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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사적인 관심은 갖지 않는다. 잊지 말아야 할 텐데요.”

예의 서늘한 시선에 울컥 겁을 상실한 정원이 냉큼 토를 달았다.

“사적인 관심 아니거든요? 사장님 그거 자의식 과잉이에요. 아세요?”

“…….”

“아, 네에. 사. 적. 인. 관. 심. 조심하지요.”

그가 역시나 그녀의 말을 쓱 무시하며 건조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쳇! 누가 얼음 아니랄까 봐! 길게 말하면 어디가 녹아내리기라도 하니?’

무반응에 맥이 빠진 정원이 입술을 빼물고 다시금 설명을 받아 적었다. 고개 숙인 그녀의 머리맡에 예의 시선이 조용히 닿았다 멀어지는 것은 물론 알지 못했다.

지하 와인 창고와 카운터, 주방 물품 파악에 자재 관리와 회계 시스템까지 일사천리로 설명을 마친 그가 주방으로 휑하니 사라졌다.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정원이 어이없는 눈으로 멀거니 주방문을 바라보았다.

‘뭐, 뭐니. 이 난데없는 전개는…….’

이름 모를 재즈곡이 잔잔히 흐르는 가운데 회계 프로그램이 떠 있는 모니터의 커서가 깜빡거린다. 친절한 대화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출근 첫날부터 이 모양이라니. 제아무리 씩씩한 정원도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설마……, 계속 이러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썰렁하니 텅 빈 카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제 뭐 하지?”



테이블도 바닥도 와인 바와 집기류까지 모두 제자리에 먼지 한 톨 없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더불어 한동안 문을 닫아서인지, 아니면 시간이 일러서인지 손님마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슬그머니 카운터 바를 돌아 나온 정원이 화장실로 향했다. 하지만 화장실도 마찬가지. 반짝반짝 윤이 나는 세면대와 말끔하게 비워진 휴지통과 새로 걸어놓은 화장지까지 완벽하다.

“결벽증이야? 뭐 이리 깨끗해.”

낮게 중얼거리는 정원의 눈가에 난감함이 가득했다. 그렇다고 불쑥 주방에 고개를 들이밀면 보나마나 또 냉랭한 얼굴로 예의 사적인 관심을 들먹일 터.

“대체 나 혼자 뭘 어쩌라고…….”

다시금 카페 안을 휘휘 둘러보던 정원의 시선이 문득 테라스에 닿았다. 화사한 봄 햇살 아래 하늘거리는 꽃들이 눈부시다.

무심코 테라스로 걸음을 옮긴 정원은 제일 눈에 띄는 꽃 앞에 털썩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생각 없이 툭 말을 뱉었다.

“얘, 넌 장미니?”

도도하고 화려하지만 왠지 강인해 보이는 장미와는 미묘하게 다른 것이 좀 더 여리고 하늘하늘하다. 꽃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정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에……, 아무래도 아닌 거 같지? 너 이름이 뭐였더라.”

정원은 그제야 노트와 함께 들고 다니던 책을 펼쳐 보았다. 윤주가 도움이 될 거라며 뒤쪽 서가에서 꺼내준 꽃 도감이었다.

“음……. 요기 있다. 라넌큘러스? 생긴 건 하늘하늘한데 이름은 뭔가 거창한걸?”

잠시 꽃에 대한 설명을 훑어본 그녀가 대뜸 인상을 썼다.

“응? 작은 작약? 너가 작약이었어? 그냥 작약이라고 해도 되는 걸 외우기도 어렵게 라넌큘러스가 뭐니.”

정원은 어느새 혼자 남은 불안함도 잊고 꽃들의 이름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너는 많이 보긴 했는데, 그러니까…… 리시안셔스? 오호라.”

다시금 책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응? 꽃 도라지? 에……, 도라지꽃이랑 뭔가 다른 거야? 크기가 다른가? 아니, 모양도 좀 다른 거 같긴 한데…….”

잠시 고민하던 정원이 대뜸 결론을 내렸다.

“아무튼 도라지꽃의 일종이라는 거지? 거참, 쉬운 이름 놔두고…….”

윤주의 설명을 들을 때도 그랬지만 생전 처음 보는 꽃들이 참 많았다. 무심코 시작한 일에 어느새 폭 빠져든 정원은 책을 들고서 꽃들을 하나하나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다란 줄기 끝에 조그맣고 하얀 꽃망울이 자잘하게 달린 꽃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호, 네가 말로만 듣던 보리수구나.”

그리고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응? 그런데 나무가 아니라 꽃이었어? 어라, 아닌데? 보리수는 나무 맞잖아. 너! 정말 보리수야? 음……, 동명이화 뭐 그런 건가? 이상하네.”

꽃이 대답할 리 만무하건만 낮게 중얼거리던 정원이 갑자기 씩 웃었다.

“아하! 보리수나무에 피는 꽃인가 보구나? 오호, 생각 외로 귀여운걸.”

크기별로 다양한 형태의 꽃다발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커다랗고 화려한 꽃다발부터 작고 귀여운 키친 부케와 심플하고 과감한 센터피스까지. 별다른 장식을 한 것도 아닌데 밋밋하던 테라스가 화사하게 반짝거린다.

문득 능숙하게 꽃을 다루던 윤주를 떠올린 정원이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흠. 실력이 좋긴 한가 보네. 그래서 그렇게 도도하신가.”

급격히 꽃에 대한 관심이 식어 버린 정원이 귀여운 키친 부케들 앞에 풀썩 쪼그리고 앉았다.

“근데 얘들아, 우리 사장 말야. 어쩜 사람이 그러니? 자기가 사장이면 다냐고. 첫 출근에 직원이라고는 달랑 나 하난데, 좀 편하게 대해 주면 손가락이 부러지니, 입술이 부르트니? 솔직히 이건 좀 아니잖아?”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고, 사실 잘해 준대도 부담스러울 터였다. 그럼에도 이 서운한 감정은 무얼까.

“얼음으로도 모자라서 자기가 무슨 녹음기야? 설명만 줄줄 하고 사라지면 다냐고요. 매너가 꽝이란 말이지.”

맥없이 중얼거리던 정원이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고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 내내 기가 죽어지낼 수는 없었다. 앞으로 일 년이 아니라 몇 년이라도 버텨 주고야 말리라.

“아자! 은정원 파이팅!”

나름 비장하게 마음을 다잡은 정원이 새삼 꽃들을 쓱 훑어보았다.

“그나저나 너희들 이름은 언제 다 외우니? 대체 뭐가 이렇게 많은 거야.”

생전 처음 보는 특이한 꽃들에게 괜히 시비도 걸었다.

“너도 꽃이야? 풀 아니고?”

말은 그리 했지만 연한 초록색의 보드라운 밤송이 같은 꽃이 꽤 귀여웠다. 그 옆에 낯익은 꽃(?)을 발견한 정원이 씩 장난스럽게 웃었다.

“오호, 내가 넌 알지. 청 보리. 근데 니가 왜 꽃들 틈에 끼어 있니?”

정원이 문득 고개를 갸웃하며 코끝을 찡그렸다.

“이거 순 장식용 아냐? 음……, 그러기엔 좀 비싸 보이는데. 니들 정말 팔리기는 하는 거니?”

눈을 가늘게 뜬 그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역시 수상해. 완전 수상해.”

“뭐가 그렇게 수상합니까?”

“엄마야!”

갑자기 들려온 낮은 음성에 화들짝 놀란 정원이 인상을 쓰며 휙 돌아섰다. 그리고 예의 무심한 시선에 순간 찔끔했다. 설마, 다 들었을까? 대체 언제부터 저기 있었던 것일까.

‘쳇! 들었으면 어쩔 건데.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괜한 오기에 정원이 고개를 반짝 들고 진하를 빤히 마주 보았다. 정작 그의 질문엔 대답도 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당돌한 그녀의 시선이 더없이 뻔뻔하다.

‘수상해? 그러는 당신은 아주 이상해. 모르나?’

진하는 무심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지그시 눌러 삼켰다.

“점심.”

“네?”

“점심은 어떻게 할 겁니까?”

“아, 점심. 그게……, 정말 어떻게 할까요?”

말똥말똥 그를 쳐다보는 동그란 눈동자가 한숨이 나올 만큼 천연덕스럽다.

진하는 다시금 불쑥 솟는 불편한 감정을 애써 다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돌아서 카페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용히 뒤따르는 기척이 느껴졌다.

진하는 주방에서 간단한 점심을 준비했다. 이것저것 잡다하게 설명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것이다. 그런데 그새 자리를 비운 그녀가 테라스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진하는 짧은 순간 다채롭게 변화하는 그녀의 표정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는가 싶더니 금세 심각해지고, 대뜸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버럭 인상을 쓴다. 하다하다 꽃들에게 그의 뒷담화까지 늘어놓았다.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무심코 말을 걸고 말았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딱히 대답이 궁금한 것도 아니었다.

‘역시, 불편해.’

현성의 부탁도 있고, 스치듯 한 번 보았을 뿐인 여자를 굳이 피하는 것도 우스워 채용을 결정했다. 하지만 진하는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다시금 회의를 느꼈다.

직설적으로 파고드는 커다란 눈망울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엉뚱한 행동들도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조막만한 얼굴에 선명하게 묻어나는 감정도, 거침없는 표현들도 그저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무언가 잘못된 기분. 항상 모든 것이 분명한 그로선 꽤 오랜만에 느끼는 모호함이 아닐 수 없었다.

정원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꾹꾹 눌러 삼켰다.

‘아놔! 말을 하란 말이지. 사람 답답하게!’

환한 햇살이 눈부신 오후이건만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소의 심정이 이럴까. 뒷모습조차도 찬바람이 쌩쌩 불 것만 같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것일까. 뭐가 그리도 마음에 안 들어서 뻑하면 시린 눈으로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지 모르겠다. 그래 놓고 말도 없이 훌쩍 돌아서 가 버리는 건 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고약한 버르장머리인지. 콱! 한 대 쥐어박으면 속이 시원하겠다.

카운터에 도착한 그가 정원 앞에 불쑥 접시를 내밀었다.

“……?”

신선한 야채와 햄 치즈가 먹음직스럽게 곁들여진 베이글 샌드위치가 접시 위에 예쁘게 놓여 있었다. 당황한 정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하를 보았다.

그새 머신 앞에 선 그의 어깨 너머로 진한 커피 향이 물씬 피어오른다. 이어 커다란 커피잔을 정원 앞에 내려놓은 진하가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녁도 샌드위치 정도는 준비할 수 있을 겁니다. 직접 만들어 먹어도 되고요. 그리고 원한다면 식사 시간을 따로 정합시다.”

“아, 저 샌드위치 좋아해요. 감사합니다.”

왠지 기분이 급 좋아진 정원이 배시시 웃으며 넙죽 인사를 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짜증이 나는 법. 그래서 그가 준비해 준 샌드위치와 커피가 이다지도 반가운 것이리라.

“사장님은 안 드세요?”

그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또 뭐가 불만인 것일까. 정원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 맞다. 저녁 시간. 아무래도 식사 시간은 정해 놓는 게 좋겠죠?”

첫날이라 미리 일을 배우기 위해 일찍 왔을 뿐, 정원의 정식 출근 시간은 오후 3시, 퇴근은 자정이었다. 지금껏 과외를 해 왔던 그녀인지라 근무 시간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저녁까지 공짜로 해결할 수 있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나저나 저녁 시간 정하는 것이 뭐 대단한 문제라고 저리 인상을 굳히는 것일까. 아무튼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말없이 돌아선 그가 안쪽에 마련된 음반들을 뒤적거렸다. 묘한 침묵 속에 혼자 샌드위치를 먹자니 머쓱해진 정원이 불쑥 말을 이었다.

“이게 메뉴에 있는 샌드위치인가요?”

“그때그때 다릅니다.”

“달라요?”

“주방에 레시피가 있을 겁니다. 그날 준비된 재료에 따라 레시피 대로 만들면 됩니다.”

“어……, 그것도 제 담당인가요?”

그제야 고개를 든 진하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만약 자리를 비우게 되면 은 매니저가 관리합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 카페 관리가 그녀의 주된 업무라고 하지 않았던가. 불현듯 메뉴에 길게 붙어 있던 와인 리스트를 떠올린 정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제가 와인은 잘 모르는데요.”

“몰라도 됩니다.”

“네?”

“…….”

“아, 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예의 서늘한 시선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번번이 무슨 경우인지. 툭하면 말없이 사람 기를 죽인다. 정원은 대화를 포기하고 덥석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우와, 이거 정말 맛있네요. 진짜 사장님이 만드신 거예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은 정원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진하를 보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무반응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우, 대답 좀 해 주면 입이 삐뚤어지나. 체하겠네.’

너무나 맛있는 샌드위치가 순간 목에 턱 걸려 버렸다. 슬쩍 진하를 노려본 정원이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또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사를 토해냈다.

“우와, 커피도 죽인다아. 사장님 솜씨 좋으시구나.”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정원을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대뜸 엉뚱한 소릴 한다.

“마스터.”

“네?”

“사장님이 아니라 마스터입니다. 앞으로는 마스터라고 부르세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반 토막도 아니고 불쑥불쑥 한마디씩 뱉는 말들이 난데없다 못해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쩌랴. 그녀는 그저 생초짜 ‘을’에 불과한 것을.

“네. 그러죠, 뭐. 마스터.”

그래, 딱 어울린다. 얼음마스터. 정원의 대답은 듣는 둥 마는 둥 그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쩜 저리도 한결같이 서늘하신지.

‘아, 몰라. 입안에 거미줄을 치든, 곰팡이를 기르든 내 알 바 아니지. 흥! 내가 다시는 먼저 말하나 봐라.’

싸늘한 진하의 뒤통수를 샐쭉 노려본 정원이 낮게 한숨을 쉬며 손에 든 샌드위치를 덥석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