되는 3층짜리 네모난 시멘트 건물이 덩그러니 있었다.

군데군데 디딤돌만 깔려 있을 뿐, 나무 그늘 하나 없이 휑하게 넓은 마당과 심플하다 못해 심심하기까지 한 네모난 회색 건물이 다였다. 전면 유리로 되어 있는 일층 테라스를 통해 고스란히 보이는 실내가 카페임을 짐작케 해 주는 정도. 그나마도 불이 꺼진 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현성을 따라 걷던 정원이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문 닫았잖아.”

“아, 얼마 전에 매니저가 그만뒀거든.”

“매니저 없다고 문까지 닫아? 다른 직원은 없어? 사장은 뭐 하는데?”

“그게, 사정이 좀 있어.”

정원이 대뜸 걸음을 멈추며 미간을 모았다.

“이거 정말 괜찮은 자리 맞아? 왠지 속은 기분인데.”

“은정원을 속였다가 내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사람을 그렇게 못 믿나.”

“못 믿는다기보다는, 어째 분위기가 영 그렇잖아.”

“겉보기랑 완전 다르니까 걱정 붙들어 매셔.”

현성이 미적거리는 정원을 덥석 잡아끌었다.

솔직히 겉모습만 봐서는 현성이 말한 조건들이 가능할지 의심스러울 만큼 소박(?)해 보였다. 말이 카페지 언뜻 봐서는 그냥 심플하게 꾸며놓은 사무실 같은 느낌도 들었다.

출입문 앞에 멈춰 선 현성이 불 꺼진 카페 안쪽을 기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형은 아직 인가.”

“형?”

“응. 아는 형이 하는 카페야.”

폭넓은 인간관계를 자랑하는 현성이었지만 정작 형 동생 할 정도로 가까운 사람은 많지 않았다. 새삼스러운 느낌에 불쑥 앞으로 나선 정원이 출입문을 슬쩍 밀어 보았다. 잠겨 있지 않았는지 부드럽게 슥 밀린다.

“어? 열려 있었네. 형, 나 왔어요.”

정원이 멈칫 하는 사이 현성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너른 창을 통해 들이치는 햇살에 홀은 환했지만 벽을 따라 안쪽에 위치한 와인 바 너머는 그늘이 짙었다. 그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부드럽지만 묘하게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서 와.”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

밝은 곳에 있다 그늘진 실내로 들어오면 잠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정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늘 속에 숨은 남자에게선 짧은 대답 외에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분위기가 왜 이래.’

스스럼없는 현성의 태도와 다르게 남자의 침묵은 언뜻 무례하다 싶을 만큼 서늘하다. 하지만 현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형, 이쪽은 내가 소개한다고 전화했던 친구.”

“…….”

“정원아, 인사해. 여기 마스터, 진하 형이야.”

“안녕하세요. 은정원입니다.”

재빨리 표정을 수습한 정원이 나름 영업용 미소를 담뿍 지어 보였다.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남자가 불쑥 딴소릴 했다.

“여자라는 말은 없었잖아.”

이건 또 무슨 소리? 한껏 미소 짓고 있던 정원의 입가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현성이 덥석 웃으며 나섰다.

“하하, 걱정 말아요. 이 친구는 내가 보장해.”

“…….”

“형은 설마 내가 아무 생각도 없이 데려왔겠어? 걱정 말라니까. 믿어도 돼요.”

“그래도 여자는 곤란한데…….”

현성이 재차 장담을 했지만 서늘한 목소리엔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정원의 시야에 그제야 남자가 또렷하게 잡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감한 눈빛을 제외하면 시리도록 예리한 인상의 남자였다. 제법 긴 머리를 단정하게 넘겨 서늘한 이목구비가 더욱 도드라진다.

그림 같은 눈썹아래 깊고 날카로운 눈매, 우아하게 뻗은 콧날, 선이 분명한 입술과 날렵한 턱 선에서 이지적이면서도 남다른 고집이 묻어났다. 남자치고 하얀 피부가 연약해 보이기는커녕 날카롭고 차가운 느낌을 더했다.

심플한 미색 니트와 까만 슬랙스가 명품 슈트처럼 말끔했다. 반듯한 어깨와 시원하게 뻗은 팔다리, 기다란 손가락, 서늘하면서도 화사한 느낌을 주는 골격이 시린 이미지와 함께 이 세상사람 같지 않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남자는 투명하게 얼어붙은 겨울하늘을 떠올리게 했다. 어두운 밤하늘처럼 까만 머리칼과 눈동자마저도 왠지 모르게 시리다. 찰나 마주친 먹먹함에 당황한 정원이 불쑥 되물었다.

“여자가 왜요?”

현성이 무얼 믿고 자신만만한지는 모르나 남자의 시선에서 왠지 모를 거부감을 느낀 정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질문을 무시하고 남자가 조용히 현성을 보았다.

“설명 안 했나?”

“아, 그게…….”

의아함이 가득한 정원의 시선에 현성이 애매하게 웃으며 말을 보탰다.

“전에 일했던 매니저들이 다 여자였거든.”

“그게 왜?”

질문과 함께 잠시 멈춰 있던 정원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상황으로 보아 여자 매니저들이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것도 저 얼음사장을 상대로 말이다.

‘뭐, 이런 멍멍이 같은 경우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결론을 내리다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두 남자 모두 모델 뺨칠 정도의 미모를 자랑했지만 기실 정원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림에 큰 뜻은 없어도 미대생이었던 그녀에게 뛰어난 미모는 눈이 즐거운 피사체 정도일 뿐이다.

사춘기 여고생 시절에도 정원은 그 흔한 짝사랑 한 번 해 보지 않았다. 당연히 특정 연예인에게 열광하거나, 잘생긴 남자 사람 앞에서 설레는 일도 없었다.

급기야 꾹꾹 눌러 놨던 그녀의 성질이 반짝 고개를 들었다. 직장을 구하고자 애써 참았지만 남자의 태도로 보아 물 건너간 것이 확실한 이상 참을 이유가 없었다.

“여자는 싫고 남자가 좋으시다니, 취향 참 남다르시네요.”

남자의 눈썹이 슬쩍 올라가는 동시에 당황한 현성이 앞으로 나섰다.

“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우, 성질머리하고는……. 그런 게 아니라 그동안 매니저들이 문제가 좀 있었어.”

정원의 눈매가 샐쭉 가늘어졌다. 정작 당사자인 남자는 내내 무시로 일관하는데 현성이 혼자 열심이다. 괜한 오기에 그녀가 다시금 남자를 향해 따져 물었다.

“그래서?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게, 형이 더 이상 문제 생기는 거 피곤하다고 남자 매니저를 구하고 있었어.”

“강현성, 너한테 물은 거 아니거든?”

정원이 카운터에 바짝 다가서며 진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람을 겪어 보지도 않고 판단하다니 기분 나쁘네요. 게다가 제 잘못도 아닌 일로 무조건 안 된다는 게 말이 돼요?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찰나 마주 선 진하의 눈빛이 일말의 파문도 없이 고요했다. 머리끝까지 짜증이 나는 와중에도 순간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다.

‘뭐, 뭐니.’

당황한 정원이 멈칫 물러서려는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

“내가 공평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

“그, 그건……! 그래도!”

으아!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순간 제대로 기분이 상한 정원이 냅다 쏘아붙였다.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사람은 무지 기분이 나쁘거든요!”

“내가 그쪽 기분까지 책임질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아저씨 때문에 기분이 나쁜 거니까, 책임질 이유는 없어도 책임까지 없는 건 아니죠!”

지금 대체 뭐라고 하는 거니. 스스로 뱉은 알 수 없는 말에 낭패감을 느낀 정원이 질끈 눈을 감았다. 머쓱하니 두 사람을 지켜보던 현성이 눈치 없이 왈칵 웃음을 터트렸다.

“풋! 하하하. 아, 형. 그게 그러니까…… 하하.”

하지만 이어지는 진하의 음성은 변함없이 서늘했다.

“내가 뭘 보고 그쪽을 믿어야 하지?”

“누가 믿어 달랬어요? 일하게 해 달랬지. 그리고 아저씬 절대 내 타입 아니거든요? 정말 그게 걱정이시라면 말이죠.”

현성이 분위기를 무마해 보려는 듯 가볍게 툭 끼어들었다.

“오호, 은정원한테 타입 같은 게 있기는 해?”

“나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

찔끔한 현성이 다시 진하를 설득했다.

“형, 내가 설마 아무나 소개하겠어? 이 친군 정말 공사 구분 확실해. 내가 보장한다니까?”

진하가 가타부타 말없이 현성을 보았다. 정원은 여전히 무심하게 지나치는 그의 시선에 울컥 성질이 났다. 처음 보는 남자의 눈빛이 왜 이다지도 거슬리는지 모르겠다.

“좋아. 채용하지.”

미처 예상치 못한 대답에 정원의 입이 떡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