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4화



“에엣? 안 된다면서요?”

“그새 마음이 바뀐 건가? 일하고 싶은 거 아니었습니까.”

“아니, 아니요. 무슨 말씀을. 진심으로 일하고 싶습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정원이 진심을 다해 열심히 고개를 흔들었다. 진하의 말투가 불현듯 정중해졌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

“문제가 생기면 바로 그만둡니다.”

순간 긴장했던 정원이 배시시 웃었다.

“그런 걱정일랑 붙들어 매시라니까요.”

“사적인 관심은 금물입니다.”

“그건, 사장님한테도 해당하는 거겠죠? 저도 사적인 관심은 절대 사양이거든요.”

진하의 시선이 잠시 정원에게 머물렀다. 하지만 그뿐, 다시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그만두라고 하면 군소리 않고 그만둡니다.”

“제가 잘못한 게 없어도요?”

버릇처럼 불쑥 끼어든 정원이 과묵한 그의 시선에 멈칫 중얼거렸다.

“그, 그게 그렇잖아요.”

“문제가 없으면 그럴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이 남자 어떻게 된 것이 제대로 대답하는 꼴을 못 봤다. 하지만 정원은 더 이상 짜증이 나지 않았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가 좋으니 다 용서할 수 있었다.

“정말이죠? 그럼 계약서에도 분명히 써 주세요.”

“직원으로 채용되면 당연히 고용 계약서를 작성합니다.”

“아니, 그거 말고요. 추가 조항으로 지금 말씀하신 내용도 넣어 달라고요.”

이제 보니 이 남자 대답하기 곤란하면 침묵한다. 하지만 그의 일방적인 화법에 그새 적응한 정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문제가 생기면 그만둔다. 사생활은 묻지 말 것. 사적인 문제이외의 이유로 부당하게 해고할 수 없다. 이렇게요. 간단하죠?”

“아, 그렇게까지 안 해도…….”

이번엔 정원이 냅다 그의 말을 잘랐다.

“아니요. 뭐든 확실하게 하는 게 좋죠. 사장님이 절 못 믿으시는데, 저라고 어떻게 사장님을 믿겠어요. 안 그래요?”

흥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은정원 식 화법이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아이처럼 짓궂게 반짝거렸다.



우여곡절 끝에 카페 매니저라는 새로운 직업을 얻게 된 정원은 다시 설명을 들으면서도 왠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직원이라고는 매니저인 그녀가 전부란다.

아니, 주방장 겸 지배인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사장이 자리를 비우거나 카페가 바쁠 때만 가끔씩 출근해서 도와준다는 주방장 겸 지배인은 또 뭐란 말인가.

매니저가 홀 서빙에서부터 회계, 매장 관리, 식자재 구매까지 모조리 떠맡아야 한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말이 매니저지 월급 사장이나 다름없었다.

중앙에 있는 커다란 회의용 테이블을 둘러싼 의자가 여덟 개, 4인과 2인 테이블이 세 개씩, 그리고 사이드 바 앞의 좌석이 다섯 개였다. 혼자 커버하기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정원은 뒤늦게 덜컥 걱정이 되었다.

“저기, 제가 카페 일은 처음이거든요. 정말 괜찮으세요?”

“마음이 바뀌었습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정원은 그럴수록 정말 괜찮은 것인지 자신이 없어졌다. 카페에 대해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가 아니던가. 난감해하는 그녀의 기색에 현성이 피식 웃으며 설명을 더했다.

“괜찮아. 커피랑 주방 일은 형이 커버하니까 신경 안 써도 되고, 와인 리스트가 문젠데 그것도 매뉴얼이 따로 있으니까 익숙해지면 어렵지 않을 거야.”

“그래도…….”

“메뉴는 모두 형이 소화하고 매니저는 주문받고 서빙만 하면 돼. 뭐, 보면 알겠지만 진짜 어려울 거 하나도 없다니까.”

정원의 시선이 바(bar) 위에 놓인 얄팍한 메뉴판으로 향했다. 조심스레 메뉴를 들춰 보던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현성이 보란 듯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어때, 진짜 간단하지?”

하지만 정원은 차마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이건 간단한 정도가 아니잖아. 장사를 하겠다는 거니, 말겠다는 거니.’

달랑 두 장짜리 페이퍼로 된 메뉴의 첫 페이지엔 와인 리스트가 앞뒤로 빼곡했다. 이어 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플한 나머지 메뉴가 보였다. 기본적인 커피와 음료, 간단한 사이드 디시 그리고 아무런 설명도 붙어 있지 않은 샌드위치. 그게 다였다.

정말 카페 메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심하게 허전하고 불량하다. 풀릴 줄 모르는 정원의 표정을 오해한 현성이 너스레를 떨었다.

“진짜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형이 자잘한 데 신경 쓰는 걸 싫어해서 대신 관리해 줄 사람이 필요할 뿐이야. 그래서 1년 이상 일한다는 조건으로 페이도 두둑하고, 인턴기간 석 달만 잘 넘기면 정 직원 보험까지 들어 주잖아.”

정원에게 매니저가 할 일을 설명해 주고 필요한 서류들을 건넨 진하가 한마디 더 했다.

“문제 있습니까?”

“아니! 아니에요. 전혀, 아무 문제없어요. 하하.”

정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일을 잘하든 못하든 고용주가 괜찮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단순하게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새삼 진하를 멀뚱히 살펴보았다.

뭐, 인정! 잘생기긴 했다. 하지만 그뿐, 저렇듯 간략하게 일관된 표정을 유지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서진하.

계약에 필요한 서류들을 확인하고 받은 명함에 찍힌 그의 이름이었다. 정원은 무표정한 얼굴과 서늘한 눈빛에 어울리지 않는, 왠지 모르게 다정한 느낌이 드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 묘한 이질감에 더 선명하게 기억될 만큼.

어느새 그의 무심함에 익숙해진 정원이 기묘한 기시감에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사장님,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없습니다.”

일말의 여지도 없이 단호한 대답이 날아들었다. 지금까지 무응답으로 일관하던 것에 비하면 놀라울 만큼 빠른 반응이었다.

“이상하네. 그런데 왜 낯이 익지.”

“니가 형을 보긴 어디서 봤다고 그래. 사람 얼굴 잘 기억도 못 하잖아.”

“아, 왜 이러셔.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거든요?”

“퍽이나.”

고요한 진하의 눈동자가 티격태격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을 스쳐 지났다.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는 어느 봄날의 오후. 정원이 카페 <그대를 위한 꽃다발(그꽃)>에 정식으로 취직을 하게 된 사연이었다.



그날 저녁. 진하는 예정에 없던 약속에 여전히 카페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상황을 만든 오후의 사건을 새삼 떠올렸다.

‘은정원이라…….’

간단하게 작성한 프로필로 확인한 내용은 평범했다. 27세, 이름 은정원, 현성과 같은 학교 같은 과 출신으로 미술 과외 말고는 그 흔한 알바 경험도 전무했다. 현성과 동갑이면서 한 학번 위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앳된 얼굴이었지만 나이를 생각하면 심하게 간결한 이력이었다.

사실 진하는 제아무리 현성의 부탁이라도 여자인 이상 분명히 거절하려고 했다. 이번엔 정말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남자 매니저를 구할 생각이었다.

카페를 오픈한 지 일 년 여, 그동안 그만두거나 해고한 매니저가 무려 다섯이었다. 처음엔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그가 무섭다며 그만뒀고, 나머지 넷은 무슨 이유에선지 콩깍지가 씌어 스토커처럼 진하의 사생활을 캐고 다녔다. 정말이지 새로운 매니저를 들이기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왜일까. 선뜻 고개를 저을 수가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이 돌아간 후에도 진하는 과연 잘한 일인지 한동안 고심했다.

‘현성이 녀석,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진하는 햇살이 환한 카페 마당에 두 사람이 들어선 순간 정원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스치듯 지나친 사람이 그토록 인상 깊게 남은 것은 특별한 장소와 시간 탓이리라.

황량한 묘원이라는 것을 잊을 만큼 씩씩한 목소리와 환한 미소가 너무나 선명해서 저절로 시선이 갔다.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빨간 목도리를 칭칭 감고 커다란 눈만 빠끔 내놓은 모습이 천진난만한 아이 같기도 했다. 그 눈빛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남았다.

겉보기와 다르게 당돌하고 거침없는 성격이라는 것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날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저 스치는 바람처럼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린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일까. 카페로 들어서는 정원을 발견한 순간 진하는 자신이 어둠 속에 묻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이없지만 이유를 따질 틈도 없이 막연하게 그랬다.

그 생경한 감정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저도 모르게 흠칫 물러서려는 마음이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고요한 가슴에 이는 작은 파문이 무섭도록 선명해서 순간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작 그녀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만남이었다. 진하도 물론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일 것이다. 아니면 이토록 신경 쓰일 이유가 없었다.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이 진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참 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런 불분명한 감정은 불편하다.

“진하 씨,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익숙한 목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린 진하가 고개를 들었다. 윤주가 그림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눈앞에 서 있었다.

“어서 와.”

예의 바르지만 무심할 정도로 차가운 눈빛, 부드럽지만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서늘한 목소리. 항상 그렇듯 그의 시선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하지만 윤주는 웃음을 잃지 않고 밝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아직 사람 못 구했어요? 내가 좀 알아볼까?”

“아니, 괜찮아. 구했어.”

“그래요? 이번엔 정말 남자?”

“현성이가 소개를 했는데…….”

윤주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오호, 그 녀석이 웬일이래요? 그런 데 신경을 다 쓰고?”

“그러게.”

그제야 진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천하의 강현성이 이유 불문 아쉬운 소리를 하며 부탁을 하다니, 놀랄 만일이기는 했다. 새삼 생각하니 그랬다.

찰나 윤주의 눈가에 애잔한 떨림이 스쳐 지났다.

‘그렇게 웃지 마요. 그렇게 먼눈으로 다른 곳을 보면서 웃지 말아요. 당신 앞에 이렇게 내가 있잖아요.’

그의 미소가 여전히 아프다. 손 내밀면 닿을 곳에 있지만 여전히 멀게만 느껴지는 이 거리는 언제쯤이나 좁혀질까.

다시 카페 문을 닫고 일주일. 여자 매니저들이 매번 문제를 일으키는 통에 이번엔 남자로 알아보겠다던 진하에게선 내내 소식이 없었다. 이 땅에 딱히 연고가 없는 그로선 따로 사람 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핑계 김에 윤주가 먼저 용기 내어 연락을 했지만 솔직히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제 보니 약속에 응한 이유가 있었지만 윤주는 그래도 좋았다. 거절만 아니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그럼 사람도 구했겠다, 카페는 언제부터 다시 열어요?”

“다음 주부터.”

“그럼 꽃도 다시 준비해야겠네요?”

“부탁해.”

윤주는 손꼽히는 디자이너 플라워숍의 오너이자 실력파 플로리스트로 유명했다. 하지만 서진하라는 남자 앞에서 그녀는 그저 여자이고 싶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었다.

일 년 전, 갑자기 한국으로 찾아온 진하가 난데없이 카페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윤주는 그 작은 연결고리가 너무나 고맙고 반가웠다. 그렇게 노심초사 그의 곁을 맴돌다 마음 깊이 품어왔던 묵은 감정을 고백했다. 그리고 무참하게 거절당했다.

윤주는 그래도 괜찮았다. 그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연결고리를 유지하기 위해 카페의 꽃을 자청했다. 꽃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지만 그조차도 자신이 지고 가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가슴을 짓누르는 상념들을 애써 밀어낸 윤주가 가볍게 말을 이었다.

“웬일로 쉽게 ok 하나 했네. 서진하 씨, 너무 속보이는 거 아니에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윤주는 순간 무심코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지그시 삼켰다. 그의 까만 눈동자가 잠시 머물다 또 저만치 멀어진다. 하지만 윤주는 늘 그래왔듯 마음을 다잡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런 소리 들으려고 하는 말 아니에요.”

지난 삼 년 동안 변한 것이라고는 가끔 보이는 저 무심한 미소가 전부였다. 그 작은 변화에도 자그마치 삼 년이 걸렸다. 얼어붙은 그의 마음은 여전히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하고 기다려도 진하는 더 이상 다가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완벽하게 거리를 유지한다. 하지만 윤주는 그래도 좋았다.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을 마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기약 없는 기다림은 그녀를 다른 의미로 지치게 만들었다. 웃지 않아도, 싸늘하게 외면해도, 한없이 빛나 보이는 이 남자는 여전히 눈이 부셨다. 윤주는 또다시 누군가가 나타나 그의 시선을 앗아갈 것 같은 악몽에 시달렸다.

언제까지고 기다릴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또다시 그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한다면 이번엔 그대로 물러설 용기가 없었다. 그런 지옥은 한 번으로 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