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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연금술사 리덴 1권(6화)
2. 죽음이 내려앉는 풍경(2)


“저, 선생님.”
이븐이 끼어들었다.
“응? 아아. 그래. 지금은 바보랑 놀고 있을 때가 아니지. 너희들 말이지, 지금.”
리덴은 뭐라고 설명을 하려다가 문득 이븐의 오른쪽 가슴을 보고 말았다. 눈에 익은 엠블렘이 은빛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빠직.
“노예, 넌 뭐냐.”
리덴이 이븐에게 말했다.
“네?”
이븐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엠블렘의 의미를 알긴 하냐?”
리덴이 물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선생님 옷장을 정리하다가 이런 표식의 로브가 있었습니다. 멋있게 느껴져서 그만.”
이븐이 용서를 구했다.
“후우.”
리덴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은빛 쿠벤베르크 연금술사의 문양은, 쿠벤베르크 연금술사 가운데서도 정식으로 연금술사임을 인정받아 제자를 거둘 자격이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엠블렘이었다.
먼 옛날 리덴의 전생이었던 엔버의 스승이자 쿠벤베르크 연금술의 창시자 쿠벤베르크처럼.
리덴이 이어받은 지 오래인 엠블렘이지만 어쨌든.
덕분에 리덴은 문득 먼 옛날 자신에게 연금술을 가르쳐 주었던 스승 쿠벤베르크의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말이라기보다는 입버릇 같은 것이었으며 유언 같은 것이었으며 술주정이었다.

「견습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그래야, 그중 쓸 만한 놈을 골라내어 지식을 물려주지. 한두 놈씩 기르다가 어느 날 획 없어져 버리면 방법이 없어, 방법이. 그렇다고 해도 지금 나에게는 엔버, 너밖에 없다만. 시대가 시대니. 내가 죽고 네가 제자를 받을 나이가 되면 시대가 달라졌으면 좋겠다만.
아무튼 명심해라, 엔버. 너는 쿠벤베르크 연금술의 창시자인 내가 인정한 유일한 제자다. 나중에 꼭 제자를 많이 키우거라. 되도록 많이. 할 수 있는 만큼 많이.」

라는 식으로.
쿠벤베르크는 입에 술만 댔다 하면 엔버를 앉혀 놓고 제자가 많으면 어째서 좋은지, 제자가 한 명뿐이면 무엇이 나쁜지를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당시에는 잔소리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던 싫은 소리들이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쿠벤베르크 나름대로 한이 맺혀 있었던 것일 터였다.
드러내 놓고 제자를 받을 수 없는 연금술의 사회적 한계에 말이다.
“노예.”
그래서일까? 리덴은 이븐을 쿠벤베르크 연금술의 제자로 입문시켜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한 사제 관계가 됨을 뜻했다. 비전과 오의, 극의 등을 전수해 주겠다는 뜻이다.
“네, 선생님.”
이븐이 대답했다.
“진짜 제자가 될 생각이 없으면 그 엠블렘 뜯어 버려. 아니라면 노란색으로 바꾸고 대야에 물 떠와.”
리덴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이븐이 대답을 하고는 일어났다. 그러고는 주변에 놓여 있던 대야를 들고는 지하실을 나갔다. 리덴의 진정한 제자가 되어 쿠벤베르크 연금술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렇기에 나가면서 엠블렘의 색도 바꾸었다.
“돈줄.”
리덴이 이번에는 세나를 불렀다.
“왜요? 선생님.”
세나가 대답했다.
“넌 좀 나가 있어라. 너는 나의 제자지만 진짜 제자는 아니다. 쿠벤베르크 연금술을 접할 자격이 없지. 적당히 돌아다니다 와.”
리덴이 그런 말을 했다.
“네.”
세나는 두말없이 발을 돌려 지하실을 떠났다. 리덴의 말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세나와 이븐은 리덴이 원해서 받아들인 제자가 아니었다. 세나는 황실이, 이븐은 연금술사 길드의 추천이 있었다. 이는 의무였고 6급 연금술사가 될 때까지만 돌보면 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다른 것이다. 리덴은 이븐을 쿠벤베르크 연금술사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즉, 자신이 선택한 제자이며 진심으로 가르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따라서 세나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세나가 떠나고 5분이 지나지 않아 이븐이 대야에 물을 가득 떠왔다.
“노예, 제자가 됨은 스승을 하늘처럼 섬긴다는 뜻이다. 네가 나의 진짜 제자가 되어 배울 것들은 연금술사 길드는 물론이고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식, 혹은 그에 준한 누군가에게도 전수해 주어서는 안 된다. 쿠벤베르크 연금술의 모든 것은 쿠벤베르크 연금술사들만의 것이다. 동의한다면 나를 진정한 스승으로 섬기겠다는 그 증표로써 내 발을 씻겨라.”
리덴이 그런 말을 하고는 주저앉아 양말을 벗고 대야에 발을 담갔다.
“네, 선생님. 저야말로 선생님의 진짜 제자가 될 수 있어 한없이 영광입니다.”
이븐은 그런 말을 하고는 소매를 걷었다. 이어 정성을 다해 리덴의 발을 씻겨 주었다. 그러는 사이 리덴은 자신의 제자로서, 쿠벤베르크 연금술사로서 지켜야 할 계율을 말해 주었다. 그게 끝나자 이번에는 리덴이 물을 떠왔다.
“머리 숙여. 감겨 주마.”
리덴이 말했다.
“네?”
이븐이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스승으로서의 의무다. 제자는 스승의 발을 씻기고 스승은 제자의 머리를 감긴다. 지식을 전수해 주고 수발을 든다는 뜻이지. 알았으면 이쪽으로 와서 머리나 숙여.”
리덴이 약간의 설명을 보태서는 말했다.
“네.”
이븐이 리덴의 지시에 따랐다.
리덴은 이븐의 머리를 감겨 주며 쿠벤베르크 연금술의 역사와 기원, 그리고 자신의 정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나는 리덴의 말에 따라 잠시 연금술사 리덴의 집을 나섰다. 아직 밤인지 거리는 무척이나 어두웠다. 그러나 세나는 사물을 구분할 수 있었다. 어째서일까? 횃불이 필요할 정도로 캄캄한데 거리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전부 구분할 수 있었다.
아무려면 어때.
세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진지하게 생각을 한다는 것은 그녀와 가장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우. 캄캄해. 이런데 나가서 뭘 하라는 거야.”
한바탕 투덜거린 세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거리만큼이나 어두운 하늘이었다. 달도 별도 없었다.
갸웃.
세나는 조금 수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려면 어때, 하고 넘겨 버렸다. 밤인데 구름이 꼈나 보다 정도로 생각한 것이다.
‘정식 제자……라. 고 앙큼한 계집애가 진짜.’
세나는 이븐을 떠올리고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리덴은 물론이고 연금술에 흥미가 없었다.
“에휴. 아무튼 좀 돌아다니다 오면 되겠지. 이런 밤중에 나처럼 귀여운 귀족 아가씨를 쫓아내다니 선생님은 정말. 바보, 멍청이.”
한바탕 투덜거린 세나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10분 정도 걸었다. 밤이어서인지 거리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낮이었다면 몇 명 정도는 돌아다니고 있을 터였다.
‘그건 그렇고.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세나는 문득 자신의 옷을 바라보며 리덴이 말했던 ‘이대로라면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죽을 거다.’라는 발언을 생각했다.
확실히 이븐이 쓰러지고 세나 자신도 무언가에 의해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이대로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뭘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세나는 그냥 그런 생각들을 하며 걷고 있었다. 리덴이 새벽이 되면 올라가는 종루를 지나 걸음을 중심가 쪽으로 옮겼다.
연금술사 리덴의 집은 웨이랜더 제국 수도 타로스의 변두리 지역에서도 변두리, 그 변두리 가운데서도 토지세가 싼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리덴은 돈을 벌기 위해 상점을 연 것이 아니었기에 이목의 좋고 나쁨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부 품목은 툭하면 품절됐다.
하급 생명수.
중급 생명수.
라이트 스톤.
성수.
큐어 포션.
같은 것들 말이다. 또한 연금술사 리덴의 집에서는 무기와 방어구의 가공도 서비스하고 있었다.
무게를 줄이는 경량화.
경도를 높이는 재질 강화.
속성의 부여 및 강화 혹은 삭제 등등.
품질은 좋고 성공률도 높았다. 리덴 자신이 하면 99.99퍼센트 성공했다. 대개의 3급 연금술사의 평균 성공률이 70퍼센트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수치였다. 대신 값이 조금 비쌌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연금술사는 제공하는 서비스를 리덴은 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스크롤 제작―마법이 봉인되어 있는 두루마리. 봉인의 인장을 해제한 후 두루마리를 펼쳐서 시동어를 읊으면 마법이 발동하도록 되어 있는 아이템.
마나석 제작 및 가공―마나를 품고 있는 수정. 자연 상태에서의 수정을 연금술사가 가공하여 제작이 가능.
지팡이 및 수정구를 비롯한 마법사의 장비 제작―마법사가 마법을 시전할 때 도움을 받는 장비의 제작은 연금술의 고유 영역이었다. 연금술사 상점에 있어서는 주력 상품.
기타 모험용 장비―추위나 더위를 막아 주는 옷이나 침구 세트. 용적의 100배를 담을 수 있는 무한의 가방. 감기만 해도 약간의 부상이나 출혈은 간단히 치료되는 치료의 붕대 등등.
주로 마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물품들이었다. 그렇기에 세나는 리덴이 보통의 연금술사와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뻔한 일이었다. 아무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다. 대륙은 넓고 연금술의 파벌은 모래알만큼이나 많았다. 그러니 독특한 형태의 연금술사가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메리스 백작 가문에 봉사하는 1급 연금술사 헥스 역시 그런 부류였기 때문이었다.
‘치, 잘해 보라지.’
세나는 자신도 모르게 토라진 얼굴로 리덴과 이븐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둘이 비전 지식을 주고받는 사제지간이 되든 알콩달콩한 연인 관계가 되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문득,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내일부터 있을지도 모르는, 리덴과 이븐의 죽이 척척 맞아 세나가 따돌림당하는 현상을 떠올리고 만 것이다.
까놓고 말하면 지금도 그랬지만.
“가서 깽판 놓을까? 더 이상 나 혼자 바보 되는 건 싫어.”
세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발을 멈추었다가 머리를 흔들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깽판 놓았다가 어떤 보복을 당할지 두려워진 것이었다.
그리고 100m나 걸었을까? 세나의 귀에 뭔가 삐걱이는 소리가 울렸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거니 하며 무시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쿵.
굉음이 울렸다. 세나는 시선을 돌려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고 거기에는 그저 집이 한 채 있을 뿐이었다.
단층의 벽돌집.
쿵.
세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쿵.
쿵.
‘뭐, 뭐, 뭐야 또.’
세나는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났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쿵. 쿵. 쿵. 쿵.
거리를 가운데 두고 양쪽의 집에서 벽이 부서져라 굉음이 울렸다. 못이라도 박는 걸까? 그런 건 아닐 터였다.
‘무기. 무기가 필요해.’
세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마땅히 손에 쥘 만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눈을 감고 옷을 만들었을 때와 같은 요령으로 검을 떠올렸다.
번쩍.
세나의 손에 빨간 손잡이를 가진 멋진 롱 소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콰르릉.
양쪽 집에서 어느 쪽이라고 할 것 없이 벽이 부서지며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보기에는 사람이었다. 손을 뻗은 채로 머리가 터져 있다는 점이 약간 이상할 뿐이었다. 하지만 세나는 그것들의 정체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짙은 죽음의 기운.
언젠가 보았던 몬스터 도감에 실려 있는 좀비였다. 흑마법에 의해 되살아난 인간. 이성은 없고 본능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을 공격하는 괴물이었다.
“헹. 이까짓 꺼!”
세나가 기세를 올렸다. 익스퍼트 중급의 기사에게 좀비는 허수아비나 같은 것이었다.
우웅.
세나의 검이 울음을 토하며 옅은 붉은색의 검기를 일으켰다. 본래 세나의 검기는 파란색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