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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회> 의식하게 되다, 너를





쿵! 쿵! 쿵!

농구공이 벽을 울리는 소리가 사람의 신경을 긁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가희는 연필을 꾹 움켜쥐고는 참을 인을 속으로 되뇌며 참고 있었다.

쿵!

“하아, 진짜 너무하네.”

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한 번 노려보다 이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1년만 참아 달라고 했던 자신의 말을 묵살한 엄마가 오늘따라 더 야속해지는 순간이었다.

딸깍.

방문을 열고 나간 가희는 옆방을 한 번 노려보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몰골이 초췌하게 보였다. 쓸데없는 데 힘을 빼게 하는 옆방 주인이 얄미웠다. 곧 치를 중간고사 공부를 해야 하는데 생각만큼 집중이 안 되고 있었다.

“세수나 해야겠다.”

가희는 긴 머리를 틀어 올려 쥐고 있던 연필로 머리카락을 고정했다.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으며 가희는 인상을 썼다. 아직은 차가운 물이 몸에 닿으니 춥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 차가…… !”

가희는 화장실 입구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지훈을 보며 멈칫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지훈과 눈싸움이라도 하듯 말없이 쳐다봤다. 가희의 얼굴에 묻은 물이 흘러 바닥으로 툭 떨어질 즈음 지훈이 입을 열었다.

“커피 마실래?”

너무 자연스러운 질문에 가희는 오히려 위화감이 들었다.

“어? ……어.”

“얼굴 닦고 내려와.”

“어?”

커피를 마시겠느냐고 묻기에 당연히 타서 가져다줄 줄 알았는데 내려오라니. 가희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욕실을 나와 아래층을 내려다봤다. 조용하며 어두운 거실과 작은 등이 밝혀져 있는 주방은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무선 주전자를 등지고 서서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보고 있는 지훈은 자신이 주방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가희는 우물쭈물하다 식탁 의자에 앉았다. 같이 서서 커피를 타는 것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뭐 어렵다고 나란히 서서 커피를 같이 타느냔 말이다.

“원두? 믹스?”

“원두.”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머그잔에 물을 붓는 지훈을 가만히 바라봤다. 딱 벌어진 어깨가 다부져 보였다.

탁.

지훈이 머그잔을 식탁 위에 올리자 가희는 멀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왜?”

식탁 위에 올려진 머그잔은 하나뿐이었다.

“넌 안 마셔?”

“안 마셔.”

“어?”

어이가 없어 되묻는 가희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자신에게 커피를 타 주려고 했단 말이야? 왜?

“내가 같이 마신다고 하진 않았잖아?”

싱크대에 비스듬히 기대는 지훈을 보다 가희는 머그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무슨 의도냐고 묻는다면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 입을 닫아 버렸다.

“뜨거워.”

머그잔에 입술을 대는 순간 경고하듯 지훈이 한마디를 툭 내뱉자 심장이 울컥하며 펌프질을 했다. 마시지도 못하고 잔을 내려놓지도 못한 가희는 고개를 들어 지훈을 쳐다봤다. 자신의 행동을 지켜보는 지훈의 눈동자가 착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아 괜히 위축됐다. 친절하지 않은 눈빛으로 행동과 말은 친절한 지훈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직접 해도 되는 거였는데…….”

“해 주고 싶었어.”

작은 소리로 의미 없이 내뱉은 말에도 대꾸를 하는 지훈이었다. 가희는 머그잔을 들고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르륵.

식탁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마치 천둥이 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가희는 태연한 척하며 잔을 들었다.

“잘 마실게.”

그렇게 말하고는 한 발을 떼는데 지훈이 옆으로 다가왔다.

“어!”

그가 손을 든다고 생각하는 순간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스르륵 흘러내리더니 어깨 위로 쏟아졌다. 움찔 놀란 가희는 그대로 얼어 버렸다.

연필에 잠시 시선을 두던 지훈이 눈길만 들어 바라보자 마른침이 넘어왔다. 자신보다 한 살이나 어린데도 분위기를 압도하는 지훈 때문에 이 집이 숨 막힌다는 생각을 종종 하고는 했다. 겨우 몇 달을 같이 살았는데도 이렇게 힘겨운데 졸업 때까지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막막했다.

“이 연필로 공부하면 잘돼?”

어이없는 질문. 그런데 그 질문이 그리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공부에 필요한 도구일 뿐이지.”

“내가 이 연필로 공부해서 성적 올리면 어떻게 할래?”

네 성적 올리는 것을 왜 나한테 묻는 건데? 톡 쏘는 말을 하려던 가희는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너한테 좋은 일인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가희는 지훈을 무시하며 한 걸음을 뗐다. 빠른 시간 안에 방으로 사라지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 같았다.

“그럼 누구한테 물어? 여기에 너랑 나 둘 뿐인데?”

죽어도 ‘누나’라는 말은 못하겠다는 듯 자신을 지칭할 때마다 ‘너’라고 하는 지훈 때문에 가희는 부아가 치밀었다. 자신도 그다지 누나로 인정받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연장자 대우는 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자신은 공부가 중요한 고 3이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이들이 안쓰러워하고 걱정해 주는 고 3이란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신경을 긁어대는 짓은 하지 말아 주었으면 했다.

“말해 봐. 내가 성적을 올리면 넌 어떻게 할 건데?”

진짜 못 말리겠다. 가희는 체념을 하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전교 30등 안에 들면 내가…….”

“네가?”

“맛있는 거 사 줄게. 됐지?”

“전교 30등? 장난해?”

지훈의 성적이 밑바닥이라는 것을 우연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가희는 부러 실현 불가능한 등수를 불렀던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맛있는 것을 사 줄 의무도 없고 지훈이 다시는 자신을 성가시게 하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밑바닥 인생한테 전교 200등 안에 드는 것도 어려운데 30등이라니. 돌았냐?”

피식 웃는 지훈에게 욱하는 마음이 들어 소리를 바락 지를 뻔했다. 그러면서 묻기는 왜 묻느냐고 따질 뻔 했다.

“싫음 말고.”

“누가 싫대?”

도대체 뭐 하자는 걸까. 말장난? 가희는 지훈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연필을 보려 살짝 내리뜬 지훈의 긴 속눈썹이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좋아. 30등.”

가희는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중간고사를 일주일 남겨 두고 밑바닥 성적을 전교 30등으로 끌어올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용돈 두둑하게 챙겨 놔. 나 아무거나 안 먹으니깐.”

연필을 살짝 흔들고는 지훈이 성큼성큼 걸어 2층으로 올라가자 가희는 멍한 표정을 짓다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설마, 해내는 건 아니겠지?”

지훈이 사라진 쪽을 보던 가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혼자 어깨를 으쓱하다 걸음을 뗐다.



탁.

옆방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지훈은 문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연필을 내려다봤다. 여학생들이 흔히 쓰는 연필이 아니었다. 흔한 캐릭터 그림 하나 없는 밋밋한 노란색에 끝에는 지우개가 달린 연필이었다. 어찌 보면 삭막하게 보일 법도 했다.

“특이하네.”

책상에 앉은 지훈은 연필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손에 잡히는 그립감이 좋았다. 가볍지 않고 적당한 무게감을 주는 연필이 안정적으로 한 바퀴 빙 돌더니 엄지와 검지 사이에 안착을 했다.

“30등이라…….”

지훈은 수학 문제를 빡빡하게 푼 연습장을 보며 피식 웃다 이내 웃음기를 거뒀다.

학교 성적이 바닥이라는 이유로 학원을 다니라는 아버지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를 챙기지 않은 건 아버지의 잘못이라 여겼다. 한동안 어머니를 증오했고 세상의 모든 여자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었다. 그 과정에서 반항하는 심리로 성적을 방치해 점수를 떨어뜨렸다. 시험지 답을 다 비켜 적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속을 뒤집기 위한 소극적인 반항이었다. 그런데 이제 슬슬 그 반항을 누구 때문에 접어야 할 것 같았다.

“30등은 너무 딱 맞춘 느낌이 들려나? 29등을 할까?”

지훈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한 손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너 안 가? 학원 늦었는데?’

학원 시간쯤이야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아침에 봤던 그 애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 애가 뭔데 심장이 그리 미친 듯이 뛰었는지 다시 한번 본다면 확실해질 것 같았다.

‘야! 서지훈 학원 늦었다고!’

‘강혜원, 나 기다릴 거면 조용히 하든지 아님 먼저 가든지.’

성가셔 죽겠다는 얼굴로 혜원을 돌아보지도 않고 중얼거린 지훈은 미간을 구겼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슬슬 오기 같은 것이 발동했다. 이제 교문을 지나치는 아이들도 거의 없었다. 유령을 본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눈이 똑바로 마주쳤고 누군가가 그 애를 ‘가희’라고 불렀던 기억이 또렷했다.

‘누구 기다리는데?’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고 나오던 아이들은 이제 없고 학교의 교무실을 제외하고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몰라.’

짜증을 내는 혜원처럼 자신도 짜증이 났다. 왜 보이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다. 분명 놓쳤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야자를 안 하고 먼저 갔다면 자신이 놓쳤을 가능성은 있었다. 그렇게 4일 동안을 찾았지만 찾지 못했었다.

‘인사해라. 여기는 내 딸 이가희란다.’

아버지의 재혼 상견례 자리에 나타난 그녀를 보는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토록 찾을 때는 거짓말같이 보이지 않더니 왜 하필 이런 자리에 있는 것인지 원망스러웠다.

심장은 뛰어대고 머리는 어지럽고 손은 떨렸다. 어떻게 그 자리를 벗어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지영 누나가 옆에서 뭐라고 말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했다.

‘친아버지한테 가기 전에 집에 들어와 산다네.’

기억나는 건 그녀가 캐나다에 있는 친아버지한테 가기 전까지 1년만 같이 산다는 것이었다. 무시하려 했다. 학원을 갔다가 독서실을 전전하며 집에 있는 시간을 줄이고 부딪치는 시간을 줄이려 무진 애를 썼었다.

‘서지훈?’

독서실 입구 앞에 서서 자신을 부르는 그녀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가 이거 가져다주라는데…… 웬만하면 집에 들어와서 갈아입고 가. 귀찮으니깐.’

뭐가 귀찮아? 난 너 피해 다닌다고 지금 죽을힘을 다 하고 있는데. 아무런 감정도 없는 듯 말하는 그녀가 얄미워 집에 들어갔다. 내가 흔드는데 네가 안 흔들리는지 보자는 심보였다. 그런데 자신이 자꾸 흔들렸다. 방에만 들어가면 공부한다고 나오지 않는 가희를 불러낼 방법이 없었다.

똑똑.

바닥에 뒹구는 농구공을 벽에 생각 없이 튕기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왜?’

문밖에는 가희가 서 있었다. 조금은 미안한 얼굴로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려는 모습에 심장이 파지직거리며 전기가 통하는 소리가 났다.

‘시끄러워서.’

농구공을 가리키며 말하는 가희는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가희를 방 밖으로 불러내는 방법으로 농구공을 벽에 튕겼다.



* * *



닮았다. 딸은 아빠를 닮아야 잘 산다는데. 친아버지를 못 봐서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가희는 새어머니를 빼다 박은 얼굴이었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가야 공부가 잘되지.”

“배부르면 잠 와요.”

아침을 안 먹고 다닌 지가 몇 년째였다. 아버지의 말에 시큰둥하게 토를 단 지훈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가희를 쳐다봤다. 자신의 밥공기에 담긴 밥보다 현저히 적은 양이었다. 저렇게만 먹고 어떻게 버티나 싶을 정도였다.

“잘 먹었습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똑 부러지게 인사한 가희가 일어서자 아버지가 “더 먹지 않고.”라며 말하고는 허허, 소리를 내 웃었다.

나 참, 없어 보이니 웃지 마시죠. 지훈은 속으로 아버지를 향해 투덜거린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훈아, 아직 밥이 남았는데…….”

당황한 새어머니가 자신을 올려다봤지만 지훈은 미련 없이 식탁에서 물러났다.

“아침을 안 먹던 습관이 있어서 속이 불편해요.”

“그 그랬니?”

어쩔 줄 몰라 하는 새어머니를 보니 순간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지훈은 눈을 접고 미소를 지었다.

“차차 익숙해지도록 할게요.”

주방을 나서며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인사하는 가희를 보며 지훈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마치 자신을 피하는 것 같아 못마땅함이 들었다. 가희를 뒤따라 현관으로 향하던 지훈은 아직도 자고 있는 지영을 보러 걸음을 돌렸다.

똑똑. 1층 서재 바로 옆인 누나의 방문을 열면서 노크를 했다.

“누나, 아직 안 일어…….”

침대에 앉아 퀭한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누나의 얼굴은 술에 찌들어 있었다.

“작작 좀 마셔.”

“저게 누나한테 말본새하고는.”

지영이 한 대 때릴 것처럼 주먹을 쥐고 팔을 들자 지훈은 한쪽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은 모르겠지만 가희가 새어머니의 재혼을 받아들이는 것과 누나가 아버지의 재혼을 받아들이는 데는 차이가 많았다.

“밥 먹어.”

“넌?”

말은 거칠게 해도 동생이라고 챙기고 나오는 지영을 보며 지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 걱정 말고. 학교 갔다 올게.”

“열심히 해. 바닥만 기지 말고.”

“……안 그래도 이번에 29등을 할까, 하고.”

“뭐? 너 존재하지도 않는 등수를 바라보고 있냐? 너희 반 인원수가 27명인데 29등을 한다고?”

“아, 정정. 전교 29등.”

“뭐?”

눈을 커다랗게 뜨던 지영이 너 미쳤냐, 하는 말을 중얼거리자 지훈은 어, 나 미쳤어. 하고 대꾸했다.

“돌았네, 돌았어.”

지영이 검지를 허공에 휘젓든 말든 지훈은 기분 좋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