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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연금술사 리덴 1권(11화)
3. 불타는 황궁(2)


끄덕.
제2내성 수비군 부대장 아리한트는 3조 7분대 대장 디셀의 제안에 따라 병사들을 이끌고 성문 아래쪽에 대기했다.
덜컹, 덜그락, 덜컹, 덜그락.
성문은 점점 거세게 흔들리며 최후를 향해 가속하고 있었다. 아리한트는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성문이 부서지면 좀비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올 테고 그러고 한동안은 어떻게든 싸우겠지만 결국에는 죽을 터였다. 이는 아리한트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아리한트와 함께 성문의 최후를 기다리는 병사들 모두 아리한트와 마찬가지로 이제 죽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번쩍.
빛이 있었다. 제2내성 성문 위에서 태양과 같은 빛 덩어리가 나타났다. 그러자 거칠게 흔들리던 성문의 움직임이 멎었다.
“부대장님. 부대장님!”
성문 위에 남아 있던 병사들 중 하나가 아리한트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
아리한트가 소리쳤다.
“문을…… 성문을 열랍니다. 우리는 살았어요!”
병사가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성문을 열어? 누가?”
아리한트가 물었다. 열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냉큼 열 수는 없었다. 제2내성을 통과할 수 있는 자는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 그게 말입니다. 부대장님. 좌우간 열랍니다. 열지 않으면 부수겠다고.”
병사가 우물쭈물 그런 말을 했다. 이에 아리한트가 잠시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성문에 균열이 생겼다.
쿠당탕.
성문이 부서지며 남자 하나와 어려 보이는 여자 둘을 필두로 각양각색의 많은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아리한트는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뭘 그렇게 바라봐. 사정은 대충 들었다. 망할 흑마법사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남자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리덴이었다. 제2내성에 드나들 수 있는 자는 작위가 있는 자나, 궁인, 황실 연금술사, 황실 마법사 등 소수에 불과하다는 규정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었다.
그런 것은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다.
“빨리 안내해. 대장 누구야?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해? 그리고 쉴 놈은 쉬어도 좋아. 한나절 정도는 괜찮으니.”
리덴은 그렇게 말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리한트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정체를 알지 못하는 무리들이 제2내성에서 멋대로 활개 치게 놔두어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판단이 선 자도 있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제2내성 수비군 3조 7분대 대장 디셀이 나섰다. 그만이 아니다. 3조 7분대 병사들 전체가 디셀을 따랐다.
“네가 대장이냐?”
리덴이 질문을 건넸다.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상관없지 않습니까. 이쪽입니다.”
대충 얼버무린 디셀이 앞장을 섰다. 이에 아리한트는 멍하니 디셀을 바라보았고 디셀은 살짝 고개만 까닥여 인사를 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한편.
별빛궁을 수비하는 소이 엘렌과 400의 황실 근위대 기사들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결사 항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시체의 수는 많았고 흑마법사들 역시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50명이 전선을 이탈하여 전력이 감소되었을 텐데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커헉.”
“웨이랜더 제국 만세!”
황실 근위대 기사들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황실 근위대 기사들에게 좀비들을 처리하는 일은 간단한 일이었다. 검기를 사용하여 그냥 베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좀비들 사이사이에 흑마법사들이 소환한 몬스터들이 섞여 있었다. 거기에 흑마법사들이 마법을 날리니 당해 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400명이었던 황실 근위대 기사들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덕분에 저지선도 후퇴를 거듭하여 별빛궁의 제7황녀의 처소 근처로 축소되었다.
7황녀는 손에 쥐고 있는 단검을 바라보았다. ‘이제 목숨을 끊을 때가 되었나?’ 하고 생각하다 ‘구원의 손길이 있을지도 몰라. 빛이 있었어.’라고 생각했다.
죽느냐, 사느냐.
7황녀는 서둘러 몸을 피한 황태자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닫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7황녀 전하.”
소이 엘렌이 왔다. 그녀는 몬스터들의 피에 목욕을 하다시피 한 몰골로 7황녀를 바라보았다.
“때가 된 거군요.”
7황녀가 말했다.
“무능한 소신의 불찰이옵니다. 전하.”
소드 마스터 소이 엘렌이 말했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황궁에 남기로 정한 것은 나 자신의 뜻이에요. 엘렌 경이야말로 수고 많았어요. 내가 남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엘렌 경이나 다른 기사들은 지금쯤. 이런 말을 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무의미하겠지요. 정말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7황녀가 그런 말을 했다.
쿠쿠쾅, 콰쾅.
굉음이 울리며 7황녀의 처소가 크게 흔들렸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7황녀와 소이 엘렌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구원의 손길을 떠올렸다.

리덴과 사람들은 제2내성 수비군 3조 7분대 대장 디셀과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별빛궁 앞마당에 도착했다.
이에, 이십여 명의 흑마법사들이 몸을 돌려 몬스터를 소환했다.
“빨리 끝내!”
리덴이 소리쳤다. 그러자 손이 근질근질했던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번개처럼 튀어 나가서는 몬스터를 학살하고 이십여 명의 흑마법사들을 포박하였다. 물론 마법도 봉쇄했다. 이어 리덴은 썬 라이트 토파즈 몇 개를 꺼내서는 라이트 붐버(Light Bomb)라는 것으로 가공했다. 물리적인 파괴력은 없지만 강력한 직사광선을 발하여 빛에 닿은 모든 언데드를 일순간에 소멸시키는 물건이었다.
원래는 섬광탄 같은 건데, 복잡한 구조를 가진 건물에 투척하여 언데드를 학살하는 용도로 쓰였다.
휙.
라이트 붐버를 던진 리덴은 바람 속성 연금 도형을 만들어 돌풍을 만들어 냈다. 덕분에 라이트 붐버는 별빛궁 내부로 쭈욱 파고 들어갔다.
콰쾅.
어쩐지 폭음이 울리며 별빛궁이 들썩였다. 리덴은 ‘가공을 잘못한 걸까?’라고 생각하다가 ‘아, 맞다. 그랬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트 붐버로 발생한 빛에 어둠 속성의 힘이 닿으면 폭발을 일으킨다는 점을 깜빡하고 있었다.
“노예, 은 막대 두 개.”
리덴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이븐이 지시에 따라 배낭에서 은 막대 두 개를 찾아 리덴에게 건네주었다. 연금술사 리덴의 집의 총재산이 들어 있는 배낭은 현재 1/10 정도가 줄어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연금 물품을 사용한 탓이었다.
스스스슥.
리덴의 앞에 흑마법사로 보이는 10여 명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검은 로브를 입고 있었고 검은 후드를 쓰고 있었다.
휘릭, 팍.
리덴은 은 막대 하나를 지면에 꽂았다. 그와 동시에 흑마법사들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검은색의 번개가 리덴을 향했다.
“하필 번개냐. 불쌍한 녀석들.”
리덴이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흑마법사들이 쏘아 낸 검은 번개는 리덴을 향하다가 방향을 바꾸어 리덴이 지면에 꽂은 은 막대에 적중했다.
우웅, 우웅, 우우웅.
이번에는 리덴이 손을 뻗었다. 바람 속성 연금 도형, 불 속성 연금 도형, 액체 연금 도형, 신념 연금 도형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답례다.”
리덴이 말했다.
바람 속성 연금 도형이 은은하게 빛을 내더니 돌풍을 토했다. 돌풍은 불 속성 연금 도형을 지나며 불기둥이 되었고 불기둥은 액체 연금 도형과 신념 연금 도형을 지나면서 마그마 같은 찐득한 무언가로 변화하였다.
화르륵.
액체 형태의 불기둥이 흑마법사들을 한 번 훑었다. 흑마법사들은 이를 막기 위해 흑마법을 사용하여 결계를 펼쳤지만 그것 자체가 홀랑 타 버리며 그들 자신에게도 불길이 옮겨 붙었다.
“으아악.”
“카아악.”
흑마법사들이 만세를 부르며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전신을 태우고 있는 불길에 정신이 반쯤 나간 것이다.
스팟.
그리고 한 명의 흑마법사가 그들의 후방에 나타났다. 땅을 한 번 후려치며 고함을 내지르자 흑마법사들을 태우고 있던 불길이 사라졌다.
“어쭈.”
리덴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드디어 대장 같은 녀석이 나왔구나 싶었다. 그에 허리춤에서 루비와 작은 다이아몬드 하나를 꺼냈다.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연금 물품이었다.
‘나 자신을 가공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지만, 할 수 없지.’
리덴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루비와 다이아몬드를 알약이라도 먹듯 입에 넣었다.
꿀꺽.
“모두 물러나 있어.”
리덴이 말했다. 이에 거의 구경꾼이 되어 있던 사람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러고는 실력이나 보자는 식으로 몇 걸음 물러났다.
“내 이름은 마로케이안. 7써클 흑마법사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그리고 목적은 무엇이냐.”
흑마법사가 물었다.
“7써클 흑마법사? 아무튼 내 이름은 알 것 없어. 9써클 흑마법사 카이롯트인가 하는 자식을 만나고 싶은데. 그놈 어딨어?”
리덴도 물었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 5써클 흑마법사들을 쓰러트린 것 정도로 기고만장하지 마라.”
자칭 7써클 흑마법사 마로케이안이 말했다.
“카이롯트인가 하는 자식 어딨냐니까. 뭐라는 거야.”
리덴이 짜증을 냈다.
“다크 스톰!”
마로케이안이 말했다. 그러자 리덴을 중심으로 어둠의 폭풍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기를 찢는 맹렬한 회전. 가까이서 구경하던 몇몇 사람들이 이에 휘말려 상처를 입었다.
쾅.
굉음이 울리고 어둠의 폭풍 속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이어 어둠의 폭풍이 찢어지며 하얀 기류에 둘러싸인 리덴이 모습을 드러냈다.
“9써클 흑마법사라는 자식 어딨냐고 물었지?”
리덴이 말했다.
“네놈.”
마로케이안의 음색이 굳어졌다.
“용쓰지 마. 너 정도의 실력으로는 날 어떻게 할 수 없어. 어둠의 힘을 사용하는 자라면 우리 학파를 이길 수가 없어. 알아? 알 턱이 없겠지만.”
리덴은 그렇게 말하고는 손가락을 들어 마로케이안을 가리켰다.
번쩍.
섬광이 터지며 한 줄기 빛이 마로케이안을 덮쳤다. 그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커헉.”
마로케이안이 신음을 토하며 배를 움켜잡았다. 리덴의 공격에 치명타를 먹은 것이다. 하지만 죽을 정도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모두 후퇴. 타로스는 여기까지다.
그런 울림이 있었다. 동시에 마로케이안이 사라지고 뒤를 이어 주변에 있던 흑마법사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다. 별빛궁 안에서 황실 근위대를 공격하던 흑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라?”
리덴이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는 이제부터인데 적이 사라져 버렸다.
‘아, 괜히 먹었다. 아깝게시리.’
리덴은 본격적인 싸움에 앞서 루비와 다이아몬드를 삼켰다.
블러드 루비, 홀리 다이어몬드.
비상 사태를 대비하여 자기 자신의 육체를 가공하기 위해 만들어 두었던 연금 물품이었다. 만드는 방법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소체를 구하는 것이 까다로웠다. 아무 루비나 다이아몬드를 가공해서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만들어 둔 것도 몇 개 없었다.
“오오. 대단한걸.”
“까탈스러울 만한데.”
“멋있다.”
“와아아아.”
“이겼다!”
구경하던 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의 눈에는 7써클 흑마법사를 압도적인 기량으로 물리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옳은 말도 아니었다.
‘뭐가 좋다는 지랄들이야. 남의 속도 모르고.’
리덴은 불쾌해져서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세나와 이븐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하기 바빴다.
‘할 수 없지. 이 빚은 별빛궁에 남아 있다던 7황녀에게 받아 내기로 하는 수밖에.’
리덴은 사고의 방향을 바꾸었다. 일이야 어찌 되었든 리덴은 흑마법사들을 물리쳐 황궁을 구한 영웅이었다. 보상 같은 것이 있을 터였다. 아니, 보상을 받지 않는다면 말이 되질 않았다.
‘이왕이면 레인보우 플라워 재료가 될 만한 것으로 받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런 게 있을 턱이 없겠지만. 돈이라도 잔뜩 뜯어내는 수밖에 없나.’
리덴은 그런 생각을 하고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 이븐에게만 조용히 따라오라고 말했다. 세나는 눈치 없이 굴 것이 분명하기에 떼어 놓을 작정이었다.
“어디 가요? 선생님.”
세나가 재빨리 리덴의 뒤를 따라붙으며 질문을 했다.