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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한때 윤주에겐 바라보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던 아픈 사랑이었다. 결국 뒤늦은 고백을 하면서도 아무것도 바랄 수 없었던 잔인한 사랑이었다.
그녀가 먼저 만났고, 먼저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은 먼저 만나는 것도, 먼저 사랑한 것도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이 곁에 있던 친구에게 머무르는 순간, 윤주의 사랑은 말할 수 없는 상처가 되어버렸다. 때로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될 수 있었다. 어이없게도 그녀의 사랑이 그랬다.
친구의 연인을 사랑한 죄. 친구의 남편을 사랑한 죄. 그저 사랑하게 된 것뿐인데, 그녀에겐 단 한 번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얼굴로 해맑게 웃는 친구를 원망할 수도, 내가 먼저 사랑했노라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차마 지워내지 못한 사랑은 윤주를 끝없는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하여 윤주는 사랑이 사랑으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지금에 감사했다. 제 것이 될 수 없음에도 놓지 못했던 아픈 사랑이 이제는 죄가 되지 않는다. 너무나 사랑해서 차마 미워할 수도 없었던 친구는 이제 세상에 없었다.
그래서 기약 없는 기다림에도 더 이상 절망하지 않았다.
진하가 슬픈 눈으로 곱게 웃는 윤주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니. 그렇게 웃지 마라.’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가지런한 머리칼이 부드럽게 살랑거린다. 웃을 때마다 설핏 가늘어지는 눈매가 고운 사람이었다. 우윳빛 피부에 단아한 이목구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점 모자람 없이 곱기만 하다.
언제 어느 때고 눈살 찌푸리는 법 없이 웃어 주는, 언제부턴가 한결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 그래서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여자. 하지만 진하는 단 한 번도 윤주를 여자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진하에게 윤주는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의 가장 친한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온 그에게 마음을 고백했을 때, 진하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분명히 거절했다. 그에겐 절대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굳이 꽃을 맡긴 것도 윤주의 마음을 끊어내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 꽃이 어떤 의미인지 진하 자신만큼, 아니 그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윤주였다.
그럼에도 끝까지 기다리겠다며 매달릴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윤주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솔직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일 년, 그녀의 마음은 그대로 멈춘 채 제자리걸음 중이었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차갑게 밀어내도 요지부동. 점점 더 집요해지는 그녀의 감정에 진하가 먼저 지쳐가고 있었다.
윤주의 감정이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그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 그에 더해진 집착으로만 느껴졌다. 그녀가 다정하게 웃으며 가볍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윤주를 바라보는 진하의 시선엔 여전히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언제쯤이면 이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갈까. 언제쯤이면 이 모든 기억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부드럽고 낮은 조명아래 은은한 재즈 선율이 감미롭게 녹아든다. 짙은 와인 향이 맴도는 카페에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와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가 그림처럼 마주 앉아 있었다.
#3. 긴 하루
출근 첫날, 일찌감치 집을 나선 정원은 카페에 들어서다 눈을 휘둥그레 떴다. 테라스 가득 화려한 꽃들이 환한 햇살 아래 눈부시게 하늘거리고 있었다. 밋밋하다 못해 썰렁하기 그지없던 카페 전경이 오늘은 완전히 달라 보였다.
후다닥 마당을 가로지른 정원이 카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사장님! 저 꽃들은 대체 뭐……!”
불쑥 카페 안으로 들어서던 정원이 낯선 그림자에 놀라 멈칫 멈춰 섰다. 잔잔한 재즈 음악을 배경으로 웬 여자가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무언가 말하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주인이라도 되는 양 너무나 당당하게 묻는다.
“누구시죠? 아직 오픈 전인데요.”
“아, 저기, 그게…….”
당황한 정원이 반사적으로 카운터 너머 진하를 찾았다. 그리고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자를 다시금 유심히 살폈다. 같은 여자가 봐도 감탄할 만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정돈된 전형적인 미인이었다.
하늘하늘한 연둣빛 시폰 원피스가 뽀얀 살결과 더불어 봄날 아지랑이처럼 아른아른하다. 여성스러운 라인의 샤넬 슈즈가 가는 발목을 더욱 화사하게 만들어 주었다. 분홍빛 입술에 잘 다듬어진 분홍빛 손끝에서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만 같다.
흥! 정원은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여자 직원을 안 뽑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다. 저런 여자가 옆에 있는데 누군들 눈에 들어올까.
“어서 와요.”
뒤늦은 진하의 인사에 정원이 삐죽거리는 성질을 꾹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손님이 계신 줄 모르고…….”
“아니, 마침 잘됐습니다. 이쪽은 손님이 아니고…….”
진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뭐예요, 진하 씨? 이번엔 남자 매니저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됐어.”
여자의 시선이 다시금 정원에게 닿았다. 그런데 그 눈빛이 자못 날카롭다. 괜한 오기에 정원이 모른 척 꿋꿋하게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은정원입니다. 보시다시피 여자고요. 문제 있나요?”
“그쪽한테 물어본 거 아니에요.”
쌀쌀한 목소리에 도도하게 깔아보는 눈빛까지,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얼음사장 못지않았다. 하지만 연이은 폭탄(?)에 정원도 그리 상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제 얘기를 하고 계신 거 같아서요.”
“당돌한 친구네.”
정원을 일별한 여자가 다시금 진하에게 따져 물었다.
“진하 씨, 정말 괜찮겠어요? 현성이 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적반하장도 유분수라. 아무튼 하나같이 당사자를 앞에 두고 매너가 꽝이다. 얼음사장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채용을 하네 마네 어깃장을 놓더니, 오늘은 일면식도 없는 여자가 불쑥 신경질이다. 어지간한 정원도 울컥 짜증이 났다.
“그쪽이야말로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할 만한 대화는 아닌 거 같은데요.”
“이 아가씨가 정말……!”
“아가씨가 아니라 은정원입니다. 인사했는데 못 들으셨나 봐요?”
“아니, 뭐 이런……!”
자칫 감정적으로 변하는 분위기에 진하가 불쑥 끼어들었다.
“은 매니저, 이쪽은 플로리스트 정윤주 씨. 우리 가게에 꽃을 챙겨주고 있어요. 꽃 관리도 매니저의 일이니까, 윤주 씨에게 잘 듣고 차질 없이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진하 씨, 정말…….”
“윤주 씨도 지금까지처럼 잘 부탁합니다. 은 매니저, 다른 질문 있습니까?”
윤주의 말을 끊고 정원을 돌아보는 진하의 시선이 목소리만큼 서늘했다. 괜스레 불퉁 감정이 상한 정원이 똑같이 싸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없습니다.”
정원이 새침한 얼굴로 진하의 옆을 지나 탈의실로 향했다.
“으아, 세트로 별꼴이야, 정말!”
유니폼을 갈아입은 정원이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그리고 새삼 거울에 비춘 자신의 모습을 빤히 보았다.
유니폼이라고 해 봐야 별다를 것은 없었다. 진하와 마찬가지로 하얀 셔츠와 까만 슬랙스, 허리를 감싸며 발목까지 직선으로 떨어지는 길고 까만 에이프런이 전부였다. 카페하면 저절로 떠오름직한 심플한 디자인이다.
“오호, 은정원, 괜찮은데? 제법 그럴 듯해. 헤헤.”
보통 후드 티에 낡은 청바지를 입고 야구 모자를 눌러쓴 채 배낭을 달랑거리며 다니는 정원이었다. 그래서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유니폼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기분 좋았다.
새로운 일, 새로운 직장, 처음 입어 보는 유니폼. 솔직히 설레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사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정원은 기분 좋은 기대감에 마음이 살랑거렸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지뢰밭인지.
“일이야, 일. 그것만 생각하자.”
카페엔 윤주가 혼자 정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활짝 열어놓은 테라스를 통해 상큼한 꽃향기가 가득 밀려들었다.
애써 머리를 비운 정원이 준비한 노트를 들고 윤주를 따라 테라스로 나섰다. 여전히 도도한 그녀의 시선이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제대로 알아두지 않으면 곤란한 사람은 정원이었다.
윤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꽃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실제로 정원에겐 생전 처음 보는 꽃들이 태반이었다.
아담한 테라스에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종류도 많고, 한 다발 정도씩 소량으로 묶여 있어 작은 꽃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꽃의 종류와 이름, 각각의 특성에 맞게 관리하는 법, 물을 갈아 주는 시기, 조금씩 다른 포장 방법 등 알아야 할 것도 많았다.
“여기 꽃은 항상 내가 가져오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물어보세요.”
예상외로 친절하고 꼼꼼한 설명에 정원은 반쯤 마음이 풀려 있었다. 그런데 윤주가 불쑥 딴소릴 했다.
“현성이랑은 어떤 사이죠?”
“……, 친군데요.”
“그냥 친구?”
그냥 친구 아니면 또 뭐가 있단 말인가. 처음 본 사이에 대뜸 하는 말이 참 어이없다. 정원의 눈가에 다시금 경계심이 어렸다.
“현성이를 잘 아세요?”
“잘 알죠.”
“그러는 선생님께선 현성이랑 어떻게 아시는데요?”
자못 날카로운 반응에 윤주가 갑자기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 맞다. 미안해요. 아깐 내가 초면에 실례가 많았죠.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좀 당황했어요. 정식으로 인사하죠. 정윤주라고 해요.”
“예? 아, 은정원입니다."
반사적으로 손을 마주 잡은 정원이 슬쩍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 말린 느낌. 정식으로 사과하고 손을 내미는데도 왠지 개운하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자 아랑곳하지 않고 생글생글 잘도 웃어댄다.
“이제 풀린 거죠? 그럼 현성이에 대해 물어도 될까요?”
잠시간 윤주의 눈을 멀뚱히 마주 보던 정원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현성인……, 학교 후밴데요.”
“후배?”
“뭐, 후배라기보다는 친구가 맞죠.”
“어머, 민망하게 선생님은 무슨……. 그냥 이름 불러요. 아니면 언니라고 할래요? 현성이 친구라니 우리 편하게 지내요.”
웬 언니? 당황한 정원이 커다란 눈을 깜박거렸다.
“아, 저, 그게…….”
“왜요? 싫어요? 정원 씨, 아직 기분 안 풀렸구나. 어쩌지?”
“아, 그……. 네, 그러죠, 뭐.”
뻔뻔스럽게 밀어붙이는 윤주의 미소에 정원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한 표정이 역력한 정원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윤주가 불쑥 말을 돌렸다.
“내가 현성이를 좀 많이 아는데. 어떻게 아는지 안 궁금해요?”
대체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 것일까. 정원은 솔직히 그녀가 현성과 어떤 사이인지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이상한 인물들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은 사실이 괘씸할 뿐.
“제가 궁금해야 하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현성이 누나랑 어릴 때부터 친구라 같이 자랐거든요. 친동생이나 다름없어요.”
얼음사장은 아는 형이요, 이 살벌한 플로리스트는 아는 누나란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아, 네에.”
“어머, 그게 끝?”
“네? 뭐가요?”
“아니, 아니에요.”
해사하게 미소를 짓는 윤주와 반대로 정원의 표정은 더없이 심각해졌다.
‘강현성, 대체 날 어디에 꽂아놓은 거냐.’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더할나위 없이 좋아 보였던 조건들이 순간 덫으로 느껴졌다면 과할까? 왠지 뒤통수가 서늘해지는 정원이었다.
윤주가 돌아가고 난 후엔 진하가 직접 커피머신 사용법을 설명했다. 만일을 위해 작동법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열심히 메모를 하다 문득 고개를 든 정원의 시선이 진하에게 닿았다. 설명하는 말투도 표정도 참으로 일관되게 간결하고 차갑다.
‘목소리가 암만 좋으면 뭐하냐고. 국어책을 읽어도 이보단 낫겠네.’
그럼에도 반듯한 이마에서 쭉 뻗은 콧날, 단호한 입매, 날카로운 턱으로 흐르는 옆선은 정녕 예술이었다. 가까이 보니 훌쩍 큰 키에 군살 없이 단단한 핏이 묘하게 선정적이다.
그런데 왜일까. 차갑다 못해 창백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이유 없이 먹먹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분명 모르는 사람인데 왜 어디서 본 거 같지?’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예전 매니저들이 문제를 일으켰던 것일까. 남다른 외모에 무언가 비밀스러운 분위기까지, 나름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정원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순 명료한 성격에 호불호가 분명한 그녀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쉽고 선명한 것이 좋았다. 같은 이유로 정원은 비밀이 많은 사람도 좋아하지 않았다. 사연 있는 사람도 사양이었다.
안 그래도 고된 세상살이 즐겁고 행복할 시간도 많지 않은데, 고뇌하며 무겁게 살 필요가 있을까. 그녀는 밝고 즐거운 인생을 사랑했다. 고민은 짧게, 기쁨은 길고 가득하게!
“뭡니까.”
“네? 아…….”
덥석 다가드는 까만 눈동자에 당황한 정원이 순간 떠오른 생각을 툭 던졌다.
“있잖아요, 사장님. 우리 정말 어디서 만난 적 없나요?”
“없습니다.”
여지없이 즉답.
“정말요?”
그가 이번엔 말없이 정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니면 말지 왜 또 저렇게 보는 것일까. 정원은 애초 질문한 것도 잊은 채 말끄러미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한때 윤주에겐 바라보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던 아픈 사랑이었다. 결국 뒤늦은 고백을 하면서도 아무것도 바랄 수 없었던 잔인한 사랑이었다.
그녀가 먼저 만났고, 먼저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은 먼저 만나는 것도, 먼저 사랑한 것도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이 곁에 있던 친구에게 머무르는 순간, 윤주의 사랑은 말할 수 없는 상처가 되어버렸다. 때로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될 수 있었다. 어이없게도 그녀의 사랑이 그랬다.
친구의 연인을 사랑한 죄. 친구의 남편을 사랑한 죄. 그저 사랑하게 된 것뿐인데, 그녀에겐 단 한 번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얼굴로 해맑게 웃는 친구를 원망할 수도, 내가 먼저 사랑했노라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차마 지워내지 못한 사랑은 윤주를 끝없는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하여 윤주는 사랑이 사랑으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지금에 감사했다. 제 것이 될 수 없음에도 놓지 못했던 아픈 사랑이 이제는 죄가 되지 않는다. 너무나 사랑해서 차마 미워할 수도 없었던 친구는 이제 세상에 없었다.
그래서 기약 없는 기다림에도 더 이상 절망하지 않았다.
진하가 슬픈 눈으로 곱게 웃는 윤주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니. 그렇게 웃지 마라.’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가지런한 머리칼이 부드럽게 살랑거린다. 웃을 때마다 설핏 가늘어지는 눈매가 고운 사람이었다. 우윳빛 피부에 단아한 이목구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점 모자람 없이 곱기만 하다.
언제 어느 때고 눈살 찌푸리는 법 없이 웃어 주는, 언제부턴가 한결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 그래서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여자. 하지만 진하는 단 한 번도 윤주를 여자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진하에게 윤주는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의 가장 친한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온 그에게 마음을 고백했을 때, 진하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분명히 거절했다. 그에겐 절대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굳이 꽃을 맡긴 것도 윤주의 마음을 끊어내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 꽃이 어떤 의미인지 진하 자신만큼, 아니 그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윤주였다.
그럼에도 끝까지 기다리겠다며 매달릴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윤주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솔직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일 년, 그녀의 마음은 그대로 멈춘 채 제자리걸음 중이었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차갑게 밀어내도 요지부동. 점점 더 집요해지는 그녀의 감정에 진하가 먼저 지쳐가고 있었다.
윤주의 감정이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그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 그에 더해진 집착으로만 느껴졌다. 그녀가 다정하게 웃으며 가볍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윤주를 바라보는 진하의 시선엔 여전히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언제쯤이면 이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갈까. 언제쯤이면 이 모든 기억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부드럽고 낮은 조명아래 은은한 재즈 선율이 감미롭게 녹아든다. 짙은 와인 향이 맴도는 카페에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와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가 그림처럼 마주 앉아 있었다.
#3. 긴 하루
출근 첫날, 일찌감치 집을 나선 정원은 카페에 들어서다 눈을 휘둥그레 떴다. 테라스 가득 화려한 꽃들이 환한 햇살 아래 눈부시게 하늘거리고 있었다. 밋밋하다 못해 썰렁하기 그지없던 카페 전경이 오늘은 완전히 달라 보였다.
후다닥 마당을 가로지른 정원이 카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사장님! 저 꽃들은 대체 뭐……!”
불쑥 카페 안으로 들어서던 정원이 낯선 그림자에 놀라 멈칫 멈춰 섰다. 잔잔한 재즈 음악을 배경으로 웬 여자가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무언가 말하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주인이라도 되는 양 너무나 당당하게 묻는다.
“누구시죠? 아직 오픈 전인데요.”
“아, 저기, 그게…….”
당황한 정원이 반사적으로 카운터 너머 진하를 찾았다. 그리고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자를 다시금 유심히 살폈다. 같은 여자가 봐도 감탄할 만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정돈된 전형적인 미인이었다.
하늘하늘한 연둣빛 시폰 원피스가 뽀얀 살결과 더불어 봄날 아지랑이처럼 아른아른하다. 여성스러운 라인의 샤넬 슈즈가 가는 발목을 더욱 화사하게 만들어 주었다. 분홍빛 입술에 잘 다듬어진 분홍빛 손끝에서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만 같다.
흥! 정원은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여자 직원을 안 뽑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다. 저런 여자가 옆에 있는데 누군들 눈에 들어올까.
“어서 와요.”
뒤늦은 진하의 인사에 정원이 삐죽거리는 성질을 꾹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손님이 계신 줄 모르고…….”
“아니, 마침 잘됐습니다. 이쪽은 손님이 아니고…….”
진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뭐예요, 진하 씨? 이번엔 남자 매니저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됐어.”
여자의 시선이 다시금 정원에게 닿았다. 그런데 그 눈빛이 자못 날카롭다. 괜한 오기에 정원이 모른 척 꿋꿋하게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은정원입니다. 보시다시피 여자고요. 문제 있나요?”
“그쪽한테 물어본 거 아니에요.”
쌀쌀한 목소리에 도도하게 깔아보는 눈빛까지,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얼음사장 못지않았다. 하지만 연이은 폭탄(?)에 정원도 그리 상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제 얘기를 하고 계신 거 같아서요.”
“당돌한 친구네.”
정원을 일별한 여자가 다시금 진하에게 따져 물었다.
“진하 씨, 정말 괜찮겠어요? 현성이 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적반하장도 유분수라. 아무튼 하나같이 당사자를 앞에 두고 매너가 꽝이다. 얼음사장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채용을 하네 마네 어깃장을 놓더니, 오늘은 일면식도 없는 여자가 불쑥 신경질이다. 어지간한 정원도 울컥 짜증이 났다.
“그쪽이야말로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할 만한 대화는 아닌 거 같은데요.”
“이 아가씨가 정말……!”
“아가씨가 아니라 은정원입니다. 인사했는데 못 들으셨나 봐요?”
“아니, 뭐 이런……!”
자칫 감정적으로 변하는 분위기에 진하가 불쑥 끼어들었다.
“은 매니저, 이쪽은 플로리스트 정윤주 씨. 우리 가게에 꽃을 챙겨주고 있어요. 꽃 관리도 매니저의 일이니까, 윤주 씨에게 잘 듣고 차질 없이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진하 씨, 정말…….”
“윤주 씨도 지금까지처럼 잘 부탁합니다. 은 매니저, 다른 질문 있습니까?”
윤주의 말을 끊고 정원을 돌아보는 진하의 시선이 목소리만큼 서늘했다. 괜스레 불퉁 감정이 상한 정원이 똑같이 싸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없습니다.”
정원이 새침한 얼굴로 진하의 옆을 지나 탈의실로 향했다.
“으아, 세트로 별꼴이야, 정말!”
유니폼을 갈아입은 정원이 긴 머리를 단정하게 묶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그리고 새삼 거울에 비춘 자신의 모습을 빤히 보았다.
유니폼이라고 해 봐야 별다를 것은 없었다. 진하와 마찬가지로 하얀 셔츠와 까만 슬랙스, 허리를 감싸며 발목까지 직선으로 떨어지는 길고 까만 에이프런이 전부였다. 카페하면 저절로 떠오름직한 심플한 디자인이다.
“오호, 은정원, 괜찮은데? 제법 그럴 듯해. 헤헤.”
보통 후드 티에 낡은 청바지를 입고 야구 모자를 눌러쓴 채 배낭을 달랑거리며 다니는 정원이었다. 그래서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유니폼이 낯설면서도 묘하게 기분 좋았다.
새로운 일, 새로운 직장, 처음 입어 보는 유니폼. 솔직히 설레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사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정원은 기분 좋은 기대감에 마음이 살랑거렸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지뢰밭인지.
“일이야, 일. 그것만 생각하자.”
카페엔 윤주가 혼자 정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활짝 열어놓은 테라스를 통해 상큼한 꽃향기가 가득 밀려들었다.
애써 머리를 비운 정원이 준비한 노트를 들고 윤주를 따라 테라스로 나섰다. 여전히 도도한 그녀의 시선이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제대로 알아두지 않으면 곤란한 사람은 정원이었다.
윤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꽃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실제로 정원에겐 생전 처음 보는 꽃들이 태반이었다.
아담한 테라스에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종류도 많고, 한 다발 정도씩 소량으로 묶여 있어 작은 꽃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꽃의 종류와 이름, 각각의 특성에 맞게 관리하는 법, 물을 갈아 주는 시기, 조금씩 다른 포장 방법 등 알아야 할 것도 많았다.
“여기 꽃은 항상 내가 가져오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물어보세요.”
예상외로 친절하고 꼼꼼한 설명에 정원은 반쯤 마음이 풀려 있었다. 그런데 윤주가 불쑥 딴소릴 했다.
“현성이랑은 어떤 사이죠?”
“……, 친군데요.”
“그냥 친구?”
그냥 친구 아니면 또 뭐가 있단 말인가. 처음 본 사이에 대뜸 하는 말이 참 어이없다. 정원의 눈가에 다시금 경계심이 어렸다.
“현성이를 잘 아세요?”
“잘 알죠.”
“그러는 선생님께선 현성이랑 어떻게 아시는데요?”
자못 날카로운 반응에 윤주가 갑자기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 맞다. 미안해요. 아깐 내가 초면에 실례가 많았죠.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좀 당황했어요. 정식으로 인사하죠. 정윤주라고 해요.”
“예? 아, 은정원입니다."
반사적으로 손을 마주 잡은 정원이 슬쩍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 말린 느낌. 정식으로 사과하고 손을 내미는데도 왠지 개운하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자 아랑곳하지 않고 생글생글 잘도 웃어댄다.
“이제 풀린 거죠? 그럼 현성이에 대해 물어도 될까요?”
잠시간 윤주의 눈을 멀뚱히 마주 보던 정원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현성인……, 학교 후밴데요.”
“후배?”
“뭐, 후배라기보다는 친구가 맞죠.”
“어머, 민망하게 선생님은 무슨……. 그냥 이름 불러요. 아니면 언니라고 할래요? 현성이 친구라니 우리 편하게 지내요.”
웬 언니? 당황한 정원이 커다란 눈을 깜박거렸다.
“아, 저, 그게…….”
“왜요? 싫어요? 정원 씨, 아직 기분 안 풀렸구나. 어쩌지?”
“아, 그……. 네, 그러죠, 뭐.”
뻔뻔스럽게 밀어붙이는 윤주의 미소에 정원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한 표정이 역력한 정원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윤주가 불쑥 말을 돌렸다.
“내가 현성이를 좀 많이 아는데. 어떻게 아는지 안 궁금해요?”
대체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 것일까. 정원은 솔직히 그녀가 현성과 어떤 사이인지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이상한 인물들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은 사실이 괘씸할 뿐.
“제가 궁금해야 하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현성이 누나랑 어릴 때부터 친구라 같이 자랐거든요. 친동생이나 다름없어요.”
얼음사장은 아는 형이요, 이 살벌한 플로리스트는 아는 누나란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아, 네에.”
“어머, 그게 끝?”
“네? 뭐가요?”
“아니, 아니에요.”
해사하게 미소를 짓는 윤주와 반대로 정원의 표정은 더없이 심각해졌다.
‘강현성, 대체 날 어디에 꽂아놓은 거냐.’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더할나위 없이 좋아 보였던 조건들이 순간 덫으로 느껴졌다면 과할까? 왠지 뒤통수가 서늘해지는 정원이었다.
윤주가 돌아가고 난 후엔 진하가 직접 커피머신 사용법을 설명했다. 만일을 위해 작동법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열심히 메모를 하다 문득 고개를 든 정원의 시선이 진하에게 닿았다. 설명하는 말투도 표정도 참으로 일관되게 간결하고 차갑다.
‘목소리가 암만 좋으면 뭐하냐고. 국어책을 읽어도 이보단 낫겠네.’
그럼에도 반듯한 이마에서 쭉 뻗은 콧날, 단호한 입매, 날카로운 턱으로 흐르는 옆선은 정녕 예술이었다. 가까이 보니 훌쩍 큰 키에 군살 없이 단단한 핏이 묘하게 선정적이다.
그런데 왜일까. 차갑다 못해 창백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이유 없이 먹먹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분명 모르는 사람인데 왜 어디서 본 거 같지?’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예전 매니저들이 문제를 일으켰던 것일까. 남다른 외모에 무언가 비밀스러운 분위기까지, 나름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정원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순 명료한 성격에 호불호가 분명한 그녀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쉽고 선명한 것이 좋았다. 같은 이유로 정원은 비밀이 많은 사람도 좋아하지 않았다. 사연 있는 사람도 사양이었다.
안 그래도 고된 세상살이 즐겁고 행복할 시간도 많지 않은데, 고뇌하며 무겁게 살 필요가 있을까. 그녀는 밝고 즐거운 인생을 사랑했다. 고민은 짧게, 기쁨은 길고 가득하게!
“뭡니까.”
“네? 아…….”
덥석 다가드는 까만 눈동자에 당황한 정원이 순간 떠오른 생각을 툭 던졌다.
“있잖아요, 사장님. 우리 정말 어디서 만난 적 없나요?”
“없습니다.”
여지없이 즉답.
“정말요?”
그가 이번엔 말없이 정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니면 말지 왜 또 저렇게 보는 것일까. 정원은 애초 질문한 것도 잊은 채 말끄러미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